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2화 (422/604)

“네 주인은 이제 나야. 버리고 제 발로 찾아왔으면 미련은 버려야지?”

그칠 줄 모르는 울음소리에 남자는 결국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응수했다. 평소엔 그러려니 넘겼으나 지금은 눈을 떼고 싶지 않을 만큼 흥미진진한 광경을 방해받는 것이 싫었다.

“그럴 거면 다시 돌아가든가!”

“으아앙!”

달래기는커녕 역효과만 터졌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보이는 주인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에 한탄하듯 마거리트의 울음소리는 더욱 커지기만 했다.

“암매(岩梅), 어떻게 좀 해 봐.”

그의 시선에 무거운 중갑옷을 칭칭 두른 작달막한 드라이어드가 잡혔다. 몸을 웅크린다면 새하얀 바위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연분홍 빛깔을 띤 머리색과 양 볼의 새빨간 홍조가 인상적인 드라이어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곤란. 미리 경고했음. 무시한 건 너. 새파랗게 어린 묘목이 여정에 대체 무슨 도움이 될지 의문.”

“미래를 보는 꽃이잖아. 그때 우리가 미래를 볼 수 있었으면 이 지경이 됐겠어?”

“넌 대체품일 뿐.”

“그래, 날 대체품으로 선택하긴 했지만 그 끝이 결국 내가 신이 되는 길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그래서 말인데 진짜 얘 좀 달래 주면 안 돼? 울보 드라이어드는 처음이라.”

“곤란. 감당할 수 없으면 파기 추천.”

힐끔, 마거리트 드라이어드를 향한 돌매화나무의 시선이 여간 곱지 않은 게 아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주인의 부름을 받고 깨어난 드라이어드는 갓 태어난 생판 모를 드라이어드가 팀에 합류하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더구나 저런 울보라면 더욱….

“하. 고지식한 널 먼저 깨우는 게 아니었어. 다른 사근사근한 녀석이었다면 도움이 됐을 텐데.”

“흥!”

말은 그렇게 하더라도 오랜만에 다시 대면한 순간 그가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걸 돌매화나무는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과 헤어진 후 모든 감정을 잃고 하나의 바위 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재회가 다시금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 감정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뭐, 그래. 울려면 울어라. 네 주인도 여기서 마지막일 테니.”

그 말에 울음이 잠시간 뚝 멈췄다.

마거리트 드라이어드를 향해 반짝 튀어 올랐던 그의 관심이 식었다. 온몸을 감돌던 생기가 다시금 가라앉을 때쯤이었다.

그의 눈빛은 다시금 건조해졌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뭐든 빨리 결판이 났으면 좋겠다고, 그것도 자신이 예상했던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동면과 함께 세상은 완전히 망해 버렸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눈뜬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었고 세계수는 굳건했으며 사람들도 잘 지내고 있었다.

자신과 동료들의 모험담을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고 힘겹게 이룩한 눈부신 업적들 역시 백지가 되어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예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그는 돌매화나무 드라이어드를 만나 과거를 확인받기 전까지 모든 것이 동면 속의 꿈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었다.

“겨우 저게 날 대신할, 아니 나보다 더 대단한 존재라 추앙받는 드루이드란 말이지?”

과거를 함께했던 오랜 동료였던 포인세티아가 사라지면서 자신에게 깃든 옅은 사념에 의하면, 어쩌면 그가 주시하고 있는 드루이드는 ‘우리’와 다를지도 모른다고 했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세상이 진정으로 원하는 영웅의 모습을 보여줄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뭐가 다르다는 걸까? 오히려 나보다 시기가 더 빠르지 않아? 위기의 상황 속에서 결국 절대자인 세계수에게 기대고 마는 선택 말이야.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더욱 강한 힘을 원하고 종래엔 그 힘에 맛 들여 완전히 의지해 버리고 말겠지.”

돌매화나무는 무덤덤한 말투로 한 드루이드의 최후를 고하는 주인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남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과거의 그가 한때 세계수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계기가 되어 버린 사건….

“힘을 얻는 거야 좋지. 하지만 감당하지 못한다면 끝인 거야. 그래서 네 전 주인은 여기서 끝이야. 그러니 단념해. 이제 아무리 울어도 돌아갈 곳은 없을 테니 저 모습을 똑똑히 봐 둬. 영혼이 갈기갈기 찢겨 버려서 정신이 줄줄 흘러 나가고 있는 저 모습을.”

마치 그러기를 바라는 듯한 목소리에 마거리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젠 자신이 전 주인을 대변해도 되는 위치인지 애매해져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다.

***

엄습해 오는 엄청난 고통에 잠시 기억이 끊겼다가 돌아왔다. 온몸 구석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스텔라를 이기고 싶다고, 그렇게 강렬히 바랐을 때 무언가 내게 응답을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미처 깨닫기도 전에 고통이 한 발 더 먼저 다가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 주저앉았는지 손바닥에 까칠한 흙 자갈과 달아오른 지면의 열기가 느껴졌다.

아른아른하게 짜 맞춰진 초점을 통해 바라본 시야는 평소보다 넓었다. 이 시야가 의미하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세계수의 힘이 깃든 만물의 눈이 활성화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저마다의 영혼의 크기를 나타내는 빛으로 보였다.

그그그그….

평소보다 배는 예민해진 청각이 땅 아래의 기이한 울림을 잡아냈다. 연계 그래프트를 써 가며 그토록 땅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건만 모두 한 줌 재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땅이 맞붙고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틈새로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땅과 땅 사이에 엮여 있는 금빛 줄기들이 보였다. 벌어진 지반을 끌어당겨 맞추고 있는 건 저 줄기의 공로가 분명했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마치 온몸이 땅에 붙박인 것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영영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지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까지 들었다.

나를 필두로 발현한 힘이 스텔라의 힘에 맞서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그건 내가 경험했던 가장 강력한 기운인 엘더와의 그래프트 때보다 강렬했고 거룩하게 느껴졌다. 무언가 내 몸을 빌려 멋대로 휘두른다는 느낌도 받았지만 그걸 안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없는 건 없었다.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그 강한 힘이 이런 방식으로밖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머릿속을 간단히 리셋시키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나니 오히려 정신이 맑게 갠 기분이다. 그동안 초조함에 내쫓겨 내가 아닌 것처럼 생각이 깊게 곯아 있었다. 결국엔 순수하게 내 것이 아닐 이 힘을 일깨운 것도 제정신이었다면 의심하고 경계했을 텐데….

길드전을 이기기 위해, 당시 내 상황의 약세를 이겨 내기 위해 수많은 계획들을 준비했었다.

그중 인페르노를 끌어들여 아스키아에겐 공동의 적을 만들고 덤으로 그들의 전력을 이용해 인페르노의 한 세력을 일망타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 계획에 애쉬는 몰라도 적어도 스텔라급의 대단한 간부가 올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인지했어야 했다.

설마 뭍밑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이들이 이토록 강하게 반응해 올 줄은 몰랐지…. 그래.

하지만 그 반향 역시 내 힘으로 해결했어야만 했다. 벼랑까지 내몰리는 상황에서도 현실적으로 생각을 했어야만 했다. 날 놔 버리고 초월적인 기적을 바라는 것, 그건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망부석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주변에는 신성한 금빛의 힘이 날뛰고 있었다. 땅을 붙드는 걸로 모자라 열기를 잠재우고 쓰러졌던 이들을 일으키고 격려하는….

분별도 없고 주제도 없는 힘들이 마구잡이로 날뛰며 폭주하고 있었고 내 감각도 이처럼 산산조각 나 사방에서 겉돌고 있었다.

이곳에 분명 내가 존재하는데 존재하고 있지 않은 듯한…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정신만 붕 뜬 채 신체가 내 것이 아닌 껍데기처럼 느껴졌다.

뒤늦게 실새삼의 경고가 떠올랐다. 다이아 제로 그래프트 이후 정신만 붕 떴을 때 그가 경고했었지. 세계수가 내게 기생하고 있는 형태라고 했었다. 그때 그런 말을 들었으면서 왜 여태껏 그 점을 경계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기생의 대표 격이 되는 실새삼이 곁에 있었으니 그 말로는 잘 알았다. 결국 내 육체를 뺏길 수도 있다는 게 아닌가? 공생하는 관계도 있지만 결국 주도권 싸움이었다.

그리고 난 지금 주도권을 뺏겼다.

내가 갑자기 강한 힘을 각성한 것이 아니다. 세계수가 내게 강림해 내 바람대로 힘을 휘두르고 있던 것이다. 드라이어드와 영혼의 연결을 할 때조차 내 영혼의 크기를 고심해야 할 정도인데, 그보다 더 대단한 세계수를 담은 내 영혼은 어떻게 됐을까?

실새삼이 정신은 육체와 영혼을 연결하는 중요한 다리라고 했었다. 완전히 날아가 버릴 뻔했던 내 정신을 실새삼이 간신히 붙들었을 때, 영혼이 아주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멀쩡히 사고할 수 있으나 내 의지로 육체를 움직일 수 없는 지금….

내 영혼의 상태가 어떨지 차마 짐작도 가지 않았다.

“제희….”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다. 본명을 알고 있으니 길드원들이 아니면 내 드라이어드일 것이다. 이곳에서만큼은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이름을 부를지언정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게 느껴졌다. 내게서 발산하는 힘은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 힘은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이로운 힘이면서도 동시에 공조를 거부하는 힘이기도 했다. 그럴 만했다. 어떠한 도움도 필요 없이 오롯이 절대적인 힘이었다.

누군가 다가와 말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 모습을 누구도 보지 못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너무나도 쉽게 다른 존재에게 기대고 만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스텔라로 인해 망가진 주변의 복구 작업이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만 그만큼 스텔라의 발악도 갈수록 강해졌다.

그러자… 느껴졌다.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이로운 힘이지만, 그것이 대를 희생시키는 존재를 대할 땐 바뀐다는 것을. 나무의 수액을 빨아먹고 병을 옮기는 병해충도 다 같은 생명이지만 퇴치해야 될 존재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내게 깃든 세계수의 힘은 이 재앙의 원흉인 스텔라를 없애려 하고 있었다.

사방에 흩어진 수많은 내 시선 중 하나가 스텔라와 눈을 마주했다. 그 시선 속에 담긴 본질을 눈치챈 스텔라의 눈빛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흉흉하게 물들어 갔다.

그제야 그녀를 이토록 날뛰게 하는 근본적인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계수에 대한 증오. 인페르노의 설립부터 그녀의 모든 여정에 세계수에 대한 증오가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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