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8화 (318/604)

하지만 로웰라는 그 후로 뭔가 깊이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 대답이 썩 만족스럽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꼭 원하는 대답이 있는 것처럼?

“그럼 다른 건? 얼굴 말고 다른 건?”

난 마치 탐정이라도 된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로웰라의 심중을 파악하기 위해 그녀를 살피다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음, 키? 키도 나보다 컸으면 좋겠고. 아, 난 마른 타입보단 약간 덩치가 있는 게 좋아. 어깨도 넓고.”

어차피 이상형 아닌가? 반드시 그런 남자와 사귈 거란 보장도 없는데 내가 가진 환상이 얼마나 아득한 것이든 말하는 것쯤은 큰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내 답을 들은 로웰라의 얼굴이 갑자기 화색이 되었다.

뭔가 있군. 있어!

“그, 그래?”

“나도 몰랐는데 메스키트 같은 체격도 꽤 취향인 것 같아.”

“메… 메스키트? 아, 메스키트….”

갑자기 로웰라가 간신히 귀를 기울여야 들릴 만한 크기로 ‘젠장’이라고 외쳤다.

수상하다… 아주 수상해.

“다… 다른 건?”

“…다른 거라….”

아, 이런 기시감, 어딘가 익숙했다.

그래, 과에서 친하게 지냈던 동기가 내게 소개팅을 주선해 주려고 했을 때 저랬었다!

그렇다면 로웰라도 누군가를 내게 소개해 주려는 건가?

음… 그러고 보니 그때의 상황도 약간 지금과 유사했던 것 같다.

나를 포함한 과 동기 여자애들이 단체로 여행을 갔던 사진을 SNS에 올렸던 것이 발단이라고 했지.

사진을 본 동기의 남사친이 날 콕 집어 소개를 부탁했다고 한다.

얻어먹은 게 많아 거절하기 힘들다고도 했었고… 자기가 보기에 썩 인물이 나쁘지 않아 내게 소개해 줘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래서 지금의 로웰라처럼 은근슬쩍 저런 대화를 이어 갔던 것 같다.

물론 그때도 지금처럼 노 빠꾸 직진의 말대답에 결국 동기가 소개해 주는 걸 포기하긴 했지만.

내가 한참 학교생활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였으니 동기는 이참에 연애로 의지할 곳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거란 이야기를 덧붙였었다.

그리고 난 지금 연이어 죽을 고비를 넘긴 탓에 로웰라가 보기엔 스트레스가 심해 보일 법도 하지.

하지만… 로웰라는 줄곧 나와 함께 다녔고 최근에 오래 머물러 봤자 26번째 테라리움 안이 아니었나?

누구를 염두에 두고 그러는 걸까?

“음… 다정하면서 나와 같이 발맞추어 가는 사람도 좋지.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 또 달리 생각해 보면 내가 어느 정도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도 괜찮을 것 같아. 보호본능이라고나 할까? 사람이 너무 완벽하기만 하면 너무 현실성 없기도 하니까.”

이번엔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설명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도록 조금 두루뭉술하게 답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로웰라의 표정이 더욱 밝아졌다.

그러자 그 반응에 조금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나의 그 많은 조건 중에 고작 이거 하나 통과한 거야?

그래서일까? 로웰라를 놀려 보고 싶다는 장난기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음, 데이지가 참 그 역할을 잘해 주고 있긴 하지. 바곳도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긴 한데… 이건 좀 모성애에 가까운 느낌이려나?”

“정말! 어떻게 다 밀릴 수가 있어!”

로웰라가 새초롬한 말투로 불평하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이건 나를 향한 불만보단 그녀가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에 대한 불만으로 보였다.

“언니 주변은 완전 성벽이나 다름없네. 물론 드라이어드들에게 연애 감정을 느낄 리는 없겠지만, 다들 언니 이상형의 완벽한 모델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으니 누가 와도 도저히 눈에 안 찰 것 같아.”

그 말에 얼마 전 내게 고백했다가 차인 미미르가 떠올라 뜨끔했다.

아니… 그 앤 너무 어렸잖아.

“얼굴도 엘더 플라워에게 밀려, 듬직함도 벨벳 메스키트에게 밀리겠지. 아니 얼굴은 그렇다 쳐도 메스키트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할까? 더구나 레드 데이지는 언니랑 가장 가까운 드라이어드라 그 유대감을 이길 수 있는 건 가족밖에 없을 것 같은데. 외모, 체격, 성격 다 밀렸어.”

뭐가 널 그렇게 화나게 만든 거니?

“그렇다고 남은 대답을 유도해 봤자 실력이나 재산, 뭐 그런 것뿐인데. 다이아로 언니를 이길 수 있는 사람도 없잖아?”

그렇지. 나보다 다이아 많은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

음, 적어도 다 떠나서 다이아로 날 유혹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다.

잠깐… 정말 이 기시감, 단순히 동기와의 소개팅 대화에서만 겪었던 일이 확실한가?

비록 로웰라는 나오지 않았지만 뭔가 비슷한 내용의 꿈을 꿨던 것 같기도 한데….

그 꿈에서 누군가가 줄기차게 매도당했었지 않았나?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여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단단히 심통이 난 로웰라가 한껏 역정을 부리다 답답한지 주먹으로 가슴팍을 콩콩 두드리더니 이내 팔짱을 꼈다.

“그래서 누구니? 누굴 소개해 주려고 그러는 거야?”

“소… 소개라니. 그런 거 아니야.”

“뭔데, 말해 봐. 누구야? 혹시 그 사람에게 약점이라도 잡혔어?”

“정말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게….”

로웰라는 양 볼에 미미한 홍조를 띠고 시선을 흐렸다.

“언니, 시들링 말이야.”

얘는 나나 이리스에겐 곧잘 언니라고 잘 부르면서 다른 이들에겐 얄짤없이 이름만 불렀다.

응? 그런데 시들링이 여기서 왜 나와?

설마… 너!

“로웰라….”

“그 사람 언니 좋아하는 거 같아.”

“응?”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정확해. 내 눈은 정확해. 확실해! 그 사람 언니 좋아하고 있어!”

갑작스러운 급발진에 당혹스러워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난데없이 왜 그러는 거야….”

“정말 지독해…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뭔데? 언니가 약점 잡고 휘두를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하물며 그 사람이 약점 좀 잡혔다고 그렇게까지 행동할 사람으로 보이지도 않아.”

너 걔가 18번째 테라리움에서 파필리온에게 얼마나 호구 잡혔는지 모르는구나.

“나 앓아누워 있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누가 보면 언니 드라이어드인줄 알겠더라니까. 한시도 언니 곁을 떠나지 않았어. 물론 나랑 다른 길드원들도 걱정돼서 자주 방문하긴 했어도 아예 병실을 숙소 삼아 지내진 않았거든? 아니, 뭐… 걱정이 많은 성격이면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로웰라의 입을 통해 들은 시들링의 행적에 난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내가 양팔의 고통으로 제정신이 아닐 때의 일이라고 했다.

사람이 고통에 겨우면 무언가를 쥐어뜯거나 상대적으로 상해를 가하기 용이한 제 손에 상처를 줘 고통을 분산시키려 드는데 애초에 난 팔을 다쳐서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택했던 몸부림이… 이불을 향해 발길질을 하거나 입술이나 입 안을 있는 힘껏 물어뜯은 것이었다.

뒤늦게 진정제 역할로 드라이어드들이 투입되었으나 치료 초반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한방에 그들의 능력으로 내가 진정되면 다행인데, 엘더와의 영혼의 연결로 인해 진정 능력을 실시간으로 치유시켜 버릴 뿐만 아니라 예상외로 실새삼과의 영혼 연결로 인해 내 몸의 저항력이 높아져 버렸던 것이다.

난 여태 유능한 힐러로 인해 내가 약발이 안 받는 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실새삼은 기생식물인 제 모체답게 제 주인 되는 드루이드인 나를 오래 붙을 숙주처럼 취급하는 특이한 드라이어드였고, 내 몸에 해가 될 것들을 방지하기 위해 제 능력을 써 저항력을 높이고 있었던 것이다.

해로운 것들을 자신이 대신 흡수해 버리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건 내 드라이어드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는데, 엘더가 끝내 메스키트에게 부탁해 자신을 리타이어시키라고 빌 정도로 파국으로 치닫던 와중 실새삼이 저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다는 것을 실토해서 밝혀졌다고 한다.

어쨌든 의료용 드라이어드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처럼 적정 수준의 능력만을 내게 사용했고, 이에 대한 내 드라이어드들의 반발 작용으로 인해 결국 그들의 치료가 내게 그나마 남아 있던 이성까지 날려 버리고 사리 분별을 못 하게 만들고 말았다.

난 내가 부모님을 찾으며 울부짖었던 것은 기억에 있지만 로웰라가 말했던 순간은 기억에 없었다.

입술과 입 안을 물어뜯으며 발작할 때 의료진은 물론 내 드라이어드들까지 쉽사리 말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끼어든 것이 시들링이었다고 한다.

의료진은 어쩔 수 없이 날 대할 때 하나하나 내 드라이어드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내 드라이어드들은 그런 모습의 나를 처음 봐서 당황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 지식도 없고 힘도 인간의 범주를 훨씬 웃도니 쉽사리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들링은 아예 꽉 다문 내 입을 열고… 망설임 없이 제 손가락을 집어넣어 재갈을 대신했다고 한다.

제정신이 아닌 인간의 치악력은 상상을 초월해 자칫 잘못하다간 시들링의 손에 큰 부상을 남길 수도 있었다.

“여기 이렇게 자국 났을 걸. 피도 줄줄 흐르고. 그런데 차라리 입을 상하게 하지 말고 제 손을 물라고 하더라고.”

로웰라는 왼손을 들더니 오른손가락으로 엄지와 검지 사이의 시들링이 상처를 입은 지점을 동그랗게 그렸다.

딱… 내 입 크기만 했다.

“내가… 걔를 물었다고?”

“응. 그런데도 비명은커녕 신음 한 번 안 내더라? 엄청 아팠을 텐데…. 우린 멀찍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아무 말도 못 했어. 그날 정말… 난장판이었지.”

뒤늦게 의료용 드라이어드들이 능력의 강도를 올린 덕에 약발이 받기 시작한 내가 잠잠해지자 겨우 사태가 마무리되었다고 했다.

“상황이 급박해서 다들 우왕좌왕하긴 했어. 언니 팔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채 이틀이 흘렀으니까….”

난 로웰라의 말을 들으며 혀로 입 안을 쓸었다.

확실히 입 안에 뜯긴 살이 길고 볼록하게 올라오는 지점들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 입술을 만지니 건조해서 갈라졌다곤 하더라도 지나치게 딱딱한 딱지들이 많이 만져지기도 했고.

“내가 그 상황에 언니 곁에 있었다고 가정해 봤는데 나라면 도저히 그렇게까진 못했을 거야. 그래서 그 이전까진 긴가민가했는데 그때 확신할 수 있었어. 그게 진짜 사랑이 아니면 뭔데?”

로웰라의 말에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했니, 시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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