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화가 되어 있지 않으니 제대로 된 포레스트를 이룰 줄 몰라 본래의 드라이어드들의 방식대로 왕을 가려내진 못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강자가 지배하는 방식이라면 다른 위험 드라이어드들이 찍 소리도 내지 못하게 내리누를 수 있는 굉장한 드라이어드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왕좌를 차지한 드라이어드는 대체 어떤 드라이어드일까?
독을 뿜고 가시를 세우는 사나운 드라이어드들을 압도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라면, 가히 상상하기 힘들 만큼 난폭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당장 우리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예감이 좋지 않아요!”
별안간 메스키트가 내 허리를 강하게 낚아채 훌쩍 물러서는 바람에 잡념이 깨졌다.
“으악!”
하지만 내 드라이어드들이 자신들의 드루이드를 지킬지언정 외부인인 직원까지 챙겨 주진 않았다.
“사… 살려 주세요!”
함정이었다.
어느새 눈앞의 잔디밭이 움푹 무너지고 그 자리에 고약한 악취를 풍기는 액체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깔깔거리는 괴기한 웃음소리와 함께 관상목들이 우거진 공간에서 숨어 있던 드라이어드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질척거리는 정체불명의 늪에서 촉수 같은 식물의 줄기가 튀어나와 직원의 팔다리를 옭아맸다.
그리고 그를 늪 바닥으로 아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삽시간에 늪을 둘러싼 드라이어드들이 늪을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직원의 손과 머리를 저마다의 무기로 괴롭혔다.
황급히 메스키트와 데이지가 투입되어 그를 구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쯧, 이렇게 귀찮게 굴어서야. 하마터면 내 드루이드가 큰일 날 뻔하지 않았느냐.”
실새삼은 실제로 큰일을 당한 직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위험 드라이어드들을 꾸짖었다.
대체 위험 식물 전시장의 규모가 얼마나 크길래 끝도 없이 저런 드라이어드들이 튀어나오는 걸까?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인페르노의 수장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지상 위의 태양을 만들어 낼 정도로 베스탈리스들 중에서도 아주 강한 불의 힘을 가진 남자였다.
그 정도 되는 사람이 이곳에 존재했다면 드라이어드들이 이렇게까지 활개 치고 다니진 못했을 것이다.
“거기 빨간 꽃아. 그래, 너. 한 놈쯤은 세계수의 품으로 보내지 말고 적당히 힘을 빼 놓은 후 내게 데려오거라.”
실새삼이 가리키는 빨간 꽃은 데이지였다.
꼬꼬마 같은 모습을 하고선 이젠 훌쩍 자란 데이지를 손녀딸 대하듯 취급하는 것이 참 어이없었다.
기분 나쁠 법도 한데 데이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맑은 얼굴로 날 돌아보며 허락을 구했고,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인형 뽑기 하듯 드라이어드 하나를 쑥 뽑아 왔다.
데이지는 공격형이다 보니 손길에 자비가 없었는데, 끌려온 드라이어드는 반죽음 직전까지 내몰려 탈진 상태였다.
“이건 모체가 위험한 식물로는 보이지 않는데?”
여태 만났던 위험 드라이어드들은 무척 위험한 꽃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독사나 독버섯처럼 독을 품은 생물들이 제게 다가오는 자들에게 경고를 하듯 기괴할 정도로 치명적이고 화려한 외형을 띠곤 하는데, 위험 드라이어들도 꼭 그러했다.
하지만 데이지에게 끌려온 드라이어드는 상대적으로 수수한 편에 속했다.
탈출 후 난동을 부리는 드라이어드 중엔… 폐기를 기다리는 드라이어드도 있다고 했지.
혹시 이 드라이어드가 그런 드라이어드 부류인 걸까?
드라이어드들이 무리를 지어 함정을 파 놓고 준비했던 공격인 만큼 소강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엘더가 힐러로서 보조를 해 줘야 할 수준이었다.
그나마 예전에 야생 바곳과의 전투에서 확인했듯이, 생명력이 강한 데이지와 방어 특화 메스키트가 상태 이상이나 디버프 공격에 카운터를 칠 수 있었기에 큰 위기는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만약 이 무리에 바곳이나 벨라돈나 급의 드라이어드가 있었다면 상당히 애를 먹었겠다는 섬뜩함이 들었다.
물론 이젠 우리 팀엔 바곳이 있으니 그렇게까지 전멸 수준으로 밀리진 않았겠지만….
혹시… 앞으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가며 점점 난이도가 높은 드라이어드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니겠지…? 보통 게임 속 사냥터도 구역에 따라 몬스터 레벨이 나뉘긴 하지만….
“몸이 이 지경이라 이런 방식을 택해야 된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지만.”
실새삼이 쓰러진 드라이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실이 땅에서 뻗어 나와 드라이어드를 칭칭 감기 시작했다.
이전에 데이지2에게 썼던 것과 비슷해 보이는 능력이었다.
“그 능력…. 숙주 삼기라고 했던가?”
“좀 더 심화된 능력이지. 그때와 다르게 내가 좀 더 성장했으니.”
그렇게 말하다가 실새삼은 굉장히 상처받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어쩐지 그가 고집스럽게 나와 눈 마주치길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성장한 것은 좋은 일인데 왜 그렇게까지 우울해하는 거지?
“속을 좀 휘저어 보려고 한다.”
“으….”
“영혼 말이다! 대체 뭘 상상한 거야? 숙주와 한 몸이 되어 영혼에 새겨진 기억을 엿보는 거지. 겸사겸사 근본도 살피고. 운이 좋다면 저들이 왕으로 삼은 것의 정체를 알 수도 있겠지.”
저 근본 살피기 능력은 데이지2에게 사용했을 때 포레스트로 연결된 데이지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그 바람에 실새삼은 그녀에게 호되게 혼날 뻔하기도 했지만.
“그런 방식으로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따라 사용했던 거군요.”
메스키트는 은둔자의 정원에서 가릴 것 없이 드라이어드의 기술을 카피했던 실새삼을 떠올린 듯했다.
어찌나 사기적인 능력이었던지 메스키트의 버서커 모드까지 따라 했었지.
“음? 내가 너희들 앞에서 그런 능력을 선보였던 적이 있던가? 아무튼 꽤 근접하게 추론했다. 칭찬해 주마.”
하지만 실새삼은 어려지며 섬에서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너 진짜 메스키트에게 버릇없이 군다. 분명 언제 한번 두들겨 맞을 것 같아.”
엘더가 맞아 본 기억이 있는 것처럼 실새삼에게 빈정댔다.
실새삼이 손가락을 까닥이자 탈진 상태로 축 처져 있던 드라이어드가 삐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꼭 실에 매달려 움직이는 인형을 보는 듯했다.
드라이어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실새삼이 조종하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영혼이 병들었군. 온통 고독과 절망이 가득하니 이걸 어찌 햇빛 아래 사는 드라이어드라 볼 수 있겠어? 시들어 버렸군. 이래서야 써먹지도 못하겠어.”
“그래서 뭘 좀 알아냈어?”
실새삼이 찝찝하단 눈으로 손바닥을 탁탁 털자 연결된 실이 일제히 끊기며 드라이어드의 몸이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드라이어드들이 포레스트를 이룬다는 것은 같은 종족끼리 뿌리를 엮어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도 뽑혀 나가지 않도록 서로를 지키고 의지하는 동료가 된다는 뜻이지. 즉 영혼의 유대감을 달리 표현하는 단어가 포레스트다. 그리고 그곳에서 뽑힌 왕은 무리의 가장 우성종으로 아랫것들의 영혼을 위탁받아 포레스트를 지키는 역할을 갖지. 왕은 숲을 더욱 무성하게 만들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책임을 갖는다.”
그런 개념은 이미 레드 데이지 포레스트를 키우기 시작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유대감이 강한 포레스트에서 뽑힌 왕이기에 동족의 의지와 신뢰를 기반으로 하지. 그렇기 때문에 아랫것들의 근본을 보고자 하면 드라이어드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 위에 자리한 의지와 신뢰의 대상을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우성종이 아니고 약하기에 왕이 되지 못한 존재라도 그들을 지키는 왕이 있는 한, 나와 같은 이들이 능력 침투를 사용하려 한다면 방어 기제로 그 존재감을 확연하게 드러내게 되지. 그럼 왕의 윤곽이 드러난다.”
왕이 없는 일반 드라이어드는 실새삼 같은 드라이어드의 능력 침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나 그렇지 않은 경우 왕의 비호를 받는다.
데이지2가 조종당하자 단번에 달려온 데이지의 사례처럼.
“그런데 이것을 지키는 존재는 오롯이 공포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 윤곽 따위도 보이지 않지. 즉, 왕은 없다. 그들이 공포에 지배되어 왕이라 착각하는 것만 존재할 뿐.”
왕이라기보단 무리의 우두머리가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능력을 쓰고 나니 특이점을 발견했다.”
실새삼은 쓰러진 드라이어드의 주위를 짧은 다리를 놀려 종종걸음으로 빙 돌았다.
그러곤 집게손가락으로 허공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잡았다.
“아주 얄팍한 생명의 기운이 실처럼 이어져 있는데, 이 느낌은…. 마치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의 영혼의 연결을 흉내 낸 것과 같군. 한두 놈 더 살려 놨다면 확실히 알 텐데 죄다 세계수의 품으로 돌려보냈으니, 원.”
“뭐가 있어?”
실새삼은 이번엔 두 손으로 허공을 잡는 시늉을 했다.
꼭 가느다란 실을 잡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내 눈엔 보이지 않았다.
“저쪽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정체는 모르지만 어쨌든 알아 두거라.”
실새삼이 가리키는 방향은 산등성 위에 자리한 진줏빛 성이 있는 곳이었다.
마치 최종 보스가 기거하고 있을 것 같은 그런 외관.
“영혼의 연결을 흉내 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드라이어드들은 보통의 드라이어드들보다 수명이 긴 데다 드루이드와 함께하지 않더라도 무리 없이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밖을 나가지 못하는 제약이 있다.
그 모든 조건의 답을 어쩐지 실새삼이 가리킨 곳에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은 공략을 포기한다.
가끔은 도중에 발동한 서브 퀘스트를 포기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이봐요. 움직일 수 있겠어요?”
함정에 빠져서 잔뜩 괴롭힌당한 직원은 완전 녹초가 되어 있었다.
“잠시만요. 다리…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서….”
“그렇다고 부축해서 갈 순 없어요. 할 수 없이 여기 계속 계셔야….”
“움직일 수 있어요! 잠시만요, 제발 두고 가지 마세요!”
놓고 가겠다고 할까 봐 직원은 주변의 긴 나뭇가지를 지팡이 삼아 안간힘을 써서 일어났다.
그의 속도를 맞춰 걷자니 한없이 느려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