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변덕을 부리신 겁니까? 평소처럼… 치워 버리지 않으시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 같으나 태도엔 상대를 향한 정중함을 넘어 경외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몇 년만이었지. 애쉬가 내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이. 정이 없는 건 제 아비를 닮아서 내 안부는 일절 묻지도 않고 대뜸 검은 머리를 한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여인의 입가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지금은 장로직에 머물러 있으나 아들이 대를 잇기 전까진 교단의 수장을 맡아 수많은 이들을 이끌던 여인이었다.
현재 수장을 맡고 있는 아들이 펼치는 압도적인 힘으로 군림하는 공포 정치는, 사실 그가 모친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았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와해되기 직전이었던 베스탈리스 간의 집결은 이전까지 계속 시도는 있었으나 그 누구도 완벽히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끝내 여인은 성공해 냈다.
그녀는 핍박받는 베스탈리스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했다.
현재가 안 된다면 그 후대, 후대의 후대가 되어서라도 반드시 베스탈리스가 세상의 중심이 되는 그날을 만들겠다고.
그녀의 아들은 역대 베스탈리스들 중 가장 태양에 근접하단 평을 받고 있으나, 사실 여인은 전성기 때 이미 살아 숨 쉬는 태양이란 평을 받을 만큼 강력한 불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강함과 카리스마가 우왕좌왕하는 베스탈리스들의 구심점이 되어 준 것이다.
그런 과거를 가졌던 여인인 만큼, 옆에서 수행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혔다.
“애초에 크레아시온, 그 늙은이가 시작한 프로젝트가 참 마음에 안 들었어. 내 시대 때 끝냈어야 할 그걸 질질 끌고 있으니. 지금 보면 너무 구시대적인 발상이지만, 당시엔 새롭고 기발했지. 하지만 우리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제대로 된 성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으면 그건 내버려야 될 고물이란 뜻인데. 아들이 늙고 그 후대가 자랄 때까지 계속 연구만 진행할 거야? 시대는 계속 변할 테고 우린 더욱 힘들어지지 않겠나? 비용은 비용대로 들고. 그런 낭비만 없었다면 지금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 프로젝트가 두 개는 돌아가고 있었을 거야.”
“크레아시온 님 말씀이십니까….”
“여간 깐깐한 게 아닌 데다 교단에서 은근히 입김이 세니 치워 버릴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얼마 전, 여인에게 급보로 전달된 이야기는 아주 놀라운 것이었다.
교단의 세력하에 있는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이 완전히 괴멸되었을 뿐 아니라 상당수의 교단 관련인들이 1번째 테라리움에 구속됐다.
더구나 교단 내 연금술 쪽에서 가장 고위직인 크레아시온마저 잡혀 들어갔다고 했다.
정황만 놓고 보자면 여인이 소속된 교단, 인페르노 측에선 엄청난 대손실이었다.
금전적인 손실도 어마어마했지만 물밑에서만 활동하던 인페르노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더 큰일이었다.
아직 그들이 나설 때가 되지 않았다.
지금은 발톱을 숨긴 채 어둠 속에서 세력을 키우고 견고하게 만들어야 될 시기였다.
하지만 여인의 개인적인 입장에선 그렇게 큰 손실은 아니었다. 오히려 호재였다.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야. 크레아시온은 너무 힘을 키웠어. 다 늙은 게 욕심만 많아서. 더구나 그쪽 세력의 중심에 한 놈 더 있었지? 우리 아이와 나이가 비슷한 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녀는 짐짓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는 것처럼 말을 얼버무렸지만 사실 잘 알고 있었다.
연금탑이 괴멸한 데다 이젠 남에게 소유권이 통째로 넘어가 버린, 좋은 자본 줄이었던 16번째 테라리움.
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은 인정하기 싫지만 여인의 아들과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여인의 곁에서 수행하는 그 누구도 쉽사리 그 이름을 언급하지 못했다.
“불발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우리 아이의 좋은 라이벌이 되어 줬을 텐데.”
말은 그렇게 해도 여인의 마음은 달랐다.
그녀의 아들에겐 파필리온이란 이름을 가진 이복형제가 하나 있었으나 그 아들처럼 강력한 힘을 가지지도, 그렇다고 베스탈리스로 태어나 위대한 혈통을 이은 것도 아니었다.
만약 상황이 달랐다면 현재 인페르노의 교단은 크게 두 세력으로 나눠졌을 만큼 위협적인 존재가 됐을 것이다.
그렇게 주어진 위치에 만족하고 교단에 이바지하면서 살아가기만 하면 될 것을, 여인은 암암리에 틈틈이 그를 위시한 분탕질 시도가 발발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교단이 물밑에서만 활동한 시기가 너무 오래된 탓인지 썩은 물이라 착각한 음침한 거머리 같은 놈들이 몇 생겼지.’
그 분탕질을 파필리온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여인에겐 하등 상관없었다.
거시적으로 놓고 봐도 파필리온은 애쉬의 상대가 전혀 되지 않았지만 아주 괘씸하단 것이 문제였다. 자신이 수장으로 있을 시절엔 감히 상상도 못 했을 일들이.
“16번째 연금탑의 괴멸로 우리 아이의 명성에 흠을 입혀 보려는 놈들이 종종 있었지, 아마?”
하지만 그 일을 보기 좋게 파필리온이 뒤집어쓰며 이는 오히려 애쉬의 반대 세력의 기를 죽이고 그의 권력을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버렸다.
애쉬가 처벌을 명분 삼아 파필리온을 죽여 버렸다면 더욱 속이 시원할 텐데 이상하게도 그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또 숨어 지내며 거머리들이 활개 치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 분명해 영 탐탁지 않았다.
“눈엣가시를 치워 줬는데 나도 자비를 베풀어야지.”
돌고 돌아 수행원이 한 질문의 답이 도착했다.
당돌하게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코어나 다름없는 건물을 돌아다니고 있던 한 드루이드를 발견하자마자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 이유. 그건 그녀가 여인의 수고스러움을 덜어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알량한 자비였다. 그 드루이드는 당장 목숨을 건졌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결국은 단순히 삶을 조금 더 연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일은 예정대로 진행되겠지? 바깥 놈들이 냄새만 맡지 않았어도 좀 더 수습해 봤을 텐데 말이야.”
여인은 바로 직전,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위치를 특정한 알 수 없는 무리가 접근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
상당히 대규모의 인원이, 초대받지 않았음에도 몰려오고 있다는 보고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은 지도상에 없는 지역이었다. 절대 우연히라도 당도할 수 없는 곳이었다.
최악의 경우는 1번째 테라리움이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인데, 이제 막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탈출했을 관람객들이 신고나 구조 요청을 해서 데려왔다고 하기엔 또 시간이 맞지 않았다.
그렇다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잠입한 네이처 키퍼라는 이상한 단체의 지원군이거나 혹은 타이밍 좋게 외부에 고발되어 사냥개들이 몰려오고 있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이 다시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음지에 숨긴 채 운영할 수 없다는 걸 뜻했으므로 이젠 포기해야 될 때라는 것을 감지했다.
“네, 심어 둔 불씨들은 스위치만 누르면 일제히 점화될 예정입니다.”
“그래, 투자한 자본과 시간이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곳을 통째로 남의 손에 넘겨줄 순 없는 노릇이잖니?”
여인은 드루이드를 제외한 또 다른 건물의 침입자를 떠올렸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의 좋은 수입원이 되었던 불쏘시개 드라이어드. 좋은 타이밍에 와 준 덕에 스위치를 누르는 역할을 그 드라이어드가 대신하게 되어 수고를 덜었다고 여인은 생각했다.
“남은 생을 보내도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꽤나 마음에 들었던 곳인데 아쉽네. 자, 늦지 않게 서두르지.”
아쉽다는 말과 달리 여인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일행들과 함께 떠나 버렸다.
***
내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 어떤 것을 먼저 선택하느냐에 따라 어쩌면 미래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헬 드라이어드의 마지막 흔적이 끊긴 지점을 바라보았다.
헬 드라이어드를 따라가 애당초 진줏빛 성에서 노렸던 목적을 완수하는 것이 첫 번째였다.
‘이동하는 뿌리’가 찾아낸 알 수 없는 히든 퀘스트가 진줏빛 성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예전에 메스키트의 과거를 엿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귀중한 기회를 또다시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의문의 노인이 내게 던져 준 열쇠를 바라보았다. 이건 아마도 그 노인의 방 열쇠.
아직 폐기하지 않은 자료가 남아 있을 거라고?
그 노인이 인페르노의 수뇌부에 속해 있단 사실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노인의 방엔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은 물론 인페르노에 대한 중요한 비밀이 잠들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직까진 내게 버거운 적인 인페르노. 앞으로 사사건건 내 앞길을 방해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그 단체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오랜 시간에 걸쳐 야금야금 피해를 입혀야 했다.
더구나 그 인페르노를 무너뜨리기 위한 목적이 내가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방문한 최초의 목적이었기에, 그것만 놓고 보자면 이 두 번째 선택이 우선시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의문의 노인이 인페르노와 함께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뭔가 엄청나게 불길한 일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터질 것 같았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노인처럼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빠져나가는 것이 마지막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 경우, 위험에서 재빠르게 발을 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앞의 두 가지 선택을 모두 버려야만 했다.
마치 내 현재 상황이 스토리 게임의 엔딩 분기점처럼 느껴졌다.
내 선택에 따라 배드 엔딩이 될 수도, 그저 그런 노멀 엔딩이 날 수도, 최고의 트루 엔딩이 터질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렇게 각기 다른 결말이 예정된 한 가지 이상의 선택지가 날 괴롭히는 건 처음이었다.
머릿속이 바쁘게 울려 대는 시계의 초침 소리로 가득 채워진 느낌이었다.
조급한 마음이 더욱더 불안감을 야기하고 시야를 팽팽 돌게 만들었다.
입 안이 바짝 마르고 이마가 식은땀으로 서늘해졌다.
“어떤 장애물은 이겨 냈을 때 더 크게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한단다.”
“지금 이렇게 절 내버려 두시는 걸 후회하게 될 수도 있어요.”
난 주인공의 성장에 밑거름이 될 조연 따위가 아니었다. 내가 주인공이지.
그래, 이 게임 속의 한 명의 유저가 아니라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적어도 노멀 엔딩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겠어?
난 과감하게 노인을 따라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빠져나가겠다는 선택지를 버렸다.
어쩌면 이 두 선택지는 노멀 엔딩조차 아니고, 배드 엔딩만 덩그러니 두 개 남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을 빠져나가는 선택지만큼은 아니었다.
그건 시작한 퀘스트를 영원히 클리어할 수 없는 길이니까.
퀘스트가 있는 길엔 언제나 결국 정답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