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2화 (402/604)

마침내 보나의 아버지인 석류 금융의 사장과 대면하는 날이 왔다.

“제 못난 딸이 신세를 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먼저 찾아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비공식 만남이었기에 그의 차림이 여행이라도 가는 것처럼 가벼웠다.

“아닙니다. 유능한 딸을 직원으로 뽑게 되어 영광이죠.”

한눈에 봐도 보나와 혈연이란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두 부녀는 완전히 닮아 있었다.

다만 호리호리한 보나와 다르게 아버지쪽은 풍채가 대단했다.

열 손가락을 꽉 채운 두꺼운 반지들과 금목걸이로부터 그가 상당히 부를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무려 28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님께서 저를 직접 뵙고자 하시니 아무리 멀어도 달려가야지요.”

석류 금융의 본점은 9번째 테라리움에 있었다.

한 자릿수 테라리움에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데다 듣기론 다섯 개의 분점이 더 있다고 했으니, 이토록 내게 저자세를 보이는 게 의외였다.

보나가 예전에 말하길 20번대 테라리움에도 분점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혹시 그걸 염두에 둔 건가?

하지만 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무한 다이아가 있는 한 금융 쪽과는 인연이 없을 게 분명했다.

“보나에겐 이야기 들었습니다. 60번째 테라리움의 채권을 양도받길 원하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그는 굵은 손가락을 들어 턱을 매만지며 난처하단 얼굴을 했다.

“흠… 솔직히 말하자면 저희야 처리가 곤란했던 채권을 맡아 주신다니 고맙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양심이 찔려서 말입니다. 저희 딸이 신세 지고 있기도 하고 여러모로 행정 관리원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은데 그런 쓰레기 같은 채권을 덥석 넘겨 드리기는 좀….”

“60번째 테라리움이 파산 위기란 정보를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나 보군요?”

내 질문에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처리가 곤란하다고 했으니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내가 채권 구매를 포기하면 손해였고, 그렇다고 포장을 해서 말하자니 그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어차피 무슨 말씀을 하셔도 60번째 테라리움의 채권을 매입하겠다는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야기를 좀 들을 수 있을까요?”

“28번째 테라리움을 운영하시는 분께서 어째서 한참 뒤에 있는 60번째 테라리움을 고려하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뭐, 이야기를 해 드리는 정도는 어렵지 않지요.”

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60번째 테라리움에 대한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 테라리움은 투자로 운영되는 테라리움이었는데 말입니다. 그쪽 행정 관리원이 최근 안 좋은 소문에 휘말려서 투자자들이 전부 발을 뺐지요.”

돈이 많이 드는 자리이긴 하지만, 다이아가 많지 않아도 행정 관리원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존재했다.

그게 바로 투자를 이용한 방법이었는데, 대신 이 경우 대표가 행정 관리원 자리에 앉게 되지만 지분이 나눠진 만큼 영향력도 쪼개졌다.

적당한 경계와 규칙이 존재한다면 잘 돌아갈 테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미미르의 테라리움을 입맛대로 운영하던 자문 위원회 꼴이 날 수 있었다.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이라고 했던가요?”

여기서 들을 거라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에 깜짝 놀랐다.

“행정 관리원은 물론 최측근들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연루되어 있다는 장부가 풀려 버렸다는데, 전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게 아주 불법적인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1번째 테라리움이 개입하여 탈탈 털 정도라면 아주 큰일이겠지요.”

60번째 테라리움의 파산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과 관련되어 있을 줄이야.

“장부요?”

“네, 익명의 단체가 그런 장부를 입수해 고발했다고 합니다.”

네이처 키퍼가 벌인 일인가?

“그 바람에 대부분의 채권들이 부실 채권이 되어 버렸지요. 투자자가 전부 빠져 버렸으니 갚을 다이아가 있겠습니까? 아마 조만간 경매로 넘어가겠지 싶은데.”

경매 우선권은 채권 소유율에 따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 빚더미인 테라리움을 대체 누가 매입하려고 할지 궁금하기도 하지요. 이미 주민들의 이주가 활발히 일어나고 있어서 정상 상태로 돌리려면 엄청 고생해야 할 겁니다. 테라리움 이름값을 등에 업으려고 해도 번호가 너무 뒤 번대이기도 하고. 어디 하나 예쁘게 봐줄 곳 하나 없는데 손해를 감수하고 그 누가 가져갈까요?”

그 사람 바로 나예요.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 정말 휴지 쪼가리나 다름없는 60번째 테라리움의 채권을 양도받으실 겁니까?”

그가 이득과 신뢰의 연줄 중에 선택한 것은 결국 후자였다.

“네, 가능하다면 석류 금융에서 보유 중인 모든 채권과… 다른 금융 쪽에서도 보유한 채권을 다 휩쓸어 오고 싶어요.”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떠오른 건데, 테라리움에 욕심내는 건 나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1번째 테라리움의 눈길이 거의 닿지 않는 뒤 번대에 좋지 않은 소문만 도는 테라리움.

어쩌면 인페르노도 욕심낼 법했다.

그 정도로 애매한 번호대라면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 재도전해 볼 만하지 않나?

아무리 뒤 번대라고 하더라도 세계수 가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었다.

그곳에서 16번째 테라리움의 연금탑 때처럼 제2의 세계수를 만들겠다고 가지를 불에 태울 수도 있고.

“혹시 60번째 테라리움에서 태양의 보석이라도 생산됩니까?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손해뿐인데.”

“그럴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석류 금융에서 다른 금융의 채권까지 매입 중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여기저기 접선했다간 괜히 경쟁자만 붙을 것 같아서요.”

“제가 소문이라도 흘리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나는 일부러 보나에게 시선을 옮겼다가 다시 그를 바라봤다.

“자식을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고. 굳이 다른 금융을 제외하고 석류 금융을 선택한 건, 우리가 아주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첫째를 제외한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을 정도로 냉정한 부모일지라도, 자식 칭찬을 싫어할 부모는 없었다. 정말 보나가 내놓은 자식이었다면 이 자리가 성사되기도 힘들었겠지.

보나는 머리를 잘 굴리고 태세 전환이 아주 빠른 사람이었다.

내게 오는 것이 이득이 될 것 같자 곧바로 림파를 버리고 갈아탄 걸 보면 그러했다.

그런 성정에는 분명 부모의 성정이 한몫했을 것이다. 좋든 싫든 결국 자식은 부모를 닮으니까.

그래서 보나의 아버지도 이득을 좇아 충분히 내게 잘해 줄 거란 믿음이 생겼다.

“전 오히려 중개를 맡았다가 제가 계약을 파기해 채권 처치가 곤란해질까 봐 걱정하실 줄 알았습니다.”

“설마 보나가 그런 사람을 제 아비에게 소개해 주리라곤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나를 통해 그를 칭찬했기 때문인지, 그녀를 바라보는 표정이 한껏 인자해졌다.

“60번째 테라리움은 테라리움 자체를 담보로 여기저기 손을 너무 많이 뻗었기 때문에, 흩어진 채권만 전부 흡수하셔도 굳이 경매까지 가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덕분에 테라리움을 빨리 매입하게 된다면 좋았지만 여차하면 경매까지 가도 상관은 없었다.

“어쨌든 이 일은 석류 금융에서 맡아서 바라시는 대로 잘 해결해 보겠습니다.”

중개 수수료는 물론 채권 처리까지.

많은 이윤을 남길 거라 기대하며 웃음을 가득 담고 떠났던 그가 며칠 뒤, 난처한 소식을 전했다.

나 말고 앞서 60번째 테라리움의 채권을 쓸어 간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자는 석류 금융이 가진 채권까지 나보다 웃돈을 주어 가져가려고 했는데, 먼저 보나를 앞세워 접선하지 않았다면 곧이곧대로 뺏길 뻔했다.

“대체 나 말고 누가 60번째 테라리움을 노리는 거지? 그것도 나보다 한발 앞서서?”

석류 금융은 신뢰를 바탕으로 가진 채권을 끝내 내게 모두 양도해 주긴 했으나 비율이 적었다.

“무조건 경매를 거치지 않고 테라리움을 먹으려는 건가?”

경매까지 나선다면 경쟁을 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채권을 쓸어 모으기 위해 사용한 것보단 좀 더 싸게 테라리움을 매입할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걸 포기하고 빨리 매입하는 걸 택했다라….

어쩐지 인페르노의 구린내가 여기까지 나는 것 같았다.

내게 채권을 모두 양도한 후로 석류 금융의 분점 중 하나가 보복성이 짙은 무력행사를 당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일을 더 복잡하게 해결해야만 했다.

“60번째 테라리움에도 분점은 있으시겠지요?”

친밀하게 지내는 황금 호박 상회와 더불어 16번째 테라리움에 분점을 내고 있는 각종 기업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목표는 하나.

“당장 철수해 주신다면 16번째는 물론 28번째 테라리움에도 연계를 통해 이익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슬아슬하게 파산 줄타기를 하고 있는 60번째 테라리움을 곧바로 무너뜨려 버린 후 경매를 열어 버리는 것이었다.

빚을 갚기 위해 높아진 세금 때문에 주민 이탈은 가속화되고 있다고 했고, 그나마 다이아 벌이가 될 수 있는 기업들의 수수료까지 끊어 버린다면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조금 악랄한 수법이긴 해도 빼앗기는 것보단 나았다.

보복성 무력행사를 당했으나 단서가 없었기에 신고도 못 해 약이 바짝 오른 석류 금융은, 채권을 쓸어 간 미지의 존재가 아닌 내게 60번째 테라리움을 안겨 주기 위해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치던 중이었다.

계약 기간을 빌미로 간신히 붙잡고 있던 기업들도 철수하자 60번째 테라리움이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접한 난 그대로 10번째 테라리움을 방문했다.

본래라면 60번째 테라리움의 경매는 번호 연계법으로 50번째 테라리움에서 열릴 수도 있었으나, 그 순서를 전부 무시할 수 있는 게 가장 앞 번호가 가진 위력이었다.

10번대 테라리움 간의 사업 연합으로 10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이 내게 우호적이라서 다행이었다.

60번째 테라리움처럼 뒤 번대 테라리움은 경매 수수료가 별로 떨어지지 않으니 중개를 해 봤자 손해란 이야기를 들었지만, 10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은 기꺼이 과수원에서 이를 주관해 주었다.

채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경매 소식이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매가 열렸다.

10번째 테라리움이라서 뒤가 구린 놈들은 알아서 걸러질 거라 생각했는데, 듣기론 채권을 가진 이들이 빠짐없이 경매에 참석했다고 한다.

난 경매가 열릴 예정인 과수원의 넓은 회의실에서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전부 눈에 새겼다.

경매 참가자는 나를 포함한 총 5명. 예상했던 것보다는 수가 많았다.

‘하지만 아무리 경쟁자가 많아도, 그들이 다이아가 많아도….’

난 보란 듯이 꺼내 놓은 핸드폰을 매만졌다.

‘다 이길 자신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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