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5화 (425/604)

덩치가 커져도 종종 보이는 아이 같은 모습에 바곳을 보면 항상 초봄의 봄바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봄의 따스한 기운을 담고 있으면서 가끔 아직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 겨울의 찬바람이 종종 섞여 들어온다. 마치 완연한 봄이 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겨울의 흔적처럼, 바곳이 급속도로 성장한 바람에 내면의 어리광쟁이를 떨쳐 내지 못한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무언가를 하려는 바곳의 모습을 보고 그를 닮은 어떠한 바람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낯선 느낌이 들었다. 색채로 표현하자면 완전한 무채색. 더불어 그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거운 위압감까지 느껴졌다.

“제이 님, 운명을 바꾼다는 건 아주 중대한 일이에요. 운명은 결국 제이 님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밑바탕으로 만들어진 거니까요.”

바곳이 말하는 운명이란, 그동안의 내 여정이 초석이 되고 토대가 되었기에 앞으로 건설될 완성본의 형태까지 잡혀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내가 벽돌을 쌓았다면 앞으로 완성될 건물은 벽돌 건물이 될 것이고 높게 기둥을 올렸다면 고층 건물이, 낮은 기둥 위로 지붕부터 올렸다면 저층 건물이 될 예정인 것이다.

“그러니 제이 님이 원하시는 대로 운명을 바꾸려면….”

바곳이 스태프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앞으로 내밀었다. 바곳은 민들레꽃씨가 박혀 있고 청보라 색의 각시투구꽃이 대롱대롱 매달린 스태프를 사용해 왔었다.

우웅.

그런데 바곳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처럼 스태프의 외형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스태프 주위를 새까만 빛이 아롱아롱 감싸더니 이내 끄트머리에 기다란 날이 생기고 전체적인 길이도 훨씬 길어졌다.

각시투구꽃의 꽃줄기가 전신을 휘감은 봉의 끝엔 새까만 보석을 세공하여 만든 것과 같은 커다란 반원형 날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무기가 스태프에서 거대한 낫으로 바뀌었고 무기를 든 바곳의 모습 역시 마법사에서 사자의 영혼을 데려가는 사신처럼 바뀌었다.

“지금까지 걸어 왔던 길을 다시 걸어야 하는 것과 같아요. 정말 그래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어요?”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묻어 나왔다.

바곳은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나의 사자, 정확히 말해 운명의 실을 끊어 내는 사자였다. 그의 말이 으스스하게 들렸지만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 보면 그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리셋… 그러니까 초기화구나.”

생각해 보면 아주 당연한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게임으로 치면 캐릭터 삭제 후 다시 키우는 것만큼 다른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그렇다고 바곳이 제시한 방법이 지금의 날 죽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런 방법을 바곳이 내게 담담히 제안할 리 없었다.

내게서 끊어 내야 할 운명은 내 목숨이 아닌 세계수와의 연결이었다. 완성된 건물에 세계수가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틀을 바꿀 필요가 있는 거다.

“좋아. 난 다시 할 수 있어.”

내 여정은 정말로 세계수의 대리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세계수와 많이 그리고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세계수는 마치 퀘스트 제조기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을 끊임없이 제시해 주었다.

난 세계수가 필요로 하는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많은 일들을 완수해 왔다. 더구나 세계수의 힘을 빌린 적도 많았다. 아예 가드닝 스킬 자체가 세계수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지.

“내겐 세계수의 가호보다 더 대단한 게 있거든.”

애초에 내겐 겨우 신의 힘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무한 다이아>가 존재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겁 없이 다이아를 휘두르는 일, 이것이야말로 나만의 초현실적인 권능이었다.

생각해 보면 괘씸하기도 하지. 내가 <무한 다이아>로 얼마나 살뜰히 보살펴 줬는데 기회가 생기자마자 날 화분처럼 써먹어?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그 길이야 말로….”

내가 걸어온, 내가 이룩한 나의 업적, 모두가 경외할 만한 대단한 업적. 나를 특별하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업적들이 사라진다.

누군가는 포기하기엔 아깝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잃었을 때 허탈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잃기 두려운 길은 너희와 함께 걸었던 길이야.”

내게 소중한 건 신이 아니라 나와 함께 걸어 준 내 동료들이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것은 내가 더 이상 그들과 함께 길을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세계수에게 날 빼앗기면 여기서 엔딩이었다. 그것만큼은 싫어.

내 대답에 바곳이 내뿜던 위압감이 모두 무너졌다. 그는 이전의 봄바람 같은 드라이어드로 돌아와 해맑게 웃었다. 마치 내 대답이 그 안에 자리하고 있던 의심과 중압감을 모두 날려 버린 것처럼.

“제게 섞인 모체의 신화는 운명의 실을 끊어 내는 자. 단순히 죽음으로써 앞길을 끊어 내는 것이 모체의 신화였다면 당신만의 꽃인 나의 신화는…. 내 주인의 새 운명으로의 출발을 응원하는 자입니다.”

주변 지역에서 식물의 새로운 ‘신화’가 탄생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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