11번째 테라리움의 중추가 되는 과수원 옆, 전속이 되는 것에선 탈락했으나 협력으로 채결되어 테라리움 안에 둥지를 튼 길드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층을 올려 세운 건물들이 가득했다.
대형 길드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 역시 테라리움의 경쟁력으로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테라리움 측에선 조망권을 해치는 건물들의 난입에도 크게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가장 땅값이 비싼 중심부에 터를 제공하고 층을 높이는 비용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물론 그것도 대형 길드에 한해서였다.
업적으로 보나 머릿수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대형 길드보다 한참 떨어지는 중소형 길드들은 외곽 지역에 간신히 터를 잡고 이미 지어진 건물에 세를 내고 지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했고 자부심으로 여겼다.
테라리움이 전력을 원하는 것처럼 그들 역시 앞 번호 테라리움의 위명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테라리움 안에 민간 업체나 다름없는 길드가 버젓이 명패를 내세우고 주 활동지라 선언하기 위해선, 테라리움 측의 허가와 보장이 전적으로 필요했다.
특정 길드의 스톤헨지를 허가한다는 것은 그 길드의 위명뿐만 아니라 악명까지도 보듬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길드가 사고라도 친다면 사람들은 사고를 친 길드뿐만 아니라 그 길드가 주둔한 테라리움까지 싸잡아서 비판했다.
이는 테라리움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데에도 큰 몫을 했다.
그렇기에 테라리움은 신중하게 길드를 선별해 주둔을 허락해 주었다.
특히 앞 번호로 갈수록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길드 입장에선 상대적으로 앞 번호 테라리움에 스톤헨지를 두는 것만으로도 검증된 길드라는 위명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외곽 지역의 2층짜리 낮은 건물 안, 본인들은 대형만큼은 아니라도 중형 길드는 된다고 자부심에 찬 이들의 스톤헨지가 위치하고 있었다.
오로지 본인의 수완이 좋아 앞 번호 테라리움에 주둔할 수 있었다고 자신하는 길드의 마스터인 ‘피게트’는 현재 길드원의 보고를 받으며 더없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아직도 못 찾았답니까?”
“특정 드라이어드를 데리고 있는 드루이드를 찾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하물며 유니크 등급의 엘더 플라워라서…. 열심히 수소문해 보고는 있습니다.”
“제가 그 정보 얻자고 보좌관에게 먹인 술이 얼마인지는 아십니까? 그 다이아면 지금 활동 중인 길드원들 전원 한 달 치 수수료를 면제시켜 줄 수 있는 액수예요.”
달리 말하자면 길드원들이 피땀 흘려 번 한 달 치 수수료가 전부 접대비로 쓰였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길드 마스터와 마주한 이는 일부러 그 사실을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해안 테라리움 연합이니 뭐니로 행정 관리원들이 입을 꼭꼭 싸매고 있어서 얼마나 애를 먹였는지 아세요? 그나마 그 밑의 보좌관이 조금이라도 융통성 있는 양반이라서 다행이지. 이러다 다른 길드가 먼저 채 가기라도 한다면 우린 닭 쫓던 개 되는 거예요. 알아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임무를 맡지 않은 길드원들은 죄다 그 드루이드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투입해 놓은 상태입니다.”
“정보가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조심하고요.”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습니다.”
길드 마스터인 피게트는 몇 주 전 술자리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날은 테라리움에 줄을 대기 위해 어렵사리 행정 관리원의 보좌관과 몇몇 과수원 직원들을 초대해 과하게 대접한 날이었다.
금빛 액체가 흐르는 샴페인 잔이 타워를 이루고, 한 병이 드라이어드 열매 여러 개 값과 맞먹는 고급 양주의 뚜껑이 몇 개나 날아갔다.
그는 훅 줄어들 길드의 금고가 걱정됐지만 술자리에 만족한 보좌관이 길드에 물어다 줄 테라리움 1급 의뢰를 생각하면 충분히 수지타산이 맞는 투자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밤이 깊어져도 술자리는 계속되었고 술이 얼큰하게 취한 보좌관이 뜬금없는 화제를 입에 담기 시작했다.
“글쎄 얼마 전에 바다에 크게 해일이 닥쳐왔던 거 기억하지? 하마터면 해안 테라리움이 전부 쓸려 갈 뻔하지 않았는가? 물론 11번째는 거리가 좀 되니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었겠지만 20번대까진 큰일 났을 거야? 어휴.”
“네네, 물론 기억합니다. 테라리움에 주둔 중인 모든 길드가 주민 대피에 투입됐었죠.”
“그리고 하늘에서 큰 비가 내리며 기적처럼 집채만 한 파도를 막았지. 다시 볼 수 없는 엄청난 광경이었어.”
“그야말로 세계수의 크나큰 은혜였죠. 세계수의 축복이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웃으며 술을 마실 수도 없었을 겁니다.”
“사실 말일세. 그건 세계수가 보인 기적 같은 것이 아니었네. 듣기론 그게 전부 드루이드 한 명의 능력이라고 하지 뭔가?”
“네? 하하, 많이 취하셨나 봅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보좌관은 술이 꽤 세 보였지만 사실 취기가 뒤늦게 오르는 타입이었다.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자 바람을 잘 만나 들판에 삽시간에 번지는 불처럼 빠르게 통제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피게트는 그때만 해도 그 이야기가 보좌관이 부릴 어떠한 주사의 전초 단계쯤이라고 여겼다.
“내가 드루이드는 아니라 그네들의 능력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말일세. 분명 한 명의 드루이드가 드라이어드와 벌인 그래프트라고 봤단 말이지. 그게 가능하긴 한 건가 몰라. 아, 글쎄 내가 분명 행정 관리원의 개인 문서에서 제대로 봤다니까? 그런데 이게 사실이라면 그 드루이드는 정말 대단한 드루이드가 아닌가? 신이라고 해도 믿겠어.”
“정말 그게… 그래프트였단 말입니까?”
“허 참, 내가 그런 거짓말을 해서 얻을 게 뭐 있다고!”
“많이 취하셨습니다.”
보좌관이 호통을 치자 안절부절못하며 보고 있던 직원 몇이 급하게 말렸다.
사실 그들 역시 상당히 취기가 올라 알딸딸한 상태였지만, 보좌관이 행정 관리원의 개인 문서 내용을 외부인에게 발설하기 시작하자 그 취기가 훅 가시는 느낌을 받았다.
이건 아주 크나큰 중죄였다.
발설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까지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냥 웃어넘겼다면 이를 허풍이라 치부했겠으나, 직원들의 반응에 뒤늦게 아차 하는 표정을 짓는 보좌관 때문에 피게트는 어떠한 확신을 받았다.
‘정말 그게 드루이드가 벌인 그래프트였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진짜 엄청난 드루이드가 있다는 건데. 감히 세계수의 축복을 떠올릴 만큼 대단한 그래프트를 쓴 드루이드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피게트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자연재해에 맞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이와 관련된 사항이 비밀스럽게 행정 관리원의 개인 문서를 통해서만 관리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진한 다이아 냄새를 맡았다.
“하하, 이분이 어떤 분이신데 그런 실수를 하시겠습니까? 제겐 그저 이 자리에 흥을 돋우기 위한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농담 따윈 금방 잊겠지요. 그건 그렇고 밤이 늦었는데 피곤하신 분들은 이만 쉬러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보좌관님께선 아직 생생해 보이셔서 준비한 술을 더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무려 제가 어렵사리 3번째 테라리움에서 공수해 온 양주가 있는데…. 이게 사설 투기장 VIP 손님들에게만 제공된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 있었던 보좌관의 말실수는 농담으로 넘어가고 못 들은 셈 칠 테니, 혹시라도 후환이 두려운 사람은 지금이라도 빠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보좌관에겐 아직 더 듣고 싶은 정보가 있었다.
피게트의 말의 요지를 파악한 직원들이 허둥지둥 짐을 챙기고 자리를 떴다.
보좌관은 행정 관리원의 개인 문서 내용을 발설한 사실 때문에 술기운이 날아가 자리를 뜰 정신이 잠깐이나마 생겼지만, 3번째 테라리움에서 공수해 왔다는 양주 때문에 망설임이 피어올랐다.
만약 이 이상 입을 연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으나 애주가인 그에겐 너무나도 크나큰 유혹이었다.
보좌관이 말한 행정 관리원의 개인 문서는 해안 테라리움 연합 차원으로 관리되는 아주 비밀스러운 문서였다.
즉 이를 발설하면 그가 일하는 11번째 테라리움뿐만 아니라 연합으로 엮인 테라리움들이 줄줄이 소송을 걸어도 모자랄 판이었다.
‘술은 마시되 입만 잘 다물면….’
하지만 한 병이 두 병이 되고 결국 피게트가 더 고위급 사람들에게 뇌물로 쓰기 위해 금고에 감춰둔 술을 모두 털어 오자 보좌관은 술술 모든 것을 불었다.
‘엘더 플라워를 부리는 여자 드루이드라…. 끝까지 이름은 모르는 눈치였고.’
술자리가 끝난 후부터 피게트는 줄곧 엄청난 그래프트의 주인을 찾기 위해 길드원들을 닦달했다.
‘우리 길드에 영입할 수만 있다면… 이런 초라한 외곽 지역의 건물에서 벗어나 중심부로 입성할 수 있는 대형 길드가 될 게 분명해. 아니 혹시 모르지. 11번째는커녕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스카우트를 할지도? 아니면 하다못해 그 드루이드와 연줄이라도 만들어 놓는다면…. 그 드루이드를 찾기만 한다면 보좌관에게 먹였던 술값 따위 전혀 아깝지 않을 가치일 텐데!’
피게트는 머릿속을 달콤하게 잠식해 오는 미래에 대한 상상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드루이드를 찾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성과가 없었다.
엘더 플라워를 데리고 있다는 드루이드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31번째 테라리움이라 그곳을 집중적으로 공략했으나 하마터면 길드가 31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에게 제대로 찍힐 뻔하기도 했다.
테라리움과 척을 지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기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뛰어든 타이밍이 너무 늦었나? 어쩌면 이미 다른 대형 길드들이 벌써 눈치채고 나섰을지도 모를 일인데. 해안 테라리움 연합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 하더라도 대형 길드의 입김이라면 넌지시 언질을 줬을 수도 있고….’
어쩌면 애초에 너무나 복불복이 심한 패를 쥐기 위해 아등바등한 것은 아닌지, 피게트에게 미약한 후회가 밀려올 무렵이었다.
똑똑.
누군가 마스터 룸의 문을 두드렸다.
“마스터,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떠나지도 못한 채 길드 마스터 앞에 서서 그의 짜증을 온몸에 받으며 불안에 떨던 이가 반색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손님이 왔으니 전 이만 정보 수색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그러곤 황급히 자리를 떠나 버렸다.
“손님? 오늘 약속된 일정은 없는데.”
떠난 이의 자리를 길드원과 피게트가 처음 보는 낯선 인물이 메꾸었다.
낯선 이는 회색 머리에 안색이 암울하고 눈에 미약하게나마 살기가 돌아 피게트는 그가 썩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누구지?”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더쉬맨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