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엔 그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난 추위를 피해 내 품을 도피처로 삼으려는 실새삼을 모른 척하며 뒤로 물러섰다.
내 행동에 그는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을 지으며 추위에 몸을 덜덜 떨었다.
그 질책도 자격이 있는 자가 해야 설득력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가디언들 중 포인세티아에게 뭐라 할 수 있는 가디언이 존재하나 싶었다.
세계수가 나서서 가디언들 눈뜨게 해 달라고 퀘스트를 내린 마당에 말이다.
외딴섬에서 왕 놀이를 하고 있던 실새삼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이 녀석이야말로 가디언의 자리에 심취해 보다 젊은 드라이어드들을 가르치려 드는 꼰대 꽃이었다.
더구나 얜 과거 전 주인의 영생을 위해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려 멸망을 자초한 10그루의 가디언 중 하나였지.
“가치관의 충돌이야. 이런 건 수로 밀어붙이려 해선 안 돼. 일단 다들 진정해. 대화를 좀 해 보자.”
내가 중간에 끼어들어 손짓하자 이끼들이 눈치껏 다른 드라이어드들의 팔을 잡아끌었다.
험악해지려는 분위기에 막 승자 발표를 기대하고 있던 주민들도 덩달아 불안해했다.
드라이어드들 간의 싸움은 일반인들이 싸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포인세티아는 스노우 필드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그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생각하고 그쪽에 집중했던 거지. 이건 최초의 가디언부터 이미 어긋나 있었고, 현대에 이르러선 뭐가 이상한 줄도 모르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을 확률이 커. 그렇다고 그동안 직무를 유기한 포인세티아를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일 시키기 위해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우린 너 같은 가디언은 필요 없어.”
싸늘한 목소리가 최종 선고처럼 쏘아졌다.
“난… 난….”
모두의 적나라한 반감을 접하게 된 포인세티아는 큰 충격에 휩싸인 표정으로 굳어 버렸다.
지켜본 바론 그녀는 여태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어울려 놀고 싶어서 나름대로 노력했던 걸로 보이는데, 그 대상들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싫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물론 나 역시도 친해지고 싶었던 사람들이 대놓고 날 싫어한다 표현하면 큰 상처를 받을 테다.
“난… 단지….”
휘이잉.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차곡차곡 모여 매서움을 더했고 이것이 무언가의 이상 전조 현상임을 깨달았을 땐 대응하기엔 늦었다.
불어오던 바람은 우리가 서 있는 마을 광장을 중심으로 거대한 감옥을 형성했다.
그러곤 땅을 뒤엎어 흙먼지를 날리고 드라이어드들이 열심히 꾸몄던 장식들도 뜯어내 버렸다.
난데없는 매서운 공격에 다들 우왕좌왕했다.
“으악! 이게 다 뭐당!”
“얼른 집 안으로 대피하세요!”
“다들 흩어져!”
쩌저적. 쩍.
갑자기 포인세티아의 발밑에서부터 얼음이 돋아나더니 그녀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포인세티아!”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었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할 즐거운 행사장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메스키트가 발 빠르게 날 데리고 대피하려던 순간, 포인세티아를 천천히 좀먹어 가던 얼음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건?’
마치 도움을 구하듯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있는 가느다란 황금빛 가지가 눈에 띄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도록 강한 이끌림이 날 당겼고, 결국 난 본능적으로 그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웅.
그러자 순식간에 다른 드라이어드들과 분리되어 사방이 시퍼런 얼음 벽으로 뒤덮인 기이한 공간에 갇히게 되었다.
“뭐야? 갑자기 이게 다… 어디서….”
이곳이 좀 전까지 모두와 함께 있던 마을 광장이 아닌 건 알겠다.
“메스키트! 실새삼! 다들 내 목소리가 들려?”
밀폐된 공간에 갇힌 것처럼 목소리가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포인세티아? 설마 포인세티아야?”
이곳에 나 홀로 갇혔다고 생각했는데, 방의 정중앙에 양어깨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있는 포인세티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매서운 한기가 영혼까지 들어찼다.
이곳에 오래 있다간 큰일이 날 거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이곳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밖엔 메스키트를 비롯해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있으니, 금방 날 구해 줄 거야.
그렇게 희망 회로를 돌리며 아무래도 이 이상 현상의 원인인 듯한 포인세티아에게 다가갔다.
“흑흑….”
가까이 다가가자 포인세티아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다른 드라이어드들의 태도에 적잖이 상처를 받은 게 분명했다.
사방을 가로막은 얼음 벽면엔 수없이 많은 포인세티아의 모습이 거울처럼 비춰지고 있었다.
그녀의 우는 소리도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고, 그래서인지 벽면에 비친 포인세티아 하나하나가 전부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포인세티아….”
나 역시 때아닌 숨바꼭질을 벌이면서까지 도망 다니던 포인세티아를 원망한 적이 있었기에, 저렇게까지 서글프게 우는 모습에 양심이 찔렸다.
“당장 같이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이젠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위로를 건네야 하는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눈물을 흘리던 포인세티아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날 마주 봤다.
“이게… 이게 맞는 거라고 했어. 내가 이어받아야만 한다고 했어.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했는데…. 다들 이렇게까지 날 싫어할 줄은 몰랐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펼친 손바닥 위로 빛이 모이더니 물방울 모양의 무언가가 빚어졌다.
보드라운 솜털과 단단한 껍질로 둘러싸인 그건 꽃봉오리를 닮았으나 좀 더 열매에 가까운 형태였다.
“겨울눈?”
자세히 살피니 겨울이 올 때쯤,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올망졸망 맺혀 있던 것들과 닮아 있었다.
포인세티아는 내가 그걸 받기를 바라듯 손을 펼친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 내게 왜….”
조심히 겨울눈에 손을 가까이 가져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포르르 내게로 날아왔다.
그러곤 내 손 위에서 한 올 한 올 껍질이 펼쳐지더니 어느새 투명한 얼음꽃으로 피어났다.
“어라?”
마치 그것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사방에 낯선 음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음을 위해….”
“네가 해야만 해….”
그 속에서 포인세티아가 나지막이 이야기를 꺼냈다.
“가디언 자리… 사실 이어받지 않을 수 있었어. 계속 포인세티아가 맡을 필요는 없었거든. 다른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원했다면 난 바로 내줬을 거야. 애초에 우린 스노우 필드의 꽃이 아니었으니까.”
뭐? 그렇다면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 자리에 교체 가능 순간이 찾아왔었다는 건가?
“빼앗기지 마….”
“하지만 내가 해야 된다고 했어.”
규칙 없이 울려 퍼지던 목소리는 이내 하나의 흐름으로 몰려들어 노래처럼 뻗어 나갔다.
난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추위를 참으며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포인세티아는 내게 무엇을 전해 주려고 하는지를.
그리고 마침내 봄을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던 겨울눈에서 새 생명이 피어나듯, 오랫동안 껍질 속에 감춰져 있던 진실이 두 눈을 떴다.
세계 멸망을 불러왔던 10그루의 가디언들, 그중 하나였던 초대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인 포인세티아는 그대로 자신의 다음 세대에게 가디언 자리를 전승했다.
해야만 했다.
“다음을 위해….”
스노우 필드는 어쩌면 세계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만악들을 세상의 끝으로 몰아 잠재워 둔 감옥 같은 곳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눈 속에 묻혀 있는 건, 단순히 따스한 봄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생명들뿐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주인이 다시 눈을 뜰, 다음을 위해….”
깨어나선 안 될 것도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다른 이들은 알아선 안 됐다.
그것이 전대의 스노우 필드 가디언이 가디언의 자리를 다른 드라이어드가 아닌 반드시 후손인 포인세티아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이유였다.
“넌 그저 그 자리를 유지하기만 하면 된단다. 그러면 모두가 좋아할 거야. 눈밭에 홀로 피어난 우린 외톨이지만, 가디언이 된다면 그들은 기꺼이 널 받아 줄 거야.”
세상 어딘가에 있는 스노우 필드에….
“힘들더라도 잠시만 맡아 주렴. 어떠한 의무도 책임도 행할 필요가 없단다. 아이야, 넌 그냥 이름만 짊어지면 된단다.”
죽은 줄 알았던 그들의 전 주인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다시 깨어날 때가 되거든… 내가 그 자리를 다시 받아 가마. 그러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깊이 의심하려 들지 말고… 즐겁게 지내렴.”
세상을 멸망시켰던 그 드루이드. 10그루의 필드의 가디언을 모두 모았다던 그 드루이드가 아직까지 동면 상태로 살아 있었다!
필드의 가디언은 필드를 다스리는 존재. 만약 제대로 된 가디언이 스노우 필드에 들어선다면 이상을 눈치챌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그때, 문득 실새삼을 처음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끝났다라…. 정말 죽었나 보군….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뭐, 죽었다면 다시 살리면 된다. 숙주만 있으면 되니.”
그때의 실새삼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전 주인을 다시 살릴 수 있을 거라 말했었다.
그래서일까? 정말로 눈 속에 잠들어 있던 악마가 세상에 부활할 것 같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포인세티아… 지금 내가 듣는 이 모든 게….”
툭툭.
그때 무언가가 등 뒤에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쉿.”
“어? 포인세티아?”
뒤를 돌아보자 놀랍게도 내 등 뒤에 서 있던 건 포인세티아였다.
하지만 분명 저 앞에도 어깨를 축 늘인 채 고개를 숙인 포인세티아가 존재하고 있었다.
“설마 분신?”
“아이야, 겨울눈은 겨울을 나기 위한 거란다. 위로받기 위해 성급히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등 뒤에서 나타난 포인세티아는 날 돌려세웠으면서도 또 다른 포인세티아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곤….
촤악.
갑자기 쇄도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어깨를 내주고 말았다.
내게 접근했던 포인세티아의 손이 새빨간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악!….”
온몸의 피가 어깨로 몰려 흐르는 듯 뜨뜻미지근한 감각이 번졌다.
주저앉아 있던 포인세티아가 놀란 얼굴로 달려와 날 공격한 자와 나 사이를 막아서며 소리쳤다.
“뭐… 뭐 하는 거야!”
지혈을 하기 위해 베인 어깨를 붙잡자 장갑 손등의 보석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시간 정지’, 다행히 보석의 힘이 유용하게 발동하며 피가 흐르던 것은 물론 고통까지 멈추었다.
“너… 분신이 아니지?”
뭔가 이상했다.
뒤늦게 나타난 포인세티아는 분신이라기엔 모습도 조금 달랐고 풍기는 기운도 훨씬 섬뜩했다.
“이제 와서 일을 그르치지 마렴.”
그 목소리는 여태 진실을 이야기하던 의문의 목소리와 많이 닮아 있었다.
“아무 인간에게나 정을 주고 따르는 건 우리 종족의 특성이라 어쩔 수 없다지만…. 네가 해야 할 건 특정 인물에게 유독 많은 정을 주지 않는 거란다. 늘 그랬던 것처럼 모든 인간들을 사랑하고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지내렴.”
“넌 대체 누구야?”
“난….”
쩌저적.
막 의문의 포인세티아가 입을 열려고 할 때, 사방의 얼음벽에 천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운 기운이군.”
스르륵.
반가운 노란 줄기가 땅에서부터 뻗어 나와 내 팔다리는 물론 의문의 포인세티아를 천천히 옭아매기 시작했다.
“실새삼?”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것 하나 없는 드라이어드였지만 그래도 옛 동료라고 그리움이 들다니. 시간이란 참 대단한 힘을 지녔구나.”
노란 줄기는 날 보호하듯 부드럽게 감싸는 것과 다르게 의문의 포인세티아를 죽일 듯이 조여 오고 있었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지. 난 고작 이 꼴로 떠도는데….”
빠드득… 빠득.
의문의 포인세티아는 마침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얼음처럼 산산이 박살 나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우릴 가둬 두고 있던 얼음벽도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제이!”
바뀐 풍경은 여전히 마을 광장이었고 날 걱정하는 수많은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그곳에… 어째선지 키가 자란 듯한 실새삼이 복잡한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넌 어째서 갑자기 성장한 거야?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