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6화 (436/604)

발신자가 원망의 대상인 나라는 걸 알아차린다면 스텔라는 결코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그녀가 관심을 보일 수 있는, 간신히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 소재가 필요했다.

베스탈리스들의 인생에서 절대 떼어낼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의 수가 보다 더 번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샘의 원천이었다. 내면의 불씨가 날 뛰는 것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전생을 체험하며 나 스스로 생명력을 이용해 샘의 원천을 만들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어떤 이유에선지 끝없이 솟아나는 무한 다이아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

물의 기운을 응집하여 그녀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자…. 반응이 있었다.

격렬히 거부하며 날뛰던 화염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나의 초대 요청을 수락해 주었다.

그녀의 기억과 감정을 엿보느라 불확실한 안개 같았던 주변의 공간이 선명한 붉은 빛을 띠며 바뀌어 갔다.

나와 스텔라는 사방이 불구덩이로 둘러싸인 텅 빈 공간에 서로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실새삼의 연리지 효과가 발휘되어 우리의 마음이 이어진 순간이었다.

다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걸 봐서 여기서 타협이 실패한다면 둘 중 하나는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져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마음이 이어졌다 하더라도 이 상황이야 말로 그녀와 나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뜻하는 거겠지.

마치 내가 도둑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와 닿았다.

“그게 왜 너에게 있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공간에 위치한 우리 둘이 갑자기 정신을 공유하는 순간이 찾아왔는데, 그녀는 전혀 당황하지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녀는 그만큼 정신적으로도 내몰리고 있단 뜻이었다.

나를 마주 보는 스텔라는 발끝부터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기억을 통해 베스탈리스들의 최후는 평범한 인간들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내면의 불씨가 결국 모든 영혼을 집어 삼키며 한줌 재 가루가 되어 버리는 것이 그들의 최후였다.

그리고 스텔라 역시 베스탈리스다운 최후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다만 그녀가 완전히 불씨에 제 영혼을 맡긴 탓에 그 최후는 무척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섣불리 당신의 모든 걸 이해한다며 감정에 호소하며 접근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위로가 필요한 게 아닐뿐더러 드루이드인 나와 베스탈리스인 스텔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으므로 고작 몇 개의 정보를 알았다고 그간의 고충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불타 버린 감정에 지친 그녀에게 나의 상황을 늘어놓으며 쌍방 이해를 이끌어내는 과정 역시 그녀는 전혀 원치 않을 것이다. 설령 스텔라가 받아들인다 해도 더욱 지칠 것이 뻔했다.

지금 우리에겐 개인간의 다툼을 화해하기 위한 담백한 대화 같은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신은 알고 있나요? 이건 세계수가 당신들 베스탈리스를 위해 안배한 요소예요. 샘의 원천 맞죠?”

세계 곳곳에 마르지 않는 샘물, 미미르의 이름이 유래된 그 미미르의 샘을 만들어 내는 샘의 원천. 그렇기에 후대에 불씨를 안고 태어날 남자아이들을 위해 베스탈리스들이 기를 쓰고 독점하여 지켰었다.

“샘의 원천은 세계수의 생명력, 아니 축복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에요. 세계수는 베스탈리스가 선택적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종족 보존을 위해 미미르의 샘을 퍼뜨려 왔던 거예요.”

이것이 전생을 체험하며, 내가 샘의 원천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깨달은 진실이었다.

아주 오래전 과거에는 이런 미미르의 샘이 없었다고 들었다. 그러니 불씨를 영혼에 품고 태어난 남자아이는 열기를 이기지 못해 모두 죽었고 베스탈리스는 오직 여자만 존재한다는 설이 생겼지.

하지만 언제부턴가 미미르의 샘이 나타났고 불씨의 힘이 약한 경우 이 샘의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남자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베스탈리스들의 입장에선 어쩌면 세계수를 원망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선택적 탄생이라는 좋지 않은 사정과 불의 침입으로 인한 세상의 핍박적인 시선을 견뎌야만 했는데, 그 반대편에 모두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축복받은 존재인 드루이드가 있었으니까.

세계의 유일신에게 기대하고 바라고 애원했겠지만 나아지는 건 없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믿고 있던 것과 다르게 세계수는 미미르의 샘을 퍼뜨리면서 근본적인 도움을 주고 있었다.

내 말을 들은 스텔라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와그작 일그러졌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이제 와서 베스탈리스들에게 세계수를 섬기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냐? 세계수가 신도인 네게 숭배할 자들을 모아오라고 한 것이냐?”

“당신이 아직 늦지 않았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어요. 당신은… 밝게 빛나는 별, 영웅이 되고 싶었던 거 아닌가요?”

난 그녀가 불타는 감정에서 먼저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내가 그녀와 상호작용할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인식시켜 지금처럼 조금만 뒤로 물러나도 불구덩이로 빠지는 관계를 완화시키는 거다.

그녀의 기억을 엿봤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그 말에 스텔라의 눈빛이 무척 치욕스럽다는 듯 활활 타올랐다.

“감히….”

“진실로 베스탈리스가 세계에 해를 끼치는 존재들이라면… 세계수는 샘의 원천을 퍼뜨리지 않았을 거예요. 정말 해롭다면 멸망을 향해 등 떠밀었겠죠.”

그들을 퇴치 대상으로 봤다면 불을 해치우라며 드라이어드들을 내보낸 것처럼 무찌를 방안을 세계수가 내놓았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릇인 내게 쏘아지던 스텔라의 불을 공격 의도로 받아들이지 않고 막지 않았던 것처럼, 세계수에겐 베스탈리스의 불은 몬스터 불과 다르게 순수한 원소인 불로 여겨질 뿐이었다.

“미미르의 샘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당신들이 이 세계에 평범한 구성 요소, 드루이드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걸 뜻해요.”

이 세계의 현시대 유명한 영웅들은 전부 드루이드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불로 혼란한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 주목받고 추켜세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불을 무찌르는 것만으로도 찬양 받으니 평범한 사람들보다 공을 세우기 쉬웠다.

하지만 세계를 멸망시켰던 존재 또한 드루이드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결코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일을 저지른 드루이드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드루이드에 대해 우호적이다.

하지만 베스탈리스는? 인페르노의 존재가 수면 위로 올라오고 곳곳에서 베스탈리스 과격파들의 화재 범죄가 터져 나오니 세상의 인식은 그렇지 않아도 낙인찍힌 존재들을 향해 더욱 더 나쁜 감정을 가질 터였다.

그런 감정이 곪아 버리면 베스탈리스에 대한 인식 변화는 싹이 트기도 전에 죽어 버리겠지. 베스탈리스도 세상의 구성원임을, 그들도 드루이드와 다를 바 없이 영웅이 될 수 있는 그릇임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당신은 자꾸만 자신들을 갉아먹는 반목을 취하는 강경파 베스탈리스들을 달래고 진정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존재. 미미르의 샘의 존재가 널리 퍼진다면, 세계수가 일부러 베스탈리스들을 위해 안배한 장치에 대해 널리 퍼지면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베스탈리스들을 핍박하던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지 깨달을 거예요.”

미미르의 샘의 존재 자체가 베스탈리스의 불은 몬스터 불과 다르다는 증거, 퇴치해야 될 대상이 아닌 공존해야 할 대상이라는 증거였다.

“대놓고 베스탈리스를 비난한다면 그거야말로 베스탈리스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쓴 세계수를 모독하는 일이 될 테니까요.”

유일신을 향한 신성 모독, 이단 감찰단까지 만들어 감시하는 자들이 견딜 수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을 옭아매던 족쇄 같은 핍박이 갑자기 사라진다고 죄인처럼 숨어 살던 베스탈리스들이 하루아침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지금까지 외면하던 사람들이 손을 내민다고 그게 곱게 보일까요? 베스탈리스들을 독려하고 선두에서 이끌며 그들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할 테고 그 존재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나와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네가 하는 모든 발언들이 너희들이 그토록 공정하다고 여기는 1번째 테라리움에서 사형으로 다스릴 수 있는 발언이란 걸 모르지 않겠지?”

물론 편견을 넘어서 핍박의 반증으로 생명을 유린하고 범죄를 저지른 베스탈리스는 응당 벌을 받아야 할 테지만.

범죄를 수단으로 앞세운 인페르노도 해체의 길을 밟아야 하며 조직에 동화되어 나쁜 쪽으로 물들려는 자들은 막고 이미 죄를 저지른 자들도 경중에 따른 벌을 받아야만 했다. 스텔라도 인페르노에서의 행보를 따져보고 벌을 받아야만 한다.

다만 그 길을 좀 더 다수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방법의 구현을 위해 잠시 유예를 시킬 뿐이지.

스텔라의 타오르는 감정이 조금씩 약화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전 그 존재가 당신이라고 봐요. 당신은 이 모든 세상의 영웅 같은 거창하고 복잡한 자리를 노릴 필요가 없어요. 베스탈리스들의 영웅이 되는 것, 베스탈리스야 말로 당신이 살던 세상이고 베스탈리스 또한 이 세상의 일부이니 조금은 다른 의미의 세상의 영웅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강경파 베스탈리스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빛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사람.

“어린 것이 주절주절 쓸데없이 말이 많구나.”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녀 입장엔 나는 1번째 테라리움이 압박한다면 벌벌 떨 수밖에 없는 위치의 존재로 보일 테니까. 내 발언은 아직까지 영향력이 부족하다.

“그런데 샘을 만드는 조치까지 취해 놓고 아무도 모르게 내버려둔 세계수의 선택은 미련하다고 생각해요. 오랜 시간 지속된 신의 침묵이 야기해 낸 결과가 지금의 베스탈리스가 아닌가요?”

드루이드를 향한 눈에 보이는 가호처럼, 적어도 샘을 세계수가 내놓은 것이라 스스로 공표만 했어도….

“그러니 전 당신이 아직도 영웅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드디어 그 기회가 찾아와 잡는다 하더라도 세계수가 시켜서, 세계수를 위한 영웅 따위는 되지 말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런 멍청하고 이기적인 신 따위….”

“넌 세계수의 대리일 텐데?”

“아뇨, 전 대리 따위가 아니에요.”

갑작스레 세계수를 모독하는 나의 발언에 스텔라는 황당하다는 눈을 했다. 지금까지 세계수의 업적을 늘어놓고는 그런 말을 하니 어이없을만 했다.

“선택받은 존재라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선택해 놓고 왜 지금까지 당신을 내버려두는 미련한 짓을 한 거죠?”

좀 더 일찍 그녀를 찾았다면 인페르노도 이토록 악화되진 않았을 텐데. 어쩌면 스텔라를 계기로 베스탈리스가 좀 더 빨리 밝은 곳으로 나올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텔라를 알아봐 줄 누군가가 나타날 거라고 했던 건… 아마도 그녀가 동료가 된다면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되어 시너지를 일으킬 거란 뜻이겠지. 그 신언(神言)이 가지는 근본 적인 의도는 화합일 것이다. 베스탈리스가 포함된 궁극적인 팀.

“나는 말했듯이 세계수의 대리인 따위 될 생각이 없어요. 전 세계수와 같은 위치의 신이 될 거예요. 필요하다면 세계수를 끌어내릴 수도 있는.”

“그런 자만심에 가득 찬 허황된 소리는 더는 못 들어주겠구나. 내가 말장난이나 하자고 이 대화를 참아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이 샘의 원천을 더 자세히 살펴봐 주세요. 정말 당신이 알고 있던 그 샘의 원천이 맞나요?”

스텔라가 마음의 연결을 응하게 된 계기인 샘의 원천의 기운.

애쉬를 위해 직접 많은 샘의 원천을 삼켰고 주변의 베스탈리스들의 탄생을 봐왔으니 그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이 원천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이 세계수의 것이 아닌 바로 나의 것이란 걸.

“당신을 불러 놓고 오랫동안 찾지도 않은 신 따위는 잊어요. 나는 어때요?”

더 나은 길을 찾아봐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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