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엘더가 한 나라의 왕이었다면, 그 나라는 진작 망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치에 환장하는 왕 때문에 반란이 일어나겠지.
어쨌든 난 엘더의 이런 점도 좋았다. 좋고 싫음이 명확해서 대하기 편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는 엘더의 모습을 보니, 당분간 마거리트와도 티격태격 하지 않고 잘 지낼 것만큼 기분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루비 반지에 이젠 루비 목걸이까지 얻은 엘더는 얼마나 강해졌을까?
“한참 뒤에 들어온 드라이어드는 순번이나 기다려. 물론 평생 걸리겠지만.”
거만한 엘더의 목소리가 실새삼에게 향했다.
일단 인성만 놓고 본다면 그 어떤 가디언에게도 절대 꿇리지 않겠다는 건 알겠다.
엘더 인성이 전투력에 비례한다면, 쟨 자생 필드의 가디언도 이겨 먹지 않을까?
***
꿈에서나 겨우 볼 수 있었던 얼굴을 눈앞에 두니 잊고 싶었던 과거가 떠오른다.
사고는 너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닥쳐왔다.
일대를 흔드는 폭발음에 난 귀가 멀었고, 둘째 언니는 분진 피해에 눈이 멀었다.
그리고…. 첫째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일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한 생활을 했지만 남들은 불행하다 여길지라도 우리 세 자매는 서로 의지하며 행복하게 지냈었다.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 주고 선생님이 되어 주며 모자란 구석을 채우니, 마음만큼은 항상 풍요로웠다.
우리 자매에겐 비록 테라리움 외곽 지역에 겨우 구한 허름한 건물이긴 해도 비와 추위를 피할 집이 있었고, 매일같이 일을 나가느라 얼굴도 보기 힘들었지만 부모님도 두 분 모두 잘 계셨다.
주위 사람 모두가 절망밖에 남지 않은 테라리움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열심히 살다 보면 훗날 생활이 더 나아질 거라 나와 언니들은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웃들은 사이좋은 우리 자매를 보며 으레 세 가지 작물에 비유하곤 했다.
키가 큰 첫째 언니는 옥수수, 기둥에 넝쿨 감듯 붙임성이 좋은 둘째 언니는 콩 그리고 셋 중 유난히 머리색이 주홍빛이 도는 난 호박이었다.
내가 별명이 호박이 뭐냐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징징거릴 때면, 호탕한 큰 언니는 웃으며 말했다.
“호박이 제일 양이 많잖아! 배부르게 잘 먹고 잘 살라는 의미겠지. 아, 설탕 잔뜩 넣은 호박죽 먹고 싶다.”
그러면 마음씨 좋은 둘째 언니는 날 달래는 투로 거들었다.
“그래, 호박이 제일 비싼 작물이래. 우리 중 막내가 제일 잘나가겠네.”
사실 호박이란 별명이 그렇게까지 싫은 건 아니었다.
우리에게 붙은 작물 별명엔 나름대로 좋은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의 침입 이후로 갈수록 태양 빛과 열기가 더 강렬해졌다. 그리고 세계수와 멀리 떨어져 축복의 영향이 약할 뿐만 아니라 수원마저 멀리 떨어져 있어 척박해진 땅은 농사를 짓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결국 지혜로운 농부들이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바로 옥수수, 콩, 호박, 이 세 가지 작물을 함께 심는 것이었다.
먼저 옥수수를 심은 후 그다음 콩을 심고 마지막에 호박을 심는다.
키가 큰 옥수수는 콩의 지지대가 되어 주니 따로 지지대를 만들 필요가 없고, 부가적으로 콩의 성장에 도움을 준다. 또한 옥수수의 넓은 잎이 마치 양산처럼 펼쳐져 다른 두 작물들을 강한 햇빛으로부터 보호해 준다.
콩은 작물 성장에 꼭 필요한 양분을 땅에 모아 도움을 주고, 땅 아래서 자라는 호박은 그렇지 않아도 메마른 땅에 그늘을 만들어 수분이 증발하는 걸 막아 줄 뿐만 아니라 근처 땅에 잡초가 자라는 걸 방지해 준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세 작물의 상호 작용 덕분에 각자 단일로 재배했을 때보다 질도 우수하고 수확량도 좋아서, 뒤 번대 테라리움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농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이웃들은 서로 도우며 잘 자라는 농법에 비유해 우리 자매들을 각각의 작물로 불렀던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세 작물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들끼리도 사이가 아주 좋다고 하던데….
언니들과 함께 공유하는 별명이 있으니 좋았고, 우리 자매의 우애를 칭찬하기 위해 붙은 것이니 더욱 좋았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내면 늘 그렇듯 다정하게 달래 주는 언니들의 모습이 좋아서 항상 본심과 다르게 툴툴댔다.
그런 사소한 투정 외엔 크게 얼굴 붉힐 일이 없을 정도로, 우린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나가서 놀고 싶다. 숙제가 끝이 없어.”
반항적인 마음을 강하게 반영한 것처럼 책을 덮는 소리가 상당히 컸다. 첫째 언니의 투정에 나와 둘째 언니가 그쪽을 돌아봤다.
“나랑 에이레네는 벌써 다했는걸. 언니가 게으름만 덜 피웠어도 진작 다 했을 거야.”
“이번 숙제는 꽤 재밌지 않아? 세상에 그렇게 많은 자생 필드가 있다니. 땅을 새하얗게 뒤덮은 스노우 필드란 곳은 얼마나 멋있을까?”
내 말에 첫째 언니는 입을 댓 발 내밀고 책상을 반쯤 차지한 넓은 지도 위로 엎드리며 툴툴거렸다.
“우리가 이 테라리움을 나가는 날이 올까? 이렇게까지 지형을 달달 외워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엄마는 아침부터 밤까지 주점에 나가 고된 주방 일을 해야 했지만, 잠을 설치면서까지 우리의 교육에 헌신적이었다.
공부는 밖에서 뛰어놀며 자연으로부터 배우며 된다는 방임주의의 아빠와는 상충됐지만, 한번도 두 분이 의견 차이로 싸운 적은 없었다.
듣기론 결혼 전, 엄마는 아득한 앞 번호 테라리움에서 태어나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기 힘든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고 했다.
우리가 배움을 시작한 나이보다 훨씬 어릴 때부터 과외를 받으며 자랄 정도로 그곳에 사는 이들은 이른 나이부터의 선행 학습이 당연시되었다. 모두가 잘 사는 테라리움에선 부로 기준을 나누기 어려우니 특정 아카데미 출신이나 연금학술지 논문 게재 등의 업적으로 명예 계급이 나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본인이 그렇게 자라 왔으니 우리의 교육에 열중하셨던 것이다. 많지 않은 일당을 식량보다 우리 세 자매의 도서 구매에 우선적으로 할애할 만큼.
엄마의 과거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 집엔 유달리 다른 가구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치품에 가까운 고급스러운 옷장이 하나 있었다.
옅은 분홍빛이 도는 밝은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옷장엔 손끝으로 따라 그려도 수를 채 헤아리기 힘들 만큼 복잡하고 정교한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문고리엔 무려 반짝이는 보석도 박혀 있었다.
축제 때가 아니면 열릴 일 없는 그 옷장 안엔 고급 천을 가득 쓴 색색의 옷들이 가득했다.
밑단을 레이스로 마감한 드레스들과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패턴이 수놓아진 옷들, 만지면 아주 부드러울 것 같지만 생활복으로 입다간 금방 닳아서 없어져 버릴 듯한 하늘거리는 천으로 만들어진 옷들까지.
옷장은 아빠가 엄마에게 준 결혼 선물이었고 안을 채운 옷들은 엄마가 집을 나오며 챙겨 온 유일한 재산이었다.
하지만 해마다 옷의 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옷장이 비워지는 만큼 우리의 책장은 채워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옷들은 평소에 제값을 받기 어려우나 모두가 들뜬 축제 때만큼은 꽤 비싸게 팔렸다.
엄마는 때에 맞춰 옷장에서 비상금처럼 하나씩 옷을 꺼내 팔았고 집에 돌아올 땐 팔 한가득 책을 안고 오셨다.
우린 축제 날만은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소리 내어 불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음식을 먹으면 당장 배는 불러도 내일이면 금방 꺼지지만, 책으로 얻은 지식으로 머릴 채우면 평생 갈 수 있다는 엄마의 가르침을 항상 새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부만이 그나마 우리가 이곳에서 벗어나 더 나은 테라리움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드루이드가 되고 싶었는데…. 드루이드가 되면 다이아를 많이 벌 수 있다더라.”
“그건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난 과수원에 취직하고 싶어. 여기보다 훨씬 더 앞 번호 테라리움의 과수원.”
“디케, 넌 꿈이 너무 진부해. 과수원 직원은 무척 바쁘지 않아? 거기다 평생 한 테라리움에서 살아야 하잖아. 난 여기저기 여행하면서 다이아도 벌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여행을 다니기엔 지켜 줄 드라이어드가 없으면 위험하잖아. 그렇다고 드루이드를 고용하면 다이아도 많이 들고…. 과수원은 테라리움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그냥 꿈이 그렇다는 거지. 에이레네, 넌 나중에 뭐가 되고 싶어?”
“난… 연주가가 되고 싶어. 엄마가 예전에 다룰 수 있는 악기가 다섯 개나 됐대. 다이아를 많이 벌면 엄마가 연주했다는 악기들을 하나씩 사서 다 연주해 보고 싶어. 특히 피아노를 실제로 보고 싶어. 우리 테라리움엔 피아노가 없잖아.”
밤마다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허밍으로 구현되었던 다양한 악기의 음색들.
어떤 악기는 엄마의 저음을 닮아 해를 덮는 어둠처럼 무겁게 울릴 것이며, 어떤 악기는 엄마의 고음을 닮아 새처럼 지저귀는 소리를 낼 테지.
엄마의 존재, 그 모든 것이 내 미래 희망의 근원이었다. 아니, 엄마가 품고 있는 과거가 우리 자매들이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세상엔 그런 삶도 존재하는구나. 알기 때문에 더욱 열망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이런 행복한 생활 속에… 전혀 예상도 못 했던 불행의 씨앗이 조금씩 싹을 틔우고 있었다.
마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피어나 눈치챘을 땐 이미 퍼져 버린 곰팡이처럼 우리의 미래를 좀 먹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궁핍한 테라리움에서 엄마가 가지고 있는 고급스러운 물건들은 너무 눈에 띄었고, 결국 논란을 피하지 못했다.
뒤 번대 테라리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물건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축제 때를 노려 한 가지씩, 여러 경로를 거쳐 조심스럽게 팔았다곤 하나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중 지금까지 존재도 몰랐던, 엄마가 소중히 여기는 사파이어 귀걸이가 문제가 되었다.
엄마가 집을 나올 때 옷가지 외에 딱 하나 더 욕심을 낸 것이 있으니, 바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인 사파이어 귀걸이였다.
너무 오래되고 관리가 안 되어 간신히 귀걸이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그것은 증조 할머니에게서 할머니에게로 그리고 엄마에게까지 전해져 온 것이었다. 어쩌면 더 윗대를 거쳤을 수도 있을 골동품.
결혼하는 첫째 딸에게 선물처럼 물려주던 사파이어 귀걸이는 알고 보니 굉장한 값어치를 갖고 있었다.
과거 50번이 넘어가는 뒤 번대 테라리움 중엔 9월의 태양의 힘이 맺혀 만들어지는 진실의 사파이어를 생산하던 곳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불의 침입으로 세계수가 힘을 잃고, 그 여파로 보석을 생산하던 테라리움들이 줄줄이 생산을 멈췄다.
특히나 생산지가 사라진 보석 중에서도 사파이어는 거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해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보석들은 과거 생산품들이 아직까지 도는 것이라고 한다. 하등품이라 할지라도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비쌌다.
태양의 힘이 담긴 태양의 보석은 극소수의 특정 테라리움에서만 생산되는데, 하필이면 사파이어를 생산할 수 있는 테라리움이 뒤 번대에 몰려 있어 불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았다고 한다. 어떤 테라리움은 아예 불에 의해 괴멸했다고도 하지.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보석이 하필이면 구석진 테라리움, 그것도 간신히 축복 범위에 드는 외곽 지역의 허름한 집에서 발견되니 난리가 난 것이다.
물론 우리가 나서서 공개한 것은 아니다.
고급 옷을 빌미로 타깃이 되어 집에 도둑이 들었고 엄마의 유일한 재산인 옷가지가 모두 털렸다. 옷장 속의 물건은 단 하나만 건재했다.
옷장 안쪽에 고정된, 뚜껑이 투명한 보석함 안에 들어 있던 사파이어 귀걸이.
잠금이 견고해 풀기 어렵고 무리해서 부수면 큰 소리가 나서 들키며 옷장째로 옮기자니 너무 무겁고 눈에 띄어서 간신히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둑들은 엄마의 소중한 재산을 털어간 것도 모자라 다이아를 받고 사파이어 귀걸이에 대한 정보를 팔아넘겼다. 워낙 매물이 없다 보니 존재 정보만으로도 값어치를 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은 과장을 보태 정보를 팔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정말 그 귀걸이가 사파이어로 만들어진 것을 알았다면 옷장을 뜯어 가는 것도 불사했을 것이다.
어쨌든 소문이 어찌 와전이 됐는지, 단순히 엄마가 사파이어 귀걸이를 소유하고 있다는 소문은… 우리가 사는 테라리움이 알고 보니 마지막 남은 사파이어 생산지로 탈바꿈해 버리고 말았다.
외곽의 가난한 사람들까지 사파이어를 보유할 정도로 생산량이 풍부하다고.
하필이면 테라리움 내에 휴면 상태의 광산이 존재해 그 소문을 더욱 부추겼다.
질 좋은 보석은 세계수 가지에 맺힌 상태로 존재하나 상대적으로 태양의 힘이 미약한 것은 땅에 떨어져 파묻히기 때문에 광산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사방에서 사파이어를 캐기 위한 보물 사냥꾼들이 몰려들며 우리가 사는 테라리움은 때아닌 호황을 맞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