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9화 (329/604)

호기롭게 자금줄을 끊어 버리겠노라 마음먹고 왔으나 이미 시작부터 꺾였다.

이 정도 스케일은… 내 드라이어드들을 날뛰게 해도 무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아, 잠시만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처음 오신 분이신가요?”

팸플릿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누군가 날 붙잡았다.

“네? 저요?”

“네, 맞습니다. 으음, 배포용 초대장으로 오신 손님이신가 보네요.”

나와 또래, 혹은 좀 더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건포도색 곱슬머리는 앞머리가 꼭 쥐가 파먹은 것처럼 삐뚤삐뚤했다.

양 볼에 촘촘히 박힌 주근깨와 위로 솟아오른 눈썹이 그를 꼭 개구쟁이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앞서 봤던 직원처럼 꽃을 엮은 화관을 쓰고 곡물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사원증 같은 것을 목에 걸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그야… 일행이 없으시니까요?”

하긴, 이곳엔 유독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하다못해 둘 이상은 함께 다니고 있었다.

홀로 이곳에 당도한 내가 이상하게 보일 만했다.

“죄송하지만 배포용 초대장으로 갈 수 있는 구역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안내가 필요해 보이시는데… 가이드 서비스를 받으시는 건 어떠세요?”

“가이드라면…?”

그가 목에 걸고 있는 패를 눈여겨보니 마침 [가이드A-5 샐스트]라고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아하, 자기가 가이드라는 거구나.

내 시선을 확인한 그가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두툼한 눈 밑 지방이 끌려 올라가 여우 눈처럼 휘어 순식간에 진녹색 홍채를 가려 버렸다.

친절해 보이는 인상이긴 하지만…. 저 사람도 인페르노 관계자겠지?

적과 같이 다니는 것은 그다지 끌리지 않는데.

갑자기 나를 불로 공격할지도 모르잖아.

그는 주저하는 내 대답에서 거절 의사를 읽었는지 당혹스러워했다.

내가 거절할 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치였다.

“어어, 저는 가이드 서비스를 받는 걸 추천드립니다. 실수로라도 허가된 구역 외로 가신다면 불이익이 아주 크다고요?”

내 손에 지도도 있겠다. 난 심각한 길치도 아닌 편이고 겁도 많으니 무턱대고 규정 외 구역까지 가진 않을 것 같 같은데.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자 눈썹이 점점 아래로 축 처지기 시작했다.

“팸플릿이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에요! 한정된 시간에 최대 이익을 누리셔야죠! 멋모르고 돌아다니시다간 이 아름다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절반도 못 겪고 가실 거예요!”

흡사 시장 호객 행위나 다름없었다.

저렇게까지 하니 가이드 없이 돌아다니는 게 손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으음… 혼자 다니는 게 더 눈에 띄기도 하고…. 어쩔 수 없으려나.

“좋아요. 가이드 서비스 이용할게요.”

내 말에 그가 환하게 웃으며 목걸이를 반대로 걸었다.

이름표가 뒤로 돌아가며 [안내 중-샐스트]라고 바뀌었다.

“이름이 샐스트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는 다시 개구쟁이 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지? 설마 손을 잡자는 건 아닐 테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재촉하듯 손을 짤랑거리고 입을 열었다.

“서비스 이용료는 선불입니다, 고객님. 시간당 10다이아라는 저렴한 가격에 모시겠습니다. 물론 서비스 퀄리티에 따라 추가로 자유로이 팁을 주셔도 됩니다.”

어쩐지 기를 쓰고 어필하더라.

결국 다이아 벌자고 그랬던 거구나?

시간당 10다이아라…. 내가 아무리 이곳의 경제 관념이 약하다 하더라도 상당한 금액이 아닌가 싶었다.

정말 날고 기는 부자들만 오는 곳이군.

손에 잡히는 대로 다이아를 쥐여 주니 10다이아는 족히 넘는 양이 그의 손 위로 쏟아졌다.

덕분에 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인페르노의 자금줄을 끊어 버리러 왔다가 되려 걔네 지갑을 채워 주고 있다니….

처음으로 다이아가 아까워지는 기분이다.

“자, 그럼 최고의 휴양지로 떠나 볼까요?”

샐스트가 안내를 위해 앞장서자마자 재빠르게 그가 대기하던 장소에 또 다른 가이드가 서서 자리를 채우는 것이 보였다.

“그럼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대해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초입이라 그런지 아직까진 보통의 유원지와 다른 점을 못 찾겠다.

온갖 희귀한 꽃과 드라이어드들이 있고 드라이어드들이 벌이는 다양한 쇼가 있다고 했던가.

꼭 드라이어드들을 대상으로 한 동물원처럼 느껴져서 설명을 듣고 불쾌감이 일었지.

물론 칼롱 역시 자세히 알고 있는 눈치는 아니었기에 어쩌면 과장된 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44번째 테라리움에서 봤듯, 돈 많은 괴짜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벌였다.

“인간의 힘으로 일군 아름다운 낙원이죠.”

샐스트는 자랑스러운 말투로 ‘인간의 힘’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말 그대로 완전한 이상(理想)입니다.”

“너무 추상적인데요?”

“하하, 이 이상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만든 완전한 이상….

이미 그들이 만들려고 했던 이상을 직접 겪어 봤기에, 단순히 치장하기 위한 허황된 말로 들리지 않았다.

인페르노는 16번째 테라리움에서 인공으로 제2의 세계수를 만들려고 했었던 놈들이다.

그러니 이곳엔 16번째 테라리움에서 겪었던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비밀이 숨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초대장과 다른 방문객의 차이점이 뭔가요?”

일순 그가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버벅거렸다.

“으음,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 회원제로 운영되는 건 알고 계시죠?”

말끝이 기괴하게 휘었다.

떠보는 말투였다.

“네, 암암리에 회원제로 운영되는 건 알고 있어요. 저도 회원이 되고 싶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초대장으로 왔으니까요.”

“네… 뭐, 그렇다면야. 아무나 회원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자격이 필요하죠. 그리고 막대한 양의 후원도요. 어쩔 수 없이 초대장으로 오셨다고 하지만 그게 맞는 수순입니다. 배포용 초대장은 회원을 모집하기 위한 첫 단계이니까요. 아마 이곳에서 자격을 증명 받으시면 회원이 될 수 있으실 겁니다.”

설명은 그게 전부였다.

초대장이 회원이 되기 위한 첫 단계라….

그렇다면 나름대로 부자였던 타토르는 왜 회원이 되지 않은 걸까?

과시하기 좋아하는 그라면… 충분히 욕심낼 만했을 것 같은데 그는 뭘 놓친 걸까?

파라다이스엔 활기가 가득했다.

또한 자본의 기운도 가득했다.

이동 경로엔 밀가루색 나무판자가 촘촘히 깔려 길을 이루고 있었고, 일정 간격으로 무릎 높이의 스탠드 조명이 설치되어 있었다.

경로 밖엔 푸른 잔디가 깔려 있었고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는 곳엔 잠시 쉴 수 있도록 벤치와 야외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었다.

풍선과 깃발이 장식된 각각의 가로등엔 생화가 심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화분이 양옆으로 두 개씩 매달려 있었고, 구경하는 관람객들이 지루하지 않게 눈요기가 되는 조각상, 시원한 물을 뿜어내는 한 품 너비의 분수대, 다람쥐와 새들을 위한 귀여운 집 모양 먹이통, 키 높이의 미니 폭포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세월감이나 더러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저걸 다 일일이 관리하는 인원도 배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자본이 투자된 만큼 더없이 아름답긴 해도…. 이 정도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니까 특별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어딜 가고 있는 건가요?”

그는 내 물음에 내 왼손을 힐끔 바라보았다.

왜 아티팩트를 확인한 거지?

“아, 드루이드셨군요. 이런 곳에 보통 드루이드는 오지 않으니까 제가 깜박했습니다. 이곳에서 풀꽃 타입의 드라이어드는 물론 묘목이라 할지라도, 그 드루이드님께서 데리고 있는 그 어떤 드라이어드도 필드에 내보내선 안 됩니다.”

“드라이어드를 소환해선 안 된다고요?”

“뭐, 사람이 워낙 많잖아요? 난동을 부렸다가 귀하신 몸들 다치기라도 하면 곤란해집니다.”

샐스트는 흡사 드라이어드를 짐승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난동이라뇨? 드라이어드들이 어째서….”

“드라이어드들이 제 주인한테나 각별하지, 어찌 모두에게 공평하게 이성적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소환하지 않도록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안엔 아티팩트의 기운을 감지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만약 드라이어드를 필드로 내보내신다면 금방 감지되니 주의하십시오.”

눈을 가늘게 뜬 채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품에 작은 드라이어드라도 숨기고 오신 건 아니겠죠? 아티팩트뿐만 아니라 인가되지 않은 외부 드라이어드 역시 감지되니 유의 바랍니다.”

아무리 실새삼이 아기 모드여도 얇은 로브 한 장으로 숨길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그는 내게 경고를 하고 있었다. 무엇을 경계하는지는 몰라도.

들으면 들을수록 파라다이스는 너무나 수상한 곳이었다.

“본래라면 다른 구역부터 돌 텐데, 영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신비로움을 느끼지 못하시는 듯하여 곧바로 스페셜 코스부터 안내드리겠습니다! 자, 저희 첫 번째 코스는 희망의 정원입니다.”

구역의 경계에 돌입했는지 주변의 테마가 바뀌었다.

어쩐지 피부에 닿는 온도도 솜옷을 한 겹 더 껴입은 것처럼 상당히 높아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숨을 옥죄는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발끝부터 잠식해 오는 기분이었다.

그건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어두운 감정이었다. 꼭 비명을 지르고 싶은 그런….

단순히 높아진 온도에 느껴지는 매스꺼움과는 결이 달랐다.

판자 길이 끝나고 알록달록 반들거리는 조약돌이 깔린 길이 시작됐다.

터널 같은 긴 건물이 나타났는데 앞뒤로 뻥 뚫린 2면 건물이었고, 벽에 촘촘히 박힌 벽돌은 눈처럼 새하얬다.

“희망의 정원이요? 여긴 어딜 봐도 정원이….”

좀 더 걷자 거대한 유리 벽이 전시관처럼 세워진 곳이 보였다.

그리고 유리 안의 광경을 확인하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광경입니다.”

샐스트의 자랑스러운 목소리가 팡파르처럼 터졌다.

유리 안엔… 드라이어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조각도 인형도 아닌 살아 움직이는 드라이어드들이.

그들은 마치 동물원의 우리 안 동물들처럼 구역에 갇혀 유리 밖 관람객들에게 구경거리로 전락당한 상태였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고 너무 당혹스러웠다.

드루이드를 이런 곳으로 안내한다는 것이 기괴했다.

내가 반발할 거라 예상하지 않은 건가?

아니면… 애초에 이런 곳에 오는 드루이드는… 이런 장면을 보고도 반발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단 말인가?

눈 씻고 다시 봐도 내가 바라보는 광경이 환상이 아니라는 점에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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