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1화 (481/604)

구슬을 활성화하기 위해선 제물이 필요했다. 가디언은 그걸 생명들의 시간으로 사용했지만, 난 오롯이 내 힘만으로 10개의 구슬을 차고 넘칠 만큼 채울 수 있었다. 애초에 가디언이 모든 구슬을 채울 수 있었던 까닭도 내게서 시간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드라이어드의 그래프트들은 전부 다른 드루이드처럼 생명력을 담보로 하지 않았다. 내겐 대체 연료인 다이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무한 다이아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게 되었다. 지금의 나는 다이아가 내 영혼이 누적한 과거의 시간들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라 해도 흐르는 시간과 생은 떼어 낼 수 없는 관계이니, 시간에 응축된 생명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그래프트는 이론에 걸맞게 생명력을 쓰고 있었다.

완전히 검게 차오른 10개의 구슬들이 활성화되었다. 그러자 일제히 데이지가 사용하는 잘 벼려진 단검의 허상이 되어 허공에 떠올랐다.

데이지는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되고 싶어 했고 그 의지로 가디언의 힘을 자신의 그래프트로 만들어 버렸다. 마치 자격도 뺏고 가디언의 고유 능력인 엄청난 살상력을 가진 기술도 전부 빼앗아 버리겠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주 흡족했다. 남김없이 모두 흡수해 데이지가 훨씬 더 강해질 수 있다면 환영이었다.

단검의 허상들은 내 가벼운 손짓만으로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난 우리가 전멸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려 가디언이 어떤 방식으로 기술을 사용했는지 곱씹었다.

쾅!

단검이 경고등처럼 번쩍거리는 파괴의 힘을 향해 내리꽂혔다. 가디언이 사용했던 검과 비교하자면 작았으나 위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쾅! 콰쾅!

여러 차례 날아간 단검들이 응축된 힘을 공격했고 힘의 토대가 되는 붉은 구슬들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파지직.

이상의 전조를 알리듯 스파크 소리가 터져 나오며 그 주변의 힘이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엘더와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회복의 그래프트를 펼쳐 봤고, 메스키트와 그 어떤 것으로 뚫을 수 없는 견고한 방어의 그래프트를 펼쳐 봤다. 또한 가막살나무와 펼쳤던 최후의 방벽 같은 끈질긴 방어의 그래프트도 있었다. 시전자로서 이토록 살벌한 그래프트는 처음이었기에 더욱 새로웠다.

공격형 그래프트를 사용하는 드루이드들은 모두 이런 기분일까? 드디어 데이지와의 그래프트를 성공해 냈다는 기쁨은 잠깐, 파괴 본능이 요동치며 끊임없이 투쟁심이 고조된다. 가로막는 것을 모두 무찌를 수 있을 것처럼 폭군 같은 기상이 넘쳐난다.

그래서 가디언이 사용한 최후의 전멸기를 향해 막힘없이 공격을 퍼부을 때 절대 질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쾅! 쾅! 쾅!

터져 나가는 폭발음과 함께 작게 균열이 생겼던 붉은 구슬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깨지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결코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과거의 우리는 이걸 해결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는 선택을 했어야 할 정도였다. 물론 지금은 제대로 된 제물이 아닌, 가디언이 자신을 제물 삼아 시전했다는 점에서 불안정하긴 하나 그렇다고 얕볼 수도 없는 힘이었다.

그런데 데이지와의 그래프트로 그 무지막지한 힘을 맞받아치고 있었다. 저 힘을 성공적으로 이겨 낸다면, 앞으로 어떠한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데이지와의 그래프트로 이겨 내지 못할 적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와장창!

버티던 붉은 구슬들이 전부 박살이 나며 이 일대를 덮칠 듯이 요동치던 힘이 모두 잡아먹혀 버렸다. 구슬들이 깨지며 흘러나온 모래와 같은 붉은 기운들이 한데 모여 흐릿하게 드라이어드의 형태를 취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축 늘어진 채 주저앉은 드라이어드에겐 더 이상 생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곧 무너질 모래성처럼 위태위태하게 쌓여 있는 가디언의 잔재에 모든 것이 끝났음을 느꼈다. 데이지의 힘은 결국 노멀 필드의 가디언을 이기는 데 성공했다.

피이잉.

주변에 밝은 빛이 터지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아티팩트도 함께 빛나더니 이내 데이지의 권속들인 데이지2, 3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데이지는 스스로 나와의 그래프트를 해제해 드라이어드의 모습으로 돌아가며 가디언의 잔재 앞에 섰다.

띠링.

어디선가 기분 좋은 알람음이 들려온다.

당장 핸드폰을 보지 않아도 어떤 알람이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이 마치 데자뷔처럼 느껴졌다. 기분 좋은 알람음이 울리고 주변의 공기는 특별한 무언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듯 산뜻하게 일렁인다.

그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곳에서 태어난 전설에 대한 알람을 받았었다. 위대한 시작을 축복하듯 사방이 반짝거렸지. 그때와 상황은 다르나 그때처럼 놀라운 업적을 이룬 꽃은 이번에도 레드 데이지였다.

우르릉.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리며 바닥이 작게 진동했다. 그리고 잠시 뒤 땅에서 기다란 돌기둥이 우릴 중심으로 둥글게 솟아오르는 환영이 보였다. 이미 수차례 본 적 있는 스톤헨지였다. 10개의 돌로 이루어진 스톤헨지는 각각 자생 필드를 나타내는 듯했고, 그중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돌은 아마도 새로운 가디언이 탄생하게 될 노멀 필드일 테다.

주변에 큰 변화가 일어나도 데이지는 스톤헨지 중앙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녀의 포레스트 권속이 된 두 데이지가 그녀의 양옆을 수행하듯 자연스레 시립했다. 마치 왕을 모시는 하인처럼 말이다. 그들은 아티팩트 너머에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안타까운 모습을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데이지는 몰라보게 바뀌어 있었다. 넝마 같던 옷이 멀끔하게 돌아왔고 머리에 핀 꽃도 생기 가득 화사했다. 마치 데이지와 영혼의 연결을 했을 때처럼 정상적인 드라이어드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더구나 더 이상 날 향한 적대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전히 데이지의 포레스트에 소속된 모습을 보니 소소한 기쁨도 더해져 내 기분은 하늘을 뚫을 듯했다.

파스스.

돌기둥 아래, 모래성처럼 쌓여 있던 가디언의 잔재가 풍화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생기를 완전히 잃어서 무생물과 다를 바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모든 걸 훌훌 털고 떠나는 후련함이 느껴졌다.

가디언의 시체는 끝내 열매로 화(化)하지 못했다. 모든 드라이어드들은 죽으면 열매로 화해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다.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는 건, 오래전에 잃어버린 이름처럼 정말로 드라이어드의 정체성 또한 잃어버린 것을 뜻했고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 뜻했다.

자연의 이치를 사리사욕을 위해 깨뜨려 세계에 재앙을 불러온 드라이어드의 말로였다. 세계수의 품으로 돌아간 드라이어드는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 생명이 순환될 수 있지만, 이름 모를 그 드라이어드는 이곳에서 영원히 끝이었다. 한때 한 필드를 다스리고 수호하던 위대한 가디언이었으나 이젠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가디언의 잔재가 흩어지며 반딧불이의 빛과 같은 형형한 빛들이 먼지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빛 가루들은 스톤헨지의 반짝이는 돌기둥과 공명했고 이내 데이지를 향해 흐르는 노래의 음률처럼 날아갔다. 데이지는 다가오는 빛 가루들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빛이 데이지의 손에 맞닿자 하나의 흐름이 되어 나선형으로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팔을 향해 타고 올라갔다. 일순 내 눈에 그 빛들이 단순한 점들이 아니라 선을 이루고 곡선이 되며 어떠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임이 포착되었다.

그건 복잡한 문양 같기도 했고 읽을 수 없는 글자 같기도 했다.

데이지가 전설을 피워 내던 날, 밤하늘을 금빛으로 수놓았던 반짝이는 글자들의 향연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건 노멀 필드 가디언의 자격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데이지는 이제 전대를 이어 새로운 가디언이 될 것이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 계승 과정이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승을 위해선 적절한 인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모르는 것을 가르치고 앞으로를 위한 지식을 전승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지만 전대와 현세대가 만나 한 일이라곤 피 터지게 싸운 일뿐이었다.

입 안의 혀처럼 굴렸던 그 포인세티아의 전대도 그녀가 자각하기 전까진 계속 그녀에게 붙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포인세티아는 무의식 중에 전대에게서 지식들을 흡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멀 필드의 전대와 데이지가 함께한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더구나 계승의 형태도 데이지가 빼앗아 가는 형태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비정상적인 계승에 대응하여 데이지가 온전히 가디언의 자격을 취득할 수 있도록 저런 방식으로 전승이 이뤄지는 게 아닌가 싶었다.

데이지는 팔을 감아 오르다 이젠 온몸을 감는 빛의 향연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그 표정이 꼭 고아한 노래나 낭송을 듣고 음미하는 듯했다.

그녀는 어떠한 지식을 전승받고 있는 것일까? 다른 필드의 가디언들처럼 노멀 필드만의 규율을 전승받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한눈에 자신의 필드의 꽃임을 알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예리한 통찰력을 전승받고 있는 것일까?

온몸을 휘감던 빛의 향연은 최후에 데이지의 머리까지 닿았고 그녀가 쓰고 있는 화관을 둘러쌌다.

그 순간, 푸른 줄기와 잎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수수한 화관에 변화가 생겼다.

“앗… 데이지, 화관이…!”

매끄럽게 윤기가 나고 튼튼한 줄기 곳곳에 마치 장미꽃에서나 볼 수 있는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가시들은 데이지의 붉은 머리칼을 파고들었다. 가시가 짧아 피부까지 닿진 않을 테지만 충분히 거추장스럽고 위협적으로 보였다.

걱정하는 나와 달리 데이지는 가시가 돋아난 화관을 여상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왕관을 쓰는 자, 그 무게를 견디라고 했던가. 위협적으로 돋아난 가시들이 데이지가 짊어져야 할 노멀 필드 가디언의 시련처럼 보였다.

빛의 향연은 화관을 변화시킨 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후 데이지는 생각에 빠진 것처럼 가만히 서서 잠시간 눈을 감았다. 나는 여전히 저 화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풀꽃에 돋아난 가시라니.

“제희 님.”

생각을 마친 것인지 눈을 뜬 데이지가 날 바라보며 불렀다. 데이지는 검집에서 자신의 무기인 두 개의 단검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화관처럼 무기에도 변화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단검을 쥘 수 있는 손잡이에도 가시가 돋아나 있었고, 데이지가 손잡이를 쥐자 검신에서 뻗어져 나온 가시덩굴이 그녀의 손을 아대처럼 휘감았다.

머리카락이 보호하는 화관과 달리 단검은 그녀가 직접적으로 쥐고 사용하기 때문에 가시에 대한 피해를 직접적으로 입었다. 데이지의 흰 피부에 가시가 파고들었고 그녀가 공격 자세를 취하기 위해 단검을 강하게 그러쥘수록 가시는 더욱더 손을 아프게 뚫었다.

대체 그녀가 무엇을 계승 받은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이건 너무 심한 페널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꼴이면 어떻게 전투에 사용하라는 거야!”

이젠 이 자리에 없는 전대 가디언을 향해 울분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런 괴상한 가시를 왜 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꽃에게!

가시가 데이지의 손을 상처 입히자 투명한 피가 망울망울 허공에 떠올랐다. 그 모습에 별안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가디언의 등 뒤에 원을 그리며 떠올랐던 10개의 구슬들이었다. 그리고 이젠 데이지와 그래프트를 사용하면 볼 수 있는 구슬이기도 했다.

물론 그 구슬들에 비하면 보석처럼 아주 작은 크기였지만 설마 하는 마음을 지을 순 없었다.

톡, 톡, 토톡. 허공에 떠오른 핏방울들이 터지자 갑자기 잔잔히 바람이 부는 게 느껴졌다. 바람은 겨우 머리카락을 들어 올릴 정도로 약했다가 터져 나가는 핏방울들이 많아질수록 세기를 더해 갔고, 마침내 세차게 옷자락을 흔들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어쩌면 여기에 위력을 더 보탠다면, 우리를 사사건건 괴롭혔던 전대 가디언의 불길한 바람처럼 거센 파워를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데이지는 가디언의 자격과 지식을 전승받은 것과 동시에 가디언이 사용하던 바람을 다루는 기이한 힘도 얻게 된 것이다.

바람을 다루는 힘이라니. 대규모 기술이 없는 데이지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굉장한 힘이었다. 응당 가디언이라면 이런 대단한 힘 정도는 다룰 수 있어야지 싶을 정도로 구미가 당기는 힘이기도 했고. 훗날 데이지가 이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된다면 민첩한 몸놀림이 주특기인 그녀에게 말 그대로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건… 온전히 기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야.”

하지만 바람이 강해지려면 핏방울이 많이 필요하니… 더 강한 능력을 사용하려면 데이지가 상처를 입어야 함을 뜻했다. 그녀가 단검을 많이 사용하고 거칠게 다룰수록 허공을 떠다니는 핏방울이 많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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