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무런 확답도 하지 않았지만 분위기상 정답이란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무슨 그런 해괴한 성장법이 다 있어? 정말 내가 부상을 입어야만 한다고?”
“그렇다면 그의 성장은 여기서 멈춘 걸로 하죠.”
메스키트가 매몰차게 결론을 내렸다.
“그가 이 이상 더 자랄 일은 없을 겁니다.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은 평생 묘목 꼴을 벗어나지 못하겠군요.”
상당히 감정이 많이 실린 발언이었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가 더 자라지 않으면 내가 곤란했다.
실새삼은 현재 어린 모습인 만큼 능력 상당수가 봉인된 데다 본래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필드의 가디언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드라이어드들과 다를 바 없거나 그 이하인 상태란 것이다.
게임에서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영웅을 뽑았는데 정작 성장을 못 시켜서 아무 데도 쓸 수 없다니, 이게 무슨 저주란 말인가!
“나도 자라고 나서 깨달은 거다.”
뒤늦게 실새삼이 무척 괴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는 건 원래는 안 그랬다는 거야?”
“원래부터 그랬다면 내 성장을 위해 드루이드 몇은 거름이 되었겠지.”
담담히 말하는 말투가 자못 싸늘하다. 나도 모르게 땅속에 묻혀 있는 수많은 드루이드를 상상했다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은둔자의 정원에서 목격했던 땅굴 속 끔찍한 광경이 불쑥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럼 어째서 이번엔 특이 케이스인데? 애초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주인이 다쳐야 성장하는 드라이어드에 대해선 들어 보지도 못했어.”
내겐 어린 상태였다가 정상적으로 성장한 케이스로 바곳이 있었다.
실새삼도 적당히 경험치 찬 뒤 레벨 업 해서 성장하는 방식이었다면 얼마나 좋아? 왜 하필….
“글쎄…. 재개화(再開花)라서 그런가? 나도 이리 완전히 다시 피는 경우는 처음이라 모른다. 그렇다고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건 아니야. 네가 다쳐야 성장하는 게 아니라 네가 다쳤기 때문에 내가 성장하는 거다.”
“그게 그거 아니야?”
“숙주가….”
실새삼은 말하다 말고 나와 메스키트의 눈치를 살피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전에도 그렇고 종종 드루이드를 숙주라 부르는 경향이 있었다.
“큼큼, 내겐 영혼이 연결되어 있기에 숙주나 다름없는 드루이드가 다쳤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거다. 우리 같은 바이오 필드의 꽃들에겐 숙주의 존재가 아주 중요하지. 그들이 곧 우리의 필드나 다름없으니… 필드의 파멸은 곧 우리의 죽음인 거야. 그래서 성장하는 거다.”
더욱 강해져서 숙주를 지키기 위해.
마치 여러 차례 다친 피부에 굳은살이 생겨 속살을 보호하는 것처럼.
따지고 보면 내가 강해질수록, 좋은 장비를 착용할수록 드라이어드들이 영향을 받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긴 했다.
“그럼 너 말고 다른 바이오 필드의 드라이어드들도 그럴까?”
“아니. 오직 나만 그러하다. 재개화를 할 수 있는 꽃은 이 세상에 나 말고 없기도 하며, 애초에 드루이드의 부정적인 상태를 긍정적인 효과로 받아들이는 드라이어드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죽지 않고 갈아탈 분신과 같은 새 육체를 만들어 내며 영혼을 옮기는 특이한 드라이어드인 실새삼.
포인세티아도 분신을 사용하는 드라이어드였지만 실새삼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포인세티아는 그녀의 모체 상징물만 존재한다면 드라이어드의 모습을 하는 분신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그것들은 각자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즉, 그녀의 그림자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실새삼의 모체는 엄청난 번식력으로 수많은 실새삼을 뽑아내, 세계수의 축복이 닿아 드라이어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그릇을 다량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분신이란 개념은 언제든지 그것들을 골라 정신을 옮겨 갈아탈 수 있도록 준비된 맞춤 인형을 뜻했다.
그가 가디언의 힘을 사용해 실새삼에서 그를 제외한 다른 드라이어드가 태어나지 못하도록 억눌렀고, 그릇들이 오직 자신의 소모품으로만 전락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찌 보면 실새삼이 가진 ‘재개화’ 특성은 그가 불사의 힘을 갖는 것과 동시에 강해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개연성이나 다름없었다.
메스키트는 동종의 드라이어드 중 세계수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자이기에 스페셜 등급임과 동시에 매우 강했다.
현재 메스키트가 존재하는 한, 세상 어디에서도 벨벳 메스키트 자연 발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세계수 밖으로 나온 동종의 수가 적은 드라이어드일수록 많은 힘을 갖는다고 했다.
이론대로라면 실새삼은 강제적으로 자연 발생을 억누르고 있었으니 많은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째서 스페셜 등급이 아니라 유니크 등급인 걸까?
그가 억눌러도 어디선가 태어난 다른 실새삼들이 있다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유니크에 해당하는 만큼 태어나야 할 다른 실새삼 드라이어드들이 태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일까? 혹은 성장하지 못했기에 등급도 제한이 걸린 걸까?
뭐가 됐든 그가 자신의 필드 드라이어드들에게나 심지어 동종에게까지도 지독한 독재자란 사실은 확실했다.
“그럼 내가 얼마나 다쳐야 네가 성장하는 걸까?”
“제이.”
내 질문에 메스키트가 단호하게 제재를 가했다.
“물론 자해를 하겠다는 뜻은 아니야. 그러지도 않을 거고. 나 겁쟁이인 거 알고 있잖아.”
난 내 몸을 끔찍하게 소중히 여기면서 노력은 게을리하는 타입이었다.
다치기 싫어서 조심하지만 병은 들든 말든 내버려 두는 방치형 인간. 외상 말고 내상도 신경 썼다면 커피와 술, 담배를 입에 달고 살진 않았겠지. 운동도 열심히 하고.
“그냥 궁금해서…. 피를 봐야 하는 걸까? 겨우 조금 나오는 정도론 턱도 없을 것 같고.”
“제이.”
다시금 메스키트에게 옐로카드가 날아왔다.
여기서 더 나대면 레드카드를 선고해 허튼 생각도 못 하도록 꽁꽁 싸매서 데리고 다닐 것만 같았다.
실새삼은 내 팔이 박살났을 때 자랐고 어깨가 잘려 나갈 뻔했을 때도 자랐다. 이 정도의 부상이 필요하다면 애초에 스스로 날 상처 입히는 건 절대 불가능인데.
그건 그렇고 실새삼이 완전히 자라려면 내가 얼마나 더 다쳐야 한다는 거야?
물론 이 의문을 입 밖으로 내뱉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벌써 옐로카드 2장이었으니까.
“어쨌든 성장 축하해.”
“뭐?”
내 말이 상당히 의외였는지 실새삼이 크게 놀란 얼굴이 됐다.
“성장은 축하받아야 하는 좋은 일인데 네 성장 조건 때문에 여러모로 분위기가 좋지 않잖아?”
당장 메스키트만 해도 실새삼에게 영원한 묘목행을 선고했다.
“마음도 좋지 않을 테지. 네가 그동안 내게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실새삼도 알고 있었던 거다. 그동안 내가 그를 성장시키기 위해 골몰했던 걸. 그러니 더욱 말하지 못한 거겠지.
“하지만 너무 마음 쓰지 마. 네가 말했던 것처럼 내 부상이란 원인에 집중하지 말고 네 성장이란 결과에 집중하자. 너의 성장은 결국 날 지켜 주기 위해 네가 힘을 낸 거니까. 그러니 난 감사히 여기고 너의 성장을 축하해 줄 거야. 어떠한 순간이 됐든.”
“하하….”
작은 손이 살포시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이제 키 좀 컸다고 버릇없이 구네?
그래도 난 달래듯 살살 쓰다듬는 손길을 내버려 뒀다.
“난 느리게 자라도 상관없다. 아니 저 사막의 꽃이 말했던 것처럼 이대로 멈춰도 상관없다.”
“아니.”
내가 내내 말했는데도!
“내가 자라지 않는다는 건 네가 다치지 않는다는 뜻이고, 내가 구태여 널 지키기 위해 자랄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지. 그러니 이 작은 몸으로도 무리 없이 네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부디 아프지 말아 다오. 난 결과에 신경 쓰기보단 아예 그 원인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어쨌거나 내 드루이드가 아니더냐.”
초등학생의 모습으로 엄숙하게 말하는 모습이 웃겼지만, 그의 마음이 구구절절하게 느껴지니 모른 척하기로 했다.
***
“포인세티아를 만나게 해 줘.”
진통제를 먹고 나니 어깨의 고통도 많이 둔해져서 아무런 문제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안 된다.”
“저도 그의 말에 동의해요. 포인세티아를 가까이하는 건 위험해요, 제이.”
“난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이 필요해.”
가디언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차라리 세대가 교체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어때?”
“그걸 말이라고 해? 대화를 좀 나누고 싶어서 그래.”
“또다시 겨울눈의 방에….”
“그럴 기미가 보이면 도망갈게. 아니 아예 메스키트 손 잡고 대화할게.”
“내 손은?”
“말장난하지 말고.”
숨뭄데이가 끝나가고 있었다. 포인세티아가 가장 사랑하는 축제의 날은 끔찍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듣기론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들이 합심해서 그녀를 꽁꽁 가둬 두고 있다는데, 그 말을 들으니 영 가엾어서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나의 계속되는 설득에 겨우 포인세티아와 면담 자리가 성사되었다.
그녀는 모든 스노우 필드 드라이어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메스키트의 손을 꼭 잡은 나와 대면하게 되었다.
“다친 덴… 괜찮아?”
“이것보다 더 심하게 다쳐 본 적도 있는데, 뭐. 괜찮아.”
내 말에 맞잡은 메스키트의 손이 크게 움찔거렸다.
“포인세티아, 네 상황은 알고 있지만 내겐 네가 필요해.”
곧바로 주위를 둘러싼 드라이어드들에게서 불만과 우려가 섞인 말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말인데… 넌 어쩌고 싶어?”
“…나 말이야?”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많이 위축된 그녀의 모습이 몹시 안쓰럽게 느껴졌다.
1번째 테라리움에선 실새삼과 아무렇지 않게 대거리를 하며 노련한 모습을 보이더니 이렇게 기가 죽어 버려서….
“내가 묻는 건 단순히 날 따라가겠냐는 뜻만은 아냐. 너의 모든 것에 대해 묻는 거야. 스노우 필드 가디언을 계속 맡고 싶은지, 맡는다면 계속 이대로 지낼 건지 등등….”
어차피 다음 세대의 가디언이 나오려면 포인세티아가 세계수의 품에 갔을 때나 가능한 일이기에 가디언 자리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싫은데도 꾸역꾸역 맡고 있는 것과 뭔가 목적이 있는 상태로 맡는 건 달랐다.
전자라면 그녀는 전대 포인세티아의 대리밖에 되지 못했다.
전대의 어처구니없는 원대한 위업을 위해 욕은 욕대로 먹으며 이름을 짊어지고 있을 뿐인 것이다.
내 질문에 포인세티아는 한참 동안이나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럼 이렇게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