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길드가 호기롭게 길드전을 선포했으나 길드전은 그리 간단히 진행되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신성한 테라리움에서 공성전을 벌인다는 건, 아무리 행정 관리원의 결정이라 해도 대수롭지 않게 용납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테라리움에서 길드전을 벌인다라….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지요.”
여기, 공성전 신청서 작성을 위해 마주한 10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 ‘렐리’도 별다를 바 없는 입장이었다.
60번째 테라리움을 손에 넣음으로써 이젠 정식으로 10번째 테라리움과 번호 연계법으로 묶이게 되었다.
공생 관계가 된 것이다.
다만 렐리는 날 아득히 신분 차이가 나는 60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좀 더 동등한 존재로 대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세계수 가지의 축복이 머무는 곳에서 그런 부적절한 일을 벌인다는 게 몰상식한 일이긴 하죠.”
“몰상식하다기보다는….”
내 답변에 렐리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그저 그런 선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 이거지요.”
세계수의 가지가 축복의 힘으로 불의 위협을 막아 주는 세이프 존.
세상에 존재하는 테라리움은 100개도 안 되는 적은 수였고,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테라리움에서 살기를 갈망하기에 희소성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 대규모 길드전을 벌인다는 건, 자칫 잘못하다간 여론이 나빠져 갖은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한참 번호가 뒤떨어지는 60번째여도 그렇다.
세금 낼 돈이 없어 밖을 떠도는 누군가들에겐 60번째라는 숫자도 감지덕지할 터였다.
하지만 난 60번째 테라리움에서의 공성전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머릿수가 크게 차이 나는 길드끼리의 싸움에서 승산을 걸어 볼 만한 방식이 그나마 공성전이었다. 그것도 수성(守城)하는 입장으로. 우리에게 전면전은 자살행위고.
수성 입장이라면 처음부터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갖고 시작할 뿐만 아니라, 방벽 강화나 무기 보충 등의 사전 준비가 가능했다.
“물론 행정 관리원의 의견이 우선시되겠지만.”
렐리는 신청서를 손톱 끝으로 툭툭 두드린 후 말을 이었다.
“반대 의견이 많다면 1번째 테라리움이 이를 좌시하지 못하고 직접 관여를 할 수도 있습니다.”
60번째 테라리움에서 길드전이 열리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면 결국 최고 집행 기관인 1번째 테라리움의 중앙 행정 관리부가 대놓고 테라리움 공성전을 막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길드전을 앞두고 내겐 부여된 과제가 있었다.
신성한 테라리움에서 온전히 길드전을 열기 위해선 여론이 납득해야만 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모두가 납득할 만한 길드전 진행 방식과 여론 관리.
“테라리움이 반파 직전까지 가야 길드전 승패를 가릴 건 아니겠죠?”
“당연하죠. 행여나 세계수 가지에 피해라도 생겼다간 다음 길드전은 1번째 테라리움의 전속 길드와 할 거 아니에요?”
농담이 아니었다. 세계수 가지에 해를 입히는 건 크나큰 중죄였으니까.
“그래서 생각해 두신 방식은 있으신가요? 저도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지만, 제가 나고 자랄 동안 테라리움에서 길드전을 벌였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번 길드전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역사적 사건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생각해 둔 게 있긴 해요.”
난 아직까지 텅텅 비어 있는 길드전 신청서를 바라보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내가 했던 수많은 게임들 대부분에 길드 혹은 길드의 역할을 대체해 줄 커뮤니티 콘텐츠가 존재했으며, 그중 길드전이 존재하는 게임도 여럿 됐다. 과금 유도가 심한 게임이라면 반드시 있었고.
개개인이 강함을 겨루는 걸 넘어서 개인이 속한 소속감을 걸고 벌어지는 대규모 전투는, 구현만 잘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신규 유저들이 유입되거나 기존 유저들이 게임을 접지 못하고 계속 플레이하게 만들었다.
또한 대규모 전투라면 단순히 길드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서버끼리 경쟁하는 서버전, 심지어 유저가 살고 있는 지역끼리 경쟁하는 지역전, 국가별로 애국심을 걸고 벌이는 국가전까지 존재했다.
대규모 전투 콘텐츠가 존재하는 게임이 엄청나게 많은 만큼 유형들도 아주 다양했다.
그렇다면 내가 이 수많은 게임들 중 참고해야 할 방식은 대체 뭘까?
대규모 전투 콘텐츠엔 단순히 치고받으며 전투력을 겨루는 난투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길드 간 1:1 랜덤 매칭을 통해 연승을 하여 승리 포인트를 쌓는 방식은 상당히 많은 모바일 게임에서 취하고 있는 방식이다. 그 밖에도 특정 보스 몬스터를 상대로 가장 많은 피해를 준 진영이 승리하거나 막타를 친 진영에게 점수를 주는 방법 또는 몬스터를 많이 잡을수록 포인트가 쌓이도록 하는 협동 중심형도 있었다.
혹은 물품을 많이 납부하거나 반복 퀘스트를 길드 단위로 많이 완수하는 등의 노가다형이나, 그도 아니면 자본주의로 경매를 통해 승부를 가리는 방식도 있었다.
장기 서비스를 꿈꾸는 게임들은 소수 길드가 상위권을 간단하게 독점할 수 없도록, 경쟁 의지가 꺾이거나 콘텐츠가 사장되지 않도록 단순 전투력과 머릿수만이 길드전의 전부가 되지 않게 기발한 방식으로 콘텐츠 설계를 했다.
만약 머릿수만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면 한국은 국가전을 치를 때 맥도 못 추리겠지.
이중 내가 참고할 것은 비교적 소수 인원의 길드라도 상위권을 노릴 수 있도록 설계된 대규모 전투였고, 이점만을 골라다가 상대방도 납득할 수 있도록 잘 포장해야 했다.
공성전도 공성전 나름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진행해야 테라리움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우리가 아스키아 길드에 비벼 볼 수 있을까?
“공성전 방식을 결정하는 데 연금학회의 도움도 받을 생각이에요.”
내가 겪었던 길드전을 주르르 떠올리며 마침내 진행 방식을 결정했다. 더불어 여론도 사로잡을 방식까지.
***
관계자들 사이에서만 뜨겁게 달아올랐던 이슈는 열기로 인해 내부에서 팽창되다 못해 결국 바깥까지 새어 나갔다.
적당히 원만한 인간관계를 이루는 사람들은 돌고 도는 소식통에 의해 길드전이 일어날 거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요즘처럼 불 때문에 살기 힘든데 테라리움에서 길드전을 벌인다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럴 때일수록 뭉쳐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싸움이라니.”
“대형 길드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던데 좋은 테라리움에서 사니까 정말 살기 편한가 봐? 응?”
“대형 길드일수록 솔선수범해야 할 거 아냐!”
불의 침입으로 인해 피폐해진 일상 때문에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아질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판을 쏟아 냈다.
특히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곳이라면 화두로 떠올라 소문은 더욱 걷잡을 수 없도록 퍼졌다.
그러다 보니 그 대형 길드의 상대 길드인 가이아 길드도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뭐 하는 길드래? 길드 이름은 뭔데?”
“알려진 게 없는 걸 보니 완전 규모가 작은 신생 길드가 아닐까?”
“그 길드는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쓸데없는 짓이지.”
아스키아 길드는 대형 길드인 만큼 알려진 정보가 많았지만, 가이아 길드는 길드 이름을 내걸고 외부 활동을 한 적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억측이 잇따랐다.
“이 모든 게 유명세를 얻으려고 벌인 자작극이라던데. 아스키아 길드엔 거금을 주고 어울려 달라고 했다는 거야.”
“그럼 길드전이 벌어지기 전에 발을 빼겠네?”
“아니야. 내가 듣기론 척을 졌다고 했어. 큰 죄를 지어서 아스키아 길드가 대표로 벌을 주려고 했다더군.”
“아스키아 같은 대형 길드가 움직이는 이야기가 뭐겠어? 상대 길드가 시정잡배 같은 놈들로 이루어져 있으니 대의를 위해 움직이는 거지!”
“그럼 아스키아 길드가 선행을 하는 건가?”
그나마 다행이라면 정말로 가이아 길드에 대한 정보가 완전히 없다시피 했기에 오히려 특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들은 쉽게 열기를 잃지 않고 과장에 과장을 보태서 사람들에게 쏠쏠한 안주거리를 제공했다.
“요즘 이런 이야기가 돌고 있어요.”
외부 시찰을 나갔던 이리스가 근방에서 들리는 길드전 소문을 살뜰히 물어 왔다.
“이렇게 이목이 집중되어 있을 때 아스키아 길드를 꺾어 버린다면, 가이아 길드는 엄청 유명해지겠죠?”
이리스가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입에 좋지 않게 오르내리는 길드 소문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두렵고 걱정되기도 할 텐데, 이걸 길드가 유명해지는 토대 정도로 웃어넘기다니.
“잘 결판 짓고 오세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길드전을 벌여 봐요. 만약 무산된다면 우리가 겁나서 도망갔다거나 정말 사주를 받고 한 발 뺐다고 오해하겠어요.”
“저만 믿으세요.”
1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날 배웅하며 이리스가 말했다.
10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인 렐리의 우려처럼 길드전에 대한 안건이 결국 1번째 테라리움으로 넘어갔다.
새어 나간 정보 때문에 화제를 이끈 탓도 있었지만, 유례없는 일에 1번째 테라리움도 내부에서 취할 스탠스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스키아 길드에 길드전을 선포하고 60번째 테라리움을 먹으면 길드전이 뚝딱 열릴 거라 생각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은 설계된 게임 시스템처럼 마냥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수없이 얽힌 이해관계를 적절히 해소해야만 했다.
“그래도 다짜고짜 금지 통보가 오지 않는다는 건, 내부에서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란 뜻이겠죠?”
“주변에서 잘 도와줘서 다행인 거죠.”
물론 1번째 테라리움 입장에서는 일을 복잡하게 벌일 필요도 없이 테라리움에서 벌이는 공성전을 금지하면 깔끔했다.
그렇게 된다면 가이아와 아스키아는 테라리움에서 멀리 떨어진 빈 땅에서 난투를 벌여야 하겠지만.
난 렐리의 조언을 토대로 물밑 여론전을 펼쳤다.
현재 길드전에 대해 떠들며 이야기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여론이 아닌,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60번째 테라리움 주변 테라리움들의 행정 관리원들의 포섭이었다.
이웃 테라리움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다면 혹시 자신들의 테라리움에 피해가 올까 봐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고 충분히 항의를 할 만했다.
더 나아가 영리하게 군다면 그들과 번호 연계법으로 묶인 앞 번호 테라리움도 끌고 오겠지.
그렇게 된다면 길드전 반대 의견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1번째 테라리움과 정면 대결을 하기 전, 작업에 착수했다.
행정 관리원을 만날 수 없다면 그 보좌관을, 그것도 안 된다면 과수원 직원들을.
테라리움에서 영향력이 제법 큰 단체나 기업은 물론 전속 길드들까지.
길드전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반대하지 않도록 조절했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쉬웠다.
뇌물 청탁. 뒤 번대 테라리움일수록 가장 필요로 하는 게 자본이었다.
이 세상은 테라리움의 각 행정 관리원들이 왕처럼 군림하는 방식이기에 뇌물에 대한 위법 사항은 없었고, 난 갖은 방식으로 돈을 풀어 결국 1번째 테라리움이 마땅히 길드전을 금지할 핑계가 없도록 만들어 냈다.
다이아가 있으니 나 스스로의 양심만 내려놓는다면 충분히 여론을 휘두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