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7화 (447/604)

내 물음에 에트나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아까 본 그 작은 정령이 드라이어드처럼 특별한 능력을 사용한다거나….”

“제가 데리고 있을 땐 다이아를 만들었지만 현재 당신께 있는 정령은 영혼을 치유하고 있어요. 방식이 통용되는 치유 행위와 거리가 멀긴 하지만…. 화기로 인해 다친 부위를 캐내서 결정화를 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캐자마자 바로 가치가 있는 다이아와 다르게 현재는 그 결정이 당장은 무가치하다는 설명도 함께했다. 덧붙여 난 그 결정에 어떻게 해야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지 추측되는 행위를 제시했다.

“이렇게 추측만 할 것이 아니라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떨까요? 직접 보여 드릴게요.”

난 실내에서 탁상공론만 논하던 것을 멈추고 이들을 야외로 이끌었다. 바로 몬스터 불이 돌아다니는 밖으로 말이다.

60번째 테라리움의 주변은 폭주한 세계수의 힘이 한바탕 휩쓴 탓에 몬스터 불이 전무했다. 불은 불을 부른다고, 아직 정화하지 않은 포르낙스의 힘을 빌려 몬스터 불을 끌어왔다.

성질이 비슷하기 때문일까? 불은 동족의 몬스터 불이 아니라도 화재와 같은 큰불엔 이끌려 오곤 했다.

“베스탈리스 영혼의 진정한 힘은 불을 정화하는 데에 있어요. 하지만 이론은 깨달아도 실제로 목도한 적은 없어요. 저는 결정이 무가치한 이유, 그것이 아직 베스탈리스가 진정한 힘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했고 힘을 펼친다면 변화가 생길 거라 예상해요.”

“정화의 힘이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 걸까요? 이전까진 베스탈리스는 불을 상대할 때 압도적인 무력으로 찍어 누르든가 회피하는 것이 고작이었지요.”

걱정스러운 어투로 말하면서도 에트나는 손목을 풀며 비장한 표정으로 앞섰다. 눈빛은 이미 불을 때려잡는 드라이어드 못지않았다.

그들이 정화의 힘을 가졌다는 건 알았어도 어떻게 그 힘을 써야 하는지는 나 역시 알지 못했다. 정화의 힘은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는 걸까? 중독 디버프를 해제하는 드라이어드 기술처럼 주변이 기운을 살포하는 방식일까?

“늘 하던 대로 주특기를 사용해 보면 되겠지요?”

에트나가 손을 내뻗자 그녀의 손바닥에서 피어난 작은 화염이 순식간에 몸집을 불리더니 이내 화염 방사기를 쏜 것처럼 몬스터 불을 향해 뿜어졌다. 주특기라면 역시나 베스탈리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화염 다루기였다.

처음 봤다면 에트나의 강한 힘에 놀랄 법도 했지만 애쉬와 스텔라의 화염 기술을 잇달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은 덤덤했다. 그러나 재해급의 위력을 펼쳤던 둘과 비교하면 소소해 보여도 에트나 역시 일반적인 베스탈리스들보다 훨씬 강한 화기를 다뤘다.

시험용으로 끝날 줄 알았던 화염 방사는 예상과 달리 놀라울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보통의 화염이라면 몬스터 불에 타격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마치 어망에 걸린 물고기처럼 덮쳐 오는 화염을 뒤집어쓴 몬스터 불은 바르작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축구공만 한 크기가 화염을 맞은 직후부터 점점 줄었고 1분여의 시간이 흐르자 불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드라이어드의 스킬을 맞았을 때보단 즉발성이 떨어졌지만 확실히 불을 퇴치한 것이다.

“세상에!”

“정말로 어머니께서 불을 해치웠어…!”

“여보!”

이 모습을 본 모두가 놀라 소리쳤다. 보호 차원으로 동행했던 데이지도 세계수의 축복 없이 소멸한 불에 엄청난 흥미를 보이며 짝 손을 맞부딪혔다.

“제희 님, 보셨어요? 불이 사라졌어요!”

데이지는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처음 불을 잡았을 때처럼 기뻐했다.

난 미약하게나마 드라이어드가 불을 퇴치하는 다른 존재에 대해 괴리감이나 투기의 감정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염려했었다. 드루이드와 마찬가지로 드라이어드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몬스터 불로부터 인류를 지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이지에게선 오직 순수하게 기뻐하는 감정만 느껴졌다. 그리고 오히려 동류를 향한 반가움까지 느껴졌다.

펑!

불을 퇴치한 에트나에게서 기이한 변화가 생겼다. 그녀의 눈앞에 폭죽 소리와 함께 둥글고 새빨간 보석이 나타난 것이다. 다이아 정도의 크기에 기시감을 일으키는 보석…. 설마?

“이건…?”

에트나는 제 눈앞에 나타난 보석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 추측이… 맞아 들었어요!”

이번엔 에트나가 정화의 힘으로 불을 잡았을 때보다 더욱 기쁜 마음이 들었다. 저건 난쟁이가 캐낸 새까만 구슬 형태의 결정이 변모한 형태가 분명했다.

“불을 정화하며 가치가 없던 결정에 어떠한 가치가 생긴 게 분명해요.”

에트나는 내 말에 빙그레 웃으며 붉은 구슬을 내게 보여 주었다.

“이제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 알려 주세요.”

난 에트나에게서 붉은 구슬을 받아 아티팩트에 있는 난쟁이에게 물어봤다.

“이걸로 뭘 할 수 있어?”

[주인님! 그 따뜻한 보석을 제게 주세요! 많이많이 주세요! 많이 모으면 창고와 광산의 크기를 늘리고 장비를 강화하고 수레도 만들 수 있어요!]

그 말에 모든 걸 이해했다. 에트나에게 이식된 난쟁이 아티팩트는 <무한 다이아>의 복사판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단순히 광산을 캐서 다이아를 모으는 방치형 게임에서 장르가 살짝 변환된 게임이지만.

난쟁이가 곡괭이질을 하면 강화 가능한 결정들이 생성되고 에트나가 불을 정화하여 힘을 축적하여 결정에 가치를 부여한다. 그렇게 완성된 붉은 결정들로 다시금 더 많은 결정들을 캐낼 수 있도록 아티팩트를 강화하는 것이다.

광산의 크기가 늘어난다는 건… 어쩌면 지금은 하나의 난쟁이만 보유할 수 있지만 갈수록 더 많이 보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내가 드라이어드를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COST를 늘리는 것처럼 붉은 결정을 잔뜩 모아 난쟁이 아티팩트의 COST를 늘리는 거다.

난 내가 알게 된 사실을 에트나와 그 가족들에게 알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건 즉, 제가 불을 많이 정화하면 할수록 제 영혼에 더 이득이 된다는 말 아닌가요? 더구나 뭔가 키우는 느낌도 들고 수집 욕구도 자극하고… 불을 해치워야 한다는 정의감을 넘어서 재미가 저를 움직이겠네요.”

모바일 게임 개념이 없는 곳이다 보니 단번에 게임으로 접근하진 못했지만 얼추 비슷한 흥미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 조금 아쉽네요. 매번 이렇게 당신께 설명을 들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난쟁이와의 소통은 나만 가능하단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 늘 난쟁이를 데리고 있어야 하는 에트나가 막막할 법도 했다.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손목의 아티팩트를 향해 붉은 결정을 건네며 말했다.

“나도 말이 통했으면 좋겠는걸.”

그때 아티팩트 속 난쟁이가 결정을 향해 두 팔을 쭉 뻗다가 갑자기 손을 붕붕 흔들었다. 그러곤 손가락을 두 개 펼쳐 보였다. 설마…? 지금 튜토리얼 같은 게 진행 중인 건가? 너… 퀘스트도 주니?

에트나 역시 난쟁이의 손가락이 의미하는 걸 눈치챘는지 두 눈을 크게 떴다.

결정이 두 개면 소통의 어려움이 해결된다는 거겠지…?

그 이후로 에트나는 정말 열심히 몬스터 불을 사냥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마치 내가 뉴비 시절 초보자 사냥터를 찾아 헤집고 다니던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단순히 당초 예정된 나와의 공적인 만남을 예상하고 정장을 차려입고 왔었는데 사방을 뛰어다니고 불을 쏘고 다니느라 옷이 잔뜩 구겨지고 더러워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새로운 즐거움을 알게 되어 도취된 것도 있지만 어느 정도 해방감도 작용하고 있었다. 베스탈리스의 새 출발이 움트는 순간.

붉은 결정을 모아 난쟁이와 자체 소통 능력을 개화하고 창고도 만든 에트나는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내게 수없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새로 태어난 기분이에요.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려요. 드루이드들이 여행을 떠날 때 이런 느낌이었겠군요. 정말 즐거워요.”

내내 타이밍만 재고 있던 포르낙스도 영혼 치유 이후 아티팩트를 만들어 난쟁이를 분양받았다. 난 마치 과수원의 드루이드에게 드라이어드 열매를 내어 주는 세계수 가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에트나의 난쟁이 분양 때와 달리 포르낙스의 난쟁이 분양은 상당한 소란이 일었는데, 난쟁이들이 서로 자기가 가겠다며 아우성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더 잘할 수 있다며 막무가내 어필을 하며 포르낙스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녀는 작은 난쟁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자신을 향해 팔짝팔짝 뛰는 걸 무척이나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제… 제가 고를 수 있는 건가요?”

“그게 합당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혹시 저 정령이 제게 뭐라고 하는 건가요?”

“태어나기를 민첩하게 태어나서 자신을 선택하면 처음부터 채광 속도가 다른 난쟁이들보다 두 배는 더 빠를 거래요.”

“저… 저 정령은요?”

“태어나기를 튼튼하게 태어나서 쉽게 지치지 않는다는데요? 아니 너희 원래 안 지치지 않아?”

“저건요?”

“태어나기를 똑똑하게 태어나서 특별한 장치들을 더 많이 연구할 수 있다고….”

포르낙스는 결국 대체 누굴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며 울상이 됐다.

드라이어드의 특성처럼 공격형, 회복형, 방어형, 지원형으로 세부적으로 나뉘진 않지만 그래도 비슷하게 난쟁이들의 특색이 갈렸다. 서로 어필하는 걸 분류해 보자면 민첩형, 체력형, 지식형 등등이려나….

나야 내 <무한 다이아>에선 모든 난쟁이들의 특색이 무한 평준화기 때문에 솔직히 특색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입고 있는 코스튬만 조금씩 다를 뿐….

아니 그런데 다이아를 캐서 내게 진상하는 것이 난쟁이들의 최고의 기쁨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날 버리고 다른 이에게 가려고 한다고?

물론 내 <무한 다이아>는 난쟁이 제국이 있기 때문에 난쟁이 수도 무한이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주인님, 주인님 하며 나만 따르던 이들이 다른 이를 갈구한다는 건 조금 서운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주인님! 제가 선택됐어요! 열심히 일해서 선물 많이 만들게요!]

결국 포르낙스에게 선택된 민첩형 난쟁이가 행복한 얼굴로 방방 뛰어가면서 저렇게 말했다.

“선물?”

연유를 묻는 내게 난쟁이들이 에트나에게 간 난쟁이의 우편함이라며 내게 빨간 상자를 보여 줬는데, 그 안엔 다이아가 들어 있었다. 딱 에트나가 벌어들여서 난쟁이에게 사용한 붉은 결정 수만큼 말이다.

“설마 에트나가 붉은 결정을 벌면 내게….”

내게도 다이아가 쌓이는 구조인 건가? 이 무슨 다단계도 아니고.

왜 남의 집까지 가서 내게 다이아를 벌어다 주고 있는 건데?

결국 다른 이에게 가고 싶어 했던 이유는… 자리 경쟁이 심한 광산을 떠나 새로운 취업처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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