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리움 주변의 기온이 급격하게 변화했다. 숨 막힐 정도로 뜨거웠던 열기가 점차 식어 가며 절망적이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마침 비가 내리다니!”
“보통의 불이라서 다행이야. 화기가 줄어들고 있어!”
“하… 살 것 같다.”
인위적으로 내린 비라는 걸 알 리 없는 사람들은 난데없는 이상 기후를 반겼겠지만 그동안의 숱한 경험으로 미뤄 보아 비를 내린 주체가 나라는 걸 깨달은 자들의 눈빛은 미묘해졌다.
큰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또다시 보통의 범주를 넘어선 힘을 사용한 내게 혹시라도 문제라도 생길까 봐.
차라리 언제까지나 걱정 받는 입장이 되고 싶다. 사람은 이해 가능한 범주를 넘어서게 되면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었다. 이런 나에게서 과거 세상을 멸망시켰던 그 드루이드를 떠올리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몸이 가벼워.”
이번 가드닝 스킬은 다른 때와 느낌이 달랐다. 청량한 기운이 온몸을 순환하며 과한 힘을 사용해 버겁다는 느낌도,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지 않았다.
좋게 말하자면 이 힘이 내게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왔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이젠 이런 놀라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감각이 둔해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광범위한 지역을 컨트롤하기 위해선 정신을 집중해야 했고, 난 내 안에 휘몰아치는 차가운 기운을 한껏 느끼며 아직까지 남아 있는 열기를 몰아내기 위해 기운을 퍼뜨렸다. 기운의 발산 형태에 적응해 가며 이 가드닝 스킬이 오직 비만 뿌릴 수 있는 스킬이 아님을 깨달았다.
생명이 잘 자라기 위해선 단순히 비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날씨, 기온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필요했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난 60번째 테라리움의 행정 관리원으로서 이 지역의 날씨를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화창한 햇살이 필요할 땐 포근한 환경으로, 더위에 지칠 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도록. 그리고 지금처럼 단비가 필요할 땐 지상을 적셔 줄 맑은 비구름을. 모든 것이 세계수 가지의 축복을 거쳐 생명이 만개할 수 있는 환경으로 탈바꿈한다.
통상 인과관계라면 다른 생명을 위해 내 생명을 바치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난 어느새 이런 일에 내 생명력을 다이아로 대체하는 일이 쉽고 당연해졌다. 그러니 다른 행정 관리원들이 이 기술을 따라하려 해도 지금처럼 다이내믹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다.
내리는 비가 팽팽했던 분위기를 느슨하게 만들며 아주 잠깐의 소강 시간이 생겼다. 모두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숙고하는 시간이 마련된 것이다.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스텔라와 인페르노도 같은 듯했다.
촘촘하게 내리는 빗방울에 시야가 흐릿해져 지금 이 순간 스텔라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반격하지 않는 걸 보면 차가운 비에 식은 대지처럼 그녀도 머리를 식힌 게 아닐까? 그렇다면 더욱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아직 땅에 잔존한 열기들을 짓밟을 필요가 있지.
이 느낌이 익숙하다고 했던가. 그래, 어떻게 보면 엘더와 그래프트를 펼칠 때 느꼈던 감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힘을 떠올렸을 때, 난 본능적으로 가장 구현하기 쉬운 길을 떠올린 듯하다. 이미 여러 번 겪어 봤고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아도 바로 곁에 가장 확실한 답을 가진 케이스가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엘더와의 그래프트, 항상 경이롭고 극적으로 상황을 반전시켜주는 최고의 기술. 그러니 굳이 다른 케이스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그런데 넌 어째서 그런 얼굴이야?
“엘더?”
비를 바라보는 수많은 자들의 눈빛 중 엘더의 눈빛만큼은 확연히 다른 감정을 품고 있었다.
절망, 끝없는 절망, 좌절 그리고 두려움.
그 모든 것이 날 향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난 엘더의 심정을 곧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난 이제… 필요 없는 거야?”
힘겨운 목소리가 빗소리에 뭉개지며 더욱 아래로 떨어졌다. 내 당황한 감정에 동요된 힘이 잠시간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네가… 왜 필요 없다는 거야? 엘더, 왜 그런 생각을 해?”
마주 본 엘더는 울고 있었다. 마치 내가 당장이라도 그를 버릴 것처럼 굴기라도 한 듯 절절한 눈물이었다. 쉴 새 없이 내리는 비가 감추고 있더라도 올곧이 나만 바라보는 저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는 걸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난 가드닝 스킬로 비를 내리며 한편으론 엘더의 마음이 풀리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프트를 사용했다면 진작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심리적인 문제가 벽이 되어 지체됐으니 자신을 탓할 엘더가 걱정됐다. 그러니 걱정 말라고, 너와의 그래프트가 기원이 된 힘이 당장 급한 불을 끄는 걸 보며 마음이 놓였으면 하고.
하지만 비를 선택한 건 잘못된 선택이었던 걸까?
“이제 넌 내가 없어도 비를 내릴 수 있잖아….”
비가 내려도 흠뻑 젖는 사람들과 달리 드라이어드들은 젖지 않는다. 오히려 비를 맞은 식물들처럼 싱그럽게 빛을 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더는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비가 아닌 절망에 젖어 눈빛이 죽어 가고 있었다.
녹음처럼 밝게 반짝이던 두 눈은 생기를 잃어 우중눅눅해지고 시선은 기운을 잃어 고개를 떨구는 식물처럼 아래로 향한다.
“엘더!”
어째서 그런 생각을…!
일순 엘더의 밑도 끝도 없이 하락하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예상했던 대로 발현의 형태가 비였던 것이 문제였다.
“이 비가 정말 나 혼자 오롯이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 거야?”
“난 너와 그래프트를 쓸 수 없어. 하지만 이젠 나 없이도….”
오롯이 자신과만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을 상대가 보란 듯이 홀로 해낼 때의 좌절감. 그리고 앞으로 내가 없어도 될 거라고,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을 거란 두려움. 그 상대가 자신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면 모든 감정들은 더욱 극대화된다.
그 일을 함께 할 때만큼은 자신의 필요성, 아니 존재감을 확인받고 상대를 잠시나마 독점할 수 있다는 소유욕을 엘더가 가지고 있었던 거다.
모든 엘더 플라워들이 동류의 그래프트를 사용할 수 있지만 내 엘더는 다른 이들은 흉내낼 수 없는 대단한 그래프트를 사용한다는 점이 그 소유욕에 불을 지폈던 게 아닐까.
하필 이 상황에서 자신을 빌리지 않고 똑같은 힘을 홀로 발현 해내는 날 봤으니….
“애초에 네가 없었으면 난 지금 이 상황에서 비를 내리고 있지 못했을 거야. 그러니….”
치이익.
잡담은 그만하라는 듯 뿌연 수증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변화가 잠시 마음을 놓은 이들에게 다시금 긴장을 불러 일으켰다. 아직 스텔라를 해치운 것은 아니니까.
적은 잠시의 전투 유예를 허락했을 뿐이라는 것처럼 존재감을 드러냈다. 겨우 이따위 비에 물러날 것으로 보였냐며 호통을 치듯 엄청난 기운이 주변을 후려쳤다.
우르릉!
마치 메스키트가 지진을 사용했을 때처럼 땅이 크게 지진했다.
도망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