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3화 (383/604)

달칵달칵 캔 따는 소리와 함께 불을 지피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식간에 집 안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 퍼졌다.

그 덕분에 내내 추운 산을 헤매고 다닌 터라 잊고 있던 허기가 미친 듯이 자기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난로 앞 커피 테이블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 세 잔과 딱딱한 빵이 담긴 바구니 그리고 알 수 없는 음식이 담긴 넓은 접시가 올려졌다.

누렇게 살을 드러낸 콩이 매운 냄새가 나는 걸쭉한 주홍색 액체에 가득 잠겨 있었다.

“이것뿐이라 미안해요. 추운 곳이다 보니 가진 게 보존 식품뿐이라서요.”

아까 들린 캔 따는 소리의 정체가 이거였구나.

“저희처럼 여행을 자주 다니는 드루이드는 익숙한걸요. 오히려 시간이 늦었는데도 이렇게 대접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러고 보니 매운 음식은 오랜만이었다.

담백하거나 고소하거나 느끼한 음식, 그도 아니면 달콤한 디저트로만 때운 데다 딱히 찾은 적도 없었지.

비록 이 음식은 칼칼한 고춧가루의 매운맛이라기보단 톡 쏘는 칠리의 매운맛이었지만 꽤 기꺼웠다.

“이건 데운 술이에요. 마시면 금방 몸이 따뜻해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컵을 드는 걸 보며 나 역시 따라서 내 앞에 놓인 컵을 들었다.

따뜻한 술이 화하게 식도를 넘어가고 순식간에 온몸에 열이 돌기 시작했다. 양 볼이 기분 좋게 화끈거렸다.

술을 조금씩 홀짝이며 아직 불빛이 남은 부엌을 구경했다.

선반이며 한쪽에 놓인 상자 안이며, 둥근 캔에 밀봉된 통조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상자에 1번째 테라리움의 마크가 찍힌 것을 보니 정기적으로 그곳에서 지원을 받는 듯했다.

한 번에 많이 쌓아 두는 걸 보면 그 지원일의 텀이 꽤나 긴 것 같고.

이곳의 추운 날씨 때문에 직접 농사를 짓거나 재배를 하는 건 어려울 테니 신선한 재료가 없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서 문득 통조림 캔에 담긴 보존 식품만 먹다 보면 질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혹시나 괜찮으시다면 이것 좀 나눠 드릴까요? 제가 좀 과하게 챙기는 타입이라 많이 남거든요.”

난 주머니에서 비상식량을 잔뜩 꺼내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모험가들이 챙기는 비상식량은 보존 식품과 조금은 결이 달랐다.

물론 테라리움에 자주 방문하지 않는다면 장기간 보유하고 있어도 무방한 보존 식품을 택하겠지만, 나는 제법 자주 들르는 편이었다.

그래서 장기 보존 식품에 비하면 선택의 폭이 넓었고, 꽤나 신선하고 맛도 다양한 비상식량을 잔뜩 고를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럴수록 값은 비쌌다.

친절을 받은 만큼 베풀고 싶어서 막상 비상식량을 잔뜩 꺼내 놓긴 했지만 걱정은 됐다.

혹여나 내가 동정을 한다는 식으로 오해한다면 내 의도와 달리 상대의 기분이 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클로에는 매우 기뻐했다.

“어머나… 설탕이 아닌 과일 자체의 단맛은 오랜만이라 너무 반갑네요.”

그녀는 동결 과일이 박힌 크래커의 껍질을 벗기며 아이처럼 좋아했다.

“부인이 이런 디저트를 참 좋아한다네. 하지만 이런 곳은 설탕이나 꿀 그리고 특히나 과일은 아주 귀해서 말일세. 이거 큰 선물을 받았군.”

“아뇨, 저도 친절하게 맞이해 주셔서 한시름 놓았는걸요. 찾고자 하는 드라이어드의 정보를 얻기 위해선 이 마을이 유일한 단서인데, 문전박대라도 당하면 낭패였거든요.”

이런 상황이 올 줄 알았다면 1번째 테라리움에서 뭐라도 더 잔뜩 쟁여 올 걸 그랬다. 기뻐하는 클로에의 모습을 보니 더욱 그러했다.

인벤토리로 통하는 주머니엔 무슨 물건이든 맘껏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애초에 내가 이리스처럼 디저트를 좋아했다면 디저트 가게 전체를 다 털어왔을 것이다.

잠깐 동안 볼일을 미뤄 두고 느긋하게 식사와 후식을 즐기며 두 사람과 유대감을 다지는 시간을 가졌다.

셋 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지 과정은 더욱 순조로웠다.

“그럼 따님은 제가 여행하다가 이미 만났을 수도, 혹은 앞으로 만날 수도 있겠네요.”

두 분 슬하엔 나와 비슷한 또래의 드루이드인 딸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내게서 딸의 모습을 떠올렸기에 이 집에 무리 없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스노우 필드는 사람이 살기엔 척박하긴 해도 쉽게 만나기 힘든 드라이어드들이 잔뜩 있는 곳이었다.

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그녀는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들과 영혼의 계약을 맺고 여행을 떠난 지 오래였다.

나조차도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들로 덱을 꾸리다니. 어떤 신기한 전략을 만들 수 있을까?

클로에와 버드는 딸이 드루이드이기 때문인지,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에 대한 궁금증이 아주 많았고 사소한 이야기라도 무척이나 흥미로워하며 경청했다.

난 그들이 딸의 여정을 걱정하지 않도록 적당히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 위주로 내 경험담을 풀어냈다.

이렇게 관계를 풀어 두면 그들은 내게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주고 싶어 할 테니 결코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한참을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을까. 드디어 포인세티아에 대해 물어볼 타이밍이 왔다.

“글쎄요. 우리가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를 직접 만났다 하더라도 알아볼 수 없으니….”

“이야기를 나눠 봐서 알겠지만 우린 드라이어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네.”

인간을 좋아하는 포인세티아가 줄기차게 마을을 드나들어서 단서를 잡을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나?

“그렇다면 남몰래 집안일을 도와주는 요정에 대한 이야기는 어떠세요? 12월의 기념일 ‘숨뭄데이’에 열리는 축제에 대한 이야기라도 괜찮아요.”

그래서 낮은 거목에게 들었던 동화 같은 이야기를 화두에 올렸다.

“아, 요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알고 있어요.”

그러자 둘 다 대번에 아는 얼굴이 되었다. 알맞은 주제 선택이었다.

“미신이라곤 해도 정말 도움받은 게 있으니 그 행위를 멈출 수 없어서 말일세. 저기 뒷문을 봐 주겠나?”

버드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책장과 쌓아 둔 신문 더미로 가려진 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모조 포인세티아로 만든 리스가 장식으로 걸려 있었다.

“몇 년 전 숨뭄데이에 걸어 둔 걸 아직까지 치우지 않고 있지.”

숨뭄데이에 맞춰 기쁨과 행복의 마음을 담아 장식한 포인세티아라면, 모조품이라 할지라도 드라이어드가 깃들 수 있었다. 이건 포인세티아에게 내년 한 해를 안온하게 보내게 해 달라며 축복을 비는 행위였다.

그렇다는 건 둘은 포인세티아에 대한 옛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걸 뜻했다.

“이곳에선 저 장식을 행운의 부적이라고 생각해요.”

생각날 때마다 혹은 도움이 간절한 순간,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 음식을 조금 나눠 포인세티아 밑에 놓아두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일이 생긴다는 것이다.

클로에가 시범을 보여 주겠다며 작은 접시에 음식을 조금 덜어 담더니 문에 걸린 포인세티아 리스 밑에 냅킨을 깔고 내려 두었다.

“올 한 해도 무사히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러곤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행위라고 해 봤자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어떤 도움을 받으셨는데요?”

“저장해 둔 식수가 모두 얼어 버려 곤란한 상황이 왔는데, 다음 날 말짱하게 녹아 있었지. 그럴 날씨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계산이 잘못됐는지 평소보다 보존 식품이 일찍 동난 적이 있었어요. 더구나 하필이면 눈 때문에 통로가 막혀 지원 물품을 실은 마차도 올 수 없는 상태였지요. 그런데 다음 날 집집마다 보존 식품이 가득 담긴 상자가 배달되어 있더군요.”

둘의 일화를 제외하고도 이웃 중에 도움을 받은 케이스도 꽤 많았다.

급성 복통에 곤욕을 치를 뻔한 사람 집엔 복통에 잘 듣는 약초가, 지붕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무너질 뻔한 집엔 눈이 말끔히 치워져 있고, 얼음장이 생겨 버린 길 위엔 모래가 뿌려져 있다는 등의 선행이 잇따라 제보되었다.

마을엔 두 노부부처럼 이젠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만 남아서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 대다수였기에, 하룻밤 만에 이 모든 일들을 수행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즉, 그들이 말하는 요정이 도와준 일이 아니라면 불가능했다.

“여기저기 잘도 돌아다니면서 꾸준히 마을을 돌봐주고 있었구나.”

“그 요정의 정체가 포인세티아 드라이어드의 정체였단 말이죠?”

“네, 오래전부터 인간들을 좋아해서 그런 일들을 꾸준히 해 왔다고 들었어요.”

드라이어드는 딱히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니 자신들의 음식을 덜어 나눠 줄 필요 없을 텐데, 아마도 그런 행위가 포인세티아의 선행을 더욱 부추기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아무리 자신에게 필요 없는 선물이라도 일단 받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에서 숨뭄데이 축제가 열리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됐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래전 걸어 뒀던 포인세티아 리스를 아직까지 그대로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나이가 나이다 보니 예전처럼 성대하게 챙기진 못하고, 그날은 그저 간소하게 이웃끼리 모여 좀 더 특별한 식사를 할 뿐이지요.”

아무리 축제의 시초가 된 곳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이 다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곳이라 결국은 자연스레 사장되어 가고 있었다.

포인세티아가 본체를 이곳에 숨겨 둘 정도면 아주 뜻깊은 장소란 뜻인데….

더구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도 사람 몇 명 남지 않은 이 마을을 알뜰히 보살펴 주고 있었다.

자생 필드를 떠나게 된 결정적 원인인 축제가, 그토록 아끼는 장소에서 더는 열리지 않고 있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갑자기 번뜩이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넓은 산속에서 포인세티아의 본체를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날이라도 따뜻하면 모르겠는데 추운 데다 산세도 험난해서 장애물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찾아가는 대신 도리어 내가 있는 곳으로 포인세티아의 본체를 불러들이면 되지 않을까?

“숨뭄데이가 정확히 언제인가요?”

내 물음에 버드가 부엌에서 달력을 떼어 왔다.

“어디 보자…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군.”

날짜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으며 살아서일까? 벌써 테라리움 어드벤처는 12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 이곳으로 넘어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4월쯤에 넘어온 것 같은데.

새삼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을 줄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혹시 내가 있던 세계도 똑같이 시간이 흐르고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 8개월이나 실종 상태가 된 거 아냐?. 이건 좀… 큰일 난 것 같은데. 마냥 좋다고 게임을 즐길 때가 아닌 거 아닐까?

“마지막 주가 숨뭄데이라네. 일주일 뒤로군.”

“어라? 얼마 안 남았네요?”

일단 하던 퀘스트는 마저 끝내고 생각하자.

난 포인세티아를 불러들이기 위해 이곳에서 다시 한번 숨뭄데이 축제를 열기로 계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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