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4화 (394/604)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겨울눈만 바라봤다.

겨울눈은 땅에서 살짝 떠오른 채 빙글빙글 느리게 돌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대가 너무 멋대로 구니 포인세티아가 스스로를 겨울눈에 가둔 듯한데.

“부술래?”

“뭐?”

실새삼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상당히 험악한 내용을 입에 담았다.

“이걸 부순다고? 왜?”

“저 겨울눈의 방 안에 있으면 포인세티아는 무적이지만, 정작 겨울눈이 박살 나면 안의 포인세티아도 끝이거든. 단단하기야 하겠지만 공격을 계속 퍼부으면 버틸 수 없을걸.”

“미쳤어?”

“지금 포인세티아는 전대의 망령 때문에 오염됐어. 새로 뽑는 게 낫지 않겠나?”

아무리 실새삼이 전대 포인세티아와 사이가 안 좋다 하더라도 가차 없이 현재의 포인세티아의 삶까지 포기하라 종용하는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일이 커지기 전에 막고자 한 건 포인세티아야.”

“하지만 그녀가 겨울눈 밖으로 나오면 좀 전과도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될 수 있다. 그래도?”

난 어쩐지 지끈거려 오는 머리를 꾹꾹 누른 채 겨울눈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겨울눈의 방 안에선… 전대와 현대의 포인세티아가 따로 존재했어.”

난 적어도 전대가 포인세티아 내면의 어딘가에서 계속 잠적하고 있을 줄만 알았다. 그리고 겨울눈의 방 안이 아니라면 아예 자아 표출이 불가능할 줄 알았지.

그런데 이번처럼 갑자기 현대의 몸을 장악하고 자유로이 조종하려 드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전대는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때에 포인세티아의 육체를 장악할 수 있다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이건… 그야말로 실새삼이 새 몸뚱이로 갈아 끼우는 기술과 다를 바 없잖아?

“포인세티아를 도와줘야 해. 전대의 마수로부터 구해 줘야 한다고.”

내 말에 실새삼은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며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누굴 도와? 저건 너보다 훨씬 오래 산 드라이어드에, 비록 이름값은 제대로 못한다 하더라도 가디언이다.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그녀의 업보다.”

“그래서 내가 있는 거잖아.”

난 메스키트와 실새삼을 함께 바라보며 말했다.

“가디언들 기강 잡으라고 순례자가 된 거잖아. 안 그래? 어떤 가디언은 업보 따위 없었단 것처럼 구네.”

남의 상처에 관한 이야기를 덤덤히 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때로 대상자가 그 상처를 완전히 털고 일어나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면 다른 의미로의 접근이 가능하다.

예상했던 대로 메스키트는 과거 전 주인을 따라 목숨을 끊으려 했던 일이 단순히 부끄러운 일 정도로 남게 되었기에 그저 민망하단 듯이 살풋 미소를 내보였다.

그녀는 모든 일을 청산하고 비로소 제대로 된 가디언의 길을 걷겠다고 천선한 후였다.

“그래… 그랬지.”

실새삼은 메스키트보다 좀 더 늦게 반응했지만, 더 이상 포인세티아를 향해 모질게 구는 걸 멈췄다.

“그래서 우리의 위대한 드루이드는 어떻게 할 셈인데?”

난 메스키트와 겨울눈을 번갈아 바라보다 생각을 굳혔다.

“저 겨울눈의 방, 본래라면 힘을 사용한 드라이어드 혼자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들어갈 수 있었잖아.”

남들 눈엔 보이지 않는 듯한데, 겨울눈엔 이전에 내가 포인세티아에게서 봤던 것처럼 금빛의 가느다란 가지가 뻗어 나와 있었다. 그 가지는 여전히 내게 도움의 손길을 구하는 것처럼 가엾고 딱한 기운으로 내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붙잡아 주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무모하게 구는 건 어깨를 내어 준 일로 족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포인세티아를 찾으러 들어가 볼까 해.”

실새삼이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어깨를 가리키며 한 소리 하려고 하길래 황급히 말을 이었다.

“혼자 가는 건 아니야. 메스키트와 같이 갈 거야.”

나 스스로가 매우 뛰어난 전투력을 보유한 사람이라면 혼자 도전해 보겠지만, 난 다른 방법으로 강한 사람이었다.

“넌 그렇다 치더라도 메스키트는 드라이어드라 함께 갈 수 없을 텐데?”

“그래프트를 써서 데려갈 거야.”

그 말에 둘 다 의외라는 표정을 했다.

그래프트는 내 영혼에 드라이어드의 영혼의 가지를 접목시키는 기술.

즉, 시전자인 내가 주체가 되어 드라이어드의 기술을 빌려 쓸 수 있었다.

“그게 될까?”

“시도해 보기 전엔 모르는 일이지. 메스키트, 우리의 교감도는 어때? 충분할까…?”

그래프트는 원한다고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기술이 아니었다. 드라이어드와의 충분한 교감을 통해 교감도를 채워야만 발동 가능한 기술이었다.

“제이,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제 마음속에 언제나 제이가 있으니 당신만 준비된다면 원하는 때에 그래프트를 발동해도 좋아요.”

메스키트의 말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저런 달콤한 사랑 고백 같은 말은 살면서 아직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결혼한다면 메스키트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

“좋아, 그럼 그래프트를 발동해 볼게.”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그녀의 발언을 과하게 의식해서일까?

그래프트 발동을 위해 메스키트를 바라보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시선이 자꾸 흐트러졌다.

뒤늦게 그런 내 모습을 실새삼이 옆에서 차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단 걸 알아차렸을 땐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뭐 하냐? 왜 그렇게 어쩔 줄 몰라 해?”

“그냥… 집중력이 좀 흐트러졌을 뿐이야. 후, 메스키트 미안해. 다시 해 볼게.”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했을 때, 비로소 나무로 형상화한 메스키트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우람하게 뻗은 나뭇가지를 잡자 오른팔에 묵직한 무게감이 내려앉았다.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 온몸에 넘치는 활력.

저번에도 그랬지만, 메스키트와의 그래프트는 엘더와의 것보다 더욱 벅찬 기분이 들었다.

둘의 영혼의 크기가 다른 이유가 크겠지.

한 손엔 랜스, 다른 손엔 방패를 쥐어야 하지만 어깨 부상 때문에 방패를 드는 것이 조금 버거웠다.

“후….”

내 영혼에 가득 차오른 메스키트의 기운을 느끼며 눈을 뜨자 세상이 좀 더 뚜렷하게 보였다.

“그래프트를 오래 유지할수록 네가 힘들어져.”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유지만 하는 정도라면 내겐 식은 죽 먹기인데.”

아마 그래프트를 발동한순간부터 지금까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내 생명력 대신 다이아가 소모되고 있을 터였다.

“그럼 겨울눈 속으로 들어가 볼까?”

겨울눈을 향해 손을 뻗자 환한 빛이 주변을 감싸며 엄청난 냉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마침내 이전에 방문했던 사방이 얼음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도착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텅 비었던 공간 곳곳에 날카로운 얼음송곳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양손을 보니 아직 방패와 랜스가 존재하고 있었다.

메스키트가 그래프트 상태로 나와 함께 겨울눈의 방에 진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포인세티아!”

“날 찾아?”

상대를 배려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처럼 기척 없이 다가온 포인세티아를 향해 랜스를 내질렀다.

처음 사용해 보는 거대한 랜스였지만, 마치 궤적을 메스키트의 영혼이 조정해 주는 것처럼 날렵하게 꽂혔다.

“내가 네가 찾는 포인세티아면 어쩌려고 그러니?”

상대는 망설임 없이 무기를 들고 얼음 보호막을 세워 공격을 막았다.

포인세티아의 무기는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크리스탈 형태의 오브였다.

“말투만 봐도 아니란 걸 알겠어.”

아무리 둘이 같은 종의 드라이어드라 모습이 똑같다 하더라도 당장 하는 행동만 봐도 어렵지 않게 구별이 가능했다.

“다른 기운도 함께 있네. 그 데저트 필드의 드라이어드와 함께 왔구나.”

“포인세티아는 어딨어?”

“여기 있잖니.”

“너 말고 진짜.”

“어째서 내가 가짜라고 생각하는 거니?”

“지금의 포인세티아에게 기생해서 존재하는 주제에! 가짜지 그럼.”

내 말에 그녀는 굉장히 불쾌하단 눈을 하며 공격을 퍼부었다.

이전 내 어깨를 베었던 날카로운 얼음날이 오브에서 튀어나와 내게 쇄도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메스키트의 방패를 들어 올림으로써 가뿐하게 막을 수 있었다.

“후….”

어쩐지 급격히 피로해졌다.

아무래도 그래프트를 제대로 발동하지 않고 상태만 유지하는 것에도 의외로 많은 정신력이 소모되는 듯하다.

그리고 그런 내 상태를 알아차린 듯 포인세티아가 조롱하며 귀찮게 굴었다.

와장창!

본래의 포인세티아를 도통 어디 숨긴 것인지 알려 주지 않은 채, 이리저리 간만 보며 시간을 보내던 와중.

갑자기 방 안 어느 한쪽의 유리 송곳들이 일제히 박살나며 그토록 찾던 진짜 포인세티아가 나타났다.

그녀는 상당히 괴롭힘을 받았는지 많이 힘들어 보였다.

“포기하고 싶은 게 아니었니? 내가 그 짐을 덜어 주겠다고 했잖니.”

“웃기지 마. 네게 육체를 넘긴 채 완전히 소멸하란 말을 곱게 들어줄 것 같았어?”

여태껏 아무런  의심 없이 시키는 대로 즐겁게 놀며 지내 왔던 포인세티아가 비로소 반항심을 품게 된 것이 전대에겐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정말로 현대의 포인세티아를 자신이 지배하려 수를 쓰고 있던 것이다.

“어차피 네게 필드의 가디언이란 자리는 큰 의미가 없잖아. 그렇다면 네게 남은 건 따뜻한 땅이 아닌 추운 땅에 외따로 핀 외톨이 꽃이란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데, 차라리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니?”

전대의 담담한 질책에 포인세티아는 이를 악물며 걸어왔다.

“그동안 가디언의 자리에 대해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 맞아. 그저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던 자리를 내가 가지고 있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여겼으니까. 그리고 그건 당신이 내게 말해 준 것이고.”

“그래, 넌 때가 될 때까지 그 모습 그대로 있기만 하면 됐단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 네가 가디언의 권능을 이용해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에게 말도 안 되는 규율을 들이밀 때 깨달았어. 적어도 그게 바른 가디언의 모습이 아니란 걸 말이야.”

“이제 와서 깨달아 봤자 늦었단다. 눈의 꽃들은 아무도 네 말을 따르지 않을 테지. 아이야, 네가 가디언의 권능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긴 하느냐?”

포인세티아는 전대의 물음에 날 바라봤다.

아니 내가 아닌 내 속에 있는 메스키트를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 역시 이곳에 나만 온 것이 아니란 걸 눈치챈 듯하다.

“어차피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은 10그루의 가디언 중 가장 마지막에 나타났어. 늦게 온 만큼 뒤처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난 지금부터라도 내가 맡은 직무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을 깨닫고 행동할 거야.”

“단순히 내게 반감이 들어 그렇게 행동하는 것으로는 그 어떤 눈의 꽃도 너의 규율에 동의해 주지 않을 거란다. 그러니….”

쩌적, 쩍.

방 안을 가득 채운 얼음송곳이 다시금 포인세티아를 향해 돋아나고 있었다.

“너 또한 언제나 변하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라.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외면하라. 두꺼운 얼음 아래 뿌리를 가두고 다가올 운명에 순응하거라.”

당장의 상황을 보기만 해도 주도권이 전대와 현대 중 누구에게 있는지 보였다.

현대가 제대로 주도권을 잡지 않는 이상, 그녀 역시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 앞의 단순한 드라이어드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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