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9화 (459/604)

포인세티아가 가리키는 땅 밑을 보며 생각했다. 계속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입구를 찾느니… 발아래가 전부 땅굴이라면 차라리 강제로 입구를 뚫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땅굴이라고 하니 문득 땅 아래에 파묻혔던 인삼 군락지가 떠올랐다. 그땐 일부러 땅 아래에 군락지를 만든 것이 아닌 공사로 인해 강제로 파묻혔던 것이지만 축축하고 서늘하며 흙냄새가 자욱하게 풍기던 그 장소가 아직도 선명했다.

혹시 이번에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땅 아래 파묻히게 된 건 아닐까? 강제로 땅 밑으로 내쫓겼다거나….

“구멍을 뚫자.”

내 결정에 룽카가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어차피 저흰 누군가에게 들켜선 안 된다거나 몰래 잠입해야 하는 의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오히려 들키지 않으려 용을 쓰는 쪽은 우리가 아닌 어쩌면 적일지도 모르는 다른 이들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구태여 조심조심 행동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그토록 주변을 주의했던 건 아직 정체를 모르는 적에게 언제 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경계 때문이다. 차라리 적들이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이쪽에서 과감하게 쳐들어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메스키트, 도와줘.”

지반을 거칠게 다루는 데에는 메스키트만 한 드라이어드가 없었다. 그녀는 어떠한 땅 위에서도, 아무리 단단한 땅일지라도 사막의 모래처럼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제희, 그대가 원한다면 무엇이든지.”

아티팩트 밖으로 나온 메스키트가 랜스의 끝을 땅을 향해 조준하며 말했다.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랜스 끝엔 파괴적인 힘이 응집되어 있었다.

“너무 심하게 하면 지반이 전부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을까?”

포인세티아는 마치 하늘 위로 날아오를 듯 가볍게 땅 위에서 폴짝폴짝 뛰면서 메스키트를 바라봤다. 그녀가 땅 위에 발을 딛고 선 메스키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꼭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을 보는 듯했다.

“충격에 대비하세요.”

내 말에 룽카는 재빨리 자신의 드라이어드를 불러냈다.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간 넘어진단다. 작은 꽃들아.”

메스키트는 짝다리를 짚고 선 민들레 아이들에게 아주 짧게 경고하곤 땅을 향해 냅다 랜스를 내질렀다. 그러자 우르릉, 하고 벼락 치는 소리가 짧게 들리더니 순식간에 우리가 딛고 선 지반이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땅굴의 크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우린 땅이 무너짐과 동시에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포인세티아는 떨어져 내리는 돌과 흙덩이 위를 징검다리 건너듯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속수무책으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는 민들레 아이들을 낚아챘다.

데이지는 메스키트의 랜스가 꽂히기 직전 날 끌어안고 손에서 줄기를 뿜어내 추락에 대비했다.

이 땅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지상 위의 것들이 불에 타 잿더미가 깔리고 그 위에 다시 흙과 잿더미가 깔리는 것을 반복했는지, 땅이 아주 진하게 탄내를 품고 있었다. 청량한 흙냄새가 아닌 케케묵은 냄새가 까마득한 공허 아래서 상승 기류를 타고 훅 올라왔다.

한치 아래도 보이지 않은 짙은 어둠 속을 룽카가 안고 있는 푸른 램프의 빛과 드라이어드들의 바크에서 반사된 빛이 반짝거리며 밝혔다.

쿵! 쿠쿵!

꽤 오래 떨어지다 마침내 그 끝에 도달했다. 여기저기 안전히 착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볍게 뛰어내리는 데이지와 나를 메스키트가 여유롭게 두 팔로 안아서 받는 것을 마지막으로 지상 위의 모든 이들이 땅굴에 도착했다.

“콜록, 콜록. 행동이 너무 거침없는 것 아닙니까?”

룽카가 항변하며 말끝을 조금 떨었다. 그는 자신의 드라이어드에게 부축을 받은 채 잔뜩 지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와, 땅을 밟는 느낌이 이상하지 않아?”

포인세티아는 그런 그의 항변을 가볍게 무시하며 추락 감상평을 말했다. 그녀의 양팔엔 룽카의 얼굴과 다를 바 없이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는 민들레 아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잘 봐 봐. 땅에 뭔가를 했어.”

난 메스키트의 품에서 내려와 땅을 살폈다.

“세상에… 포장되어 있잖아?”

인삼 군락지처럼 죽은 풀이 쌓여 있거나 통째로 흙을 퍼내 날것의 흙바닥이 깔려 있을 거라 상상했는데 전혀 예상외였다. 바닥은 마치 건물 내부처럼 판판한 돌들이 깔려 있었다. 돌판이 맞물리는 지점이 균일하고 높낮이도 일정하여 굉장히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건… 단순한 돌의 무늬가 아닌데?”

좀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램프의 빛을 빌려 바닥을 비췄다. 그러자 일정한 패턴이 보였고 복잡한 문양이 아주 세심하게 조각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이렇게 공들여 문양을 새겨 넣은 바닥은 어딘가 낯익었다. 과수원의 온실 바닥에도 이처럼 알 수 없는 기이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으으… 소름 끼치는데요.”

나와 함께 바닥을 살피던 룽카가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난 그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 소멸된 테라리움 아래 이런 기이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을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파앗.

갑자기 손목에 채워진 아티팩트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내 드라이어드가 필드로 나올 때의 조짐이었다. 내가 직접 부르지 않았음에도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바곳이었다.

“어라? 바곳?”

내 부름에 바곳은 아주 곤란한 얼굴이 되어 날 바라봤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거대한 낫을 가볍게 흔들었고 찰각찰각 하는 쇠사슬 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그러자 허공에서 눈부신 금빛이 터져 나오며, 거대한 낫에서부터 시작된 쇠사슬이 칭칭 옭아매고 있는… 또 다른 나, 제이가 나타났다.

“아….”

“드루이드님이 둘….”

이렇게 나와 제이를 동시에 마주하는 건 처음인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깜짝 놀라 짧게 침음을 터뜨렸다. 특히나 제이를 바라보는 메스키트의 표정은 너무나도 아파 보여 이를 보는 내 마음이 아릴 정도였다.

금빛 오라를 두른 제이는 우리가 아닌 어딘가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항상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것처럼 그녀의 손에도 나와 똑같은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다만 제이가 들고 있는 핸드폰은 그녀가 두르고 있는 오라보다 더 세차게 금빛으로 발광하며 진동하고 있었다.

저건 이따금씩 특정 상황에서 핸드폰이 반응할 때와 같았다. 이를테면 가지 부르기를 하기 위해 핸드폰을 무기화시킬 때라든가….

“갑자기 저건 왜?”

바곳에게 물었지만 그는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즉, 지금 상황이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 채 벌인 것으로 보였다. 바곳은 내 영혼의 파수꾼으로 과거 내 영혼에서 세계수의 축복이 심어져 있는 한 부분이자 나의 배드 엔딩인 제이를 따로 떼어 내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영혼은 다시 온전한 상태로 돌아가고 싶어하기에 제이는 언제든지 다시 나와 합쳐질 틈만 노리고 있다고 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제이와 같은 길을 걸으려 한다면, 즉 배드 엔딩으로 치닫을 짓을 한다면 나와 제이는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 내가 제이가 된다면 그건 즉 결말은 정해져 있다는 거다.

그런데 제이가 갑자기 튀어나왔다고?

한참을 멍하니 앞만 바라보던 제이가 돌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를 향해 자신이 들고 있는 황금빛 핸드폰을 들어 보여 주었다. 그건 꼭 이걸 원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듯했다.

“…….”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제이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노려봤다. 저건 유혹이었다.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저 핸드폰을 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거란 유혹.

난 제이로 플레이할 적에 세계수가 주는 축복의 혜택을 상당히 누려 왔었다. 특히나 저 핸드폰은 아주 좋은 매개체가 되어 주었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을, 이 장소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단서를 저 핸드폰이 제공해 줄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여전히 제이인 상태로 이곳에 도달했다면 아주 당연한 수순으로 핸드폰이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 거란 이야기다.

차분히 핸드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 이곳에서 갑자기 가지 부르기를 쓸 일은 없고, 세계수의 목소리를 듣는 스톤헨지 모드라든가 알람을 받을 일도….

그러다 문득 은둔자의 정원에서 핸드폰이 밝게 빛나고 진동하며 이상 증세를 보였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1번째 테라리움에서 낮은 거목과 함께 있을 때에도.

두 상황의 공통점이라면…. 은둔자의 정원에선 바이오 필드의 가디언인 실새삼을 만나기 직전이었고 1번째 테라리움에선 스노우 필드의 가디언인 포인세티아를 만났을 때였지. 그렇다는 건 근처에 필드의 가디언이 있기 때문에 핸드폰이 감지를 해서…!

“설마 여기 어딘가에 필드의 가디언이….”

우웅.

어디선가 갑자기 불길한 소리의 바람이 불어와 우리를 훑었다. 땅 위가 아닌 땅 아래 길게 이어진 땅굴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었다. 마치 불청객에게 호통이라도 치는 것처럼 매서운 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온몸 구석구석을 베고 흩어졌다.

“이런.”

“당했다!”

바람을 맞은 메스키트와 포인세티아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렸을 땐 그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다른 곳으로 가 버린 것도, 인삼 군락지에서처럼 나 혼자 떨어진 건 아니었다. 메스키트, 포인세티아, 바곳, 이 세 드라이어드가 갑자기 강제로 아티팩트 안으로 귀환되어 버린 것이다. 바곳이 사라지며 그가 구속하고 있던 제이의 모습 역시 함께 사라졌다.

제이의 핸드폰이 있다면, 세계수의 축복이 여실히 작용하는 핸드폰이 있다면 정말 이곳에 가디언이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가까이에 있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살짝 혹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이를 포함해 드라이어들이 일제히 아티팩트로 귀환당하며 일말의 고민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내 드라이어드들은 물론 룽카를 보호하고 있던 그의 드라이어드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어째서 다른 드라이어드들이 사라진 거지?”

다만 이상한 점이 있다면 데이지와 민들레 아이들은 강제 귀환을 당하지 않고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아직 묘목 단계이기 때문에 가장 약한 데다 악영향을 크게 받을 여지가 있는 민들레 아이들이 온전히 필드에 남아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제게서 떨어지지 마세요.”

데이지가 나를 제 등 뒤로 바짝 당겨 숨기며 사방을 경계했다. 반항적이며 비협조적으로 굴던 민들레 아이들도 사태가 심각해지자 내 곁으로 붙으며 그 작은 몸뚱어리로 어떻게든 날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필드의 가디언인 메스키트와 포인세티아가 힘도 못 써 보고 그대로 쫓겨났다. 그건 여기 어딘가에 또 다른 필드의 가디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내 의심에 힘을 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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