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8화 (418/604)

이미 완성된 태양이라 칭송받던 자라고 했던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사그라들었다고?

아니, 별은 태어난 이후부터 죽어 간다고 하나 내가 일생을 살아가며 그 순간을 볼 날이 오겠는가? 어쩌면 전 인류가 멸망하고 난 후의 까마득한 미래에서나 일어나겠지.

죽어 가고 있다 하더라도 태양은 태양이다. 뜨겁기는 매한가지란 말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열기에 죽는다.

“저게 뭐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아무리 후미진 곳이라 하더라도 테라리움이다. 그리고 이렇게 지켜보는 사람들도 많은 테라리움. 더구나 수배령이 떨어진 마당에.

등장과 동시에 친히 신고식이라도 치러 주려는 것처럼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방금 불을 다룬 거 봤어? 설마….”

1번째 테라리움의 주도하에 모든 테라리움에 인페르노 수배령이 떨어졌다. 이들 중 과거에 베스탈리스의 존재를 모르던 자들이라도 지나가다 수배지를 봤을 테니 이젠 불을 다루는 사람들과 인페르노와의 연관성을 쉽게 연결 지을 것이다.

떼로 몰려온 인페르노는 내가 있는 쪽이 아닌 다수가 있는 곳을 선공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한 편이라고 생각했든, 그저 사람이 많이 있으니 처리하겠다고 마음먹었든 어쨌든 곱게 돌아가지는 않을 거란 사실은 알겠다.

“내가 만났던 스텔라는 저렇게 과감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쩐지 그녀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 할 것만 같다.

“놀랐어. 어째서 그녀가 여기 있는 거지? 설마 진짜 나 하나 잡겠다고 행차하신 건 아니겠지?”

파필리온의 얼굴엔 경악이 가득했지만 그 내면엔 두려움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스텔라를 두려워하는 것 이상으로 그는 그녀를 무서워했다. 나보다 오래 마주친 자가 저 정도로 생생하게 두려움을 표한다. 이거… 계획이 너무 도가 지나쳤던 건 아닐까?

“어쩔 거야? 나를 미끼로 쓴 게 역효과를 낸 것 같은데. 애쉬가 오진 않았어도 결코 나은 상황은 아닌데.”

저들 중 어딘가에 에우노미아도 있을까?

스텔라가 이끌고 온 무리는 내가 여태 봤던 인페르노 단원들 중 가장 노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서 마주쳤던 이들의 상위 호환쯤.

스텔라는 4개의 파벌 중 가장 연륜이 많고 노련한 파벌을 이끄는 장로라고 했지. 그녀가 현역일 적 활약했던 자들이 모여 있다고 했으니 실력이 어지간히 대단한 자들일 것이다.

단순히 불만 쏴 대는 화염방사기 수준이 아니라 진짜배기들이 몰려 있다는 거지. 지금 그자들이 이곳에 있었다.

“쫓아올 거라면 개척하는 불꽃 쪽일 줄 알았어.”

“그래, 나도 평소 가장 밖으로 나오지 않는 자들이 온 게 믿기지 않아.”

스텔라는 단순히 위협사격을 하는 정도로 최후방에서 불을 다뤘을 뿐이다. 그녀의 손에서 피어난 화염이 승천하는 용처럼 하늘로 쏘아져 나가 하늘에 한 개의 태양을 더 만들었다.

그 불은 직접적으로 이쪽을 향해 날아오지 않았지만 열기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엄청난 힘이었다.

일대에 비상이 걸리고 사람들은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들로 타깃을 바꿨다. 본디 불을 상대하기 위해 세계수가 보낸 위대한 존재들이 바로 드라이어드이기에 서로가 천적이 되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스텔라가 이끌고 온 부대는 전원 베스탈리스들이었다. 드루이드들도 듬성듬성 섞여 있던 다른 부대들과는 달랐다.

불과 나무가 맞붙었고 나무는 넘실대는 불의 파도를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세상에! 저자들은 인페르노가 아닙니까?”

1번째 테라리움의 감시자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인페르노를 노려봤다. 만일을 대비해서 이단 감찰단이라도 주둔시켜야 했던 걸까?

“맞아요.”

“그들이 어째서…! 감히 겁도 없이! 아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이 일을 1번째 테라리움에 알려야 합니다!”

“지금 나가면 타 죽을 건데요?”

내 말에 그들은 당장이라도 테라리움 밖으로 뛰쳐나가려다 멈춰 섰다. 지금도 아스키아가 간신히 그들을 상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괜히 빠져나가 눈에 띄는 행동을 해 봤자 표적이 될 뿐이었다.

“그리고 굳이 알리러 가지 않아도 몇 시간 뒤면 전해질 거예요.”

제일 편차가 적은 곳이 세 시간 간격이었다. 앞으로 세 시간 뒤면 인페르노가 쳐들어온 광경이 TV를 통해 생중계될 터였다. 그러니 만약 일이 잘못되더라도 오랜 시간 동안 이 참상이 외부로 전해지지 않은 채 쓸쓸히 방치될 일은 없다는 거지.

“스텔라….”

난 저 멀리 직접 참전할 건지 말 건지 간만 보고 있는 스텔라의 모습을 바라봤다. 엄청난 화염을 패션처럼 두른 여인. 무시하려야 무시할 수 없는 엄청난 존재감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열기를 이겨 내며 다가오는 여인이 보였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직감적으로 그녀가 에우노미아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저렇게나 곁을 허락받다니. 마치 오른팔쯤 되는 충실한 부하처럼 말이다. 에우노미아에 대한 평가도 수정해야 하는 걸까?

“이건 스텔라에게 전혀 득이 될 게 없는 상황이야. 그녀는 평생을 교단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했어. 대체 무슨 심정의 변화가 생긴 건지? 인페르노의 방침이 바뀐 건가? 설마… 수배령이 떨어졌으니 이젠 드러내 놓고 활동할 때라고 여긴 건가?”

화상 자국 같은 문신을 드러내 놓지만 않는다면, 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불을 피워 내지만 않는다면 베스탈리스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으므로 쉽게 들킬 일은 없었다. 인페르노를 수배한다고 했지만 그 수배지에 그들의 얼굴이 나와 있지는 않으니까.

화르륵.

전황은 인페르노가 살짝 밀리는 수준이었다. 이를 묵묵히 지켜보던 스텔라는 곁에 선 에우노미아와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더니 이젠 직접 참전할 생각인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이를 느낀 아스키아 길드 쪽도 스텔라를 엄청 경계하는 것이 보였다.

“아스키아 쪽의 피해가 더 커질 때까지 지켜볼 거야? 저러다 다들 도망가 버리기라도 한다면 우리만 남아서 상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적당히 협력해서 인페르노를 상대할 때를 가늠 중이야.”

파필리온의 말처럼 아스키아가 인페르노를 상대하는 것이 손해라고 판단 내린 후 후퇴를 결심한다면 큰일이긴 하지만 쉽사리 그런 결심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대외적으로 정의로움을 내세우는 ‘대형 길드’이기 때문이다.

현재 세상에서 가장 악질 높은 단체를 마주해 놓고 무서워서 도망간다? 그런 불명예와 수치는 또 없지.

“스텔라가 직접 나선다면 더 때를 기다려 볼 것도 없이….”

기다려선 안 된다. 마치 이 일대를 집어삼킬 것처럼 거대한 화염 회오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스텔라는 불덩이를 쥔 손을 휘적거리며 끊임없이 불기둥을 지상에서부터 하늘로 쏘아 올렸다. 지상의 산소를 전부 태워 상승 기류를 만들 작정이었나 보다.

“아….”

힘에 압도된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주변의 땅을 통째로 불판 위에 올려 둔 것처럼 가공할 열기가 끓어올랐다.

저 막대한 기술을 보고도 같은 부류인 애쉬가 떠오르진 않았다는 게 아이러니했다. 똑같은 불이 재현한 재앙이었지만 저걸 보고 떠오른 건… 그래, 바다 위 애드너의 배에서 마주했던 거대한 파도의 장벽이 떠올랐다.

두려움을 넘어서 무력함을 느낄 정도로 압도적인 공포.

하지만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은 자신이 목도한 두려움에 휩싸여 덜덜 떨며 손을 놓고 있을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불가능해 보여도 가능성을 찾아 부딪힌다.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그래프트가 시전되며 불을 제압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생전 처음 보는, 어쩌면 다시 보기 힘들 수도 있는 그래프트 기술들이 난무하며 기상천외한 광경을 펼쳤지만 그렇다고 그 찬연함을 마냥 감탄하며 구경할 수 없었다. 필사적임이 느껴지는 몸부림이었다.

이 자리에 단번에 저걸 막아 낼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모두의 그래프트는 저 기류를 막고 버텨 내기 위해 시전한 것이 아닌, 저 회오리가 공격 오기 전에 소멸시키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바람의 흐름을 막을 만한… 아니라면 반대로….”

“물을 퍼부을 수 있다면….”

각기 자신들이 생각해 낸 고안을 토대로 기술을 퍼부으며 회오리의 열기를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 산발적으로 무수히 많은 공격들이 터져 나오자 막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던 화염 회오리도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다소 희망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일제히 터뜨린 합동 공격이 단순히 스텔라를 ‘주춤’하게 만드는 데 그친 건 상당히 절망적이었다.

분명 저 집단엔 우두머리가 되는 길드 마스터 라피스가 존재했지만 통제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하나의 전략으로 다 함께 움직이는 것이 더 성공률이 높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거대한 불 보스를 상대할 때 합동 공격 전략쯤은 있는 것 아니었어?”

대응 매뉴얼이 없는 걸까? 아니면 그런 전략 따위 펼칠 정신이 없는 걸까?

어쨌든 시간을 더 투자하면 저 중구난방의 기술들로 회오리를 물리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게 단순한 재해라면 말이다. 그러나 스텔라가 이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리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이쪽의 발악에 대응해 스텔라가 불의 기운을 더 보태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는 안 되지. 메스키트!”

스스스….

사방에서 불러들인 모래가 이에 대항이라도 하듯 몸집을 키운다. 스텔라를 상대하기 위해서 결국 정문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파스슷, 가막살나무와의 그래프트가 풀렸다.

저 위력이라면 내가 바랐던 대로 아스키아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기 충분했지만, 난 이곳에서 다량의 불에 탄 시체 따위 치우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이 전쟁은 살상을 목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들 물러나!”

하지만 난리 통에 내 고함이 선명히 들릴 리는 없었고 들린다 하더라도 우리 편이 아닌 이상 내 명령에 따를 이유도 없었다.

“모래에 휘말려도 내 책임 아님.”

메스키트의 모래는 살상용이 아닌 방어용이었다. 다만 관점에 따라선 공격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스텔라처럼 단번에 공기를 데워 상승 기류를 만들 순 없으나 메스키트의 모래는 사막의 뜨거운 모래였다.

메스키트는 내 생각에 따라 착실히 움직이며 비슷한 모래 회오리를 만들어 냈다.

불이 났을 때 물로 끌 수도 있지만 물이 없다면 모래를 덮어 끌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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