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지의 기사에서 혹시 놓친 건 없는지 읽고 또 읽는 사이, 아티팩트에서 데이지가 튀어나왔다.
“설마… 엘더가 지금까지 메스키트의 훈련을 받은 건 아니지?”
만약 지금 구경이 끝나 나온 거라면 엘더가 숨을 쉬고 있긴 할까?
“아, 그건 진작 끝났어요.”
그렇게 말하는 데이지의 모습이 어딘가 지쳐 보였다. 여기저기 헝클어진 모습이 단순히 구경만 하다 온 걸로 보이진 않았다. 흙먼지가 묻은 옷깃과 소매를 툭툭 털어 주자 데이지가 들켰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도 훈련받았어?”
“그냥 대련을 좀… 했어요.”
데이지는 민망하다는 듯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역시나 구경만 하고 온 게 아니라 메스키트와 한판 붙었나 보다.
“졌어요. 그런데 예전만큼은 아니에요!”
그래도 이제 데이지가 메스키트를 상대로 제법 오래 버틸 수 있게 됐다는 걸까?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녀를 이기는 건 무리인가 보다.
“메스키트는 워낙 강하니까. 그런데 넌 왜 갑자기?”
“새로 배우게 된 기술을 활용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페널티도 따르니까 익숙해지려고요.”
데이지는 전대 가디언에게 빼앗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그 기술이 데이지가 다쳐야지만 효력을 낼 수 있기에 양날의 검과 같은 기술이었다.
“그리고… 같은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당하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호승심이 끓어서….”
“오….”
데이지가 노멀 필드의 가디언이 된 이후로 같은 자생 필드인 엘더가 당하는데 보호 본능이 생겼나 보다.
어쩌면 데이지는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친구와 가족처럼 여기는 포인세티아와 같은 과가 아닌가 싶었다. 메스키트와 실새삼은 같은 필드의 드라이어드가 당해도 보호 본능이 생겨 나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소속 드라이어드들을 대하는 방식도 가디언마다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얼른 알려드리려고 왔어요.”
“새로운 사실?”
“제희 님은 혼란이 필요하다고 하셨잖아요. 저희가 길을 찾기 위해선 반대로 길을 잃어야 한다고.”
우리의 여행 목적을 데이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리스 파티가 신전형 던전을 찾게 된 계기가 되는 혼란을 우리도 겪기 위해. 하지만 지금은 혼란의 주체가 되는 땅굴의 제단들도 망가지고 전대 가디언도 퇴치당해서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렸다.
“전대 가디언이 노멀 필드를 제외한 다른 자생 필드 드라이어드들을 전부 아티팩트로 돌려보냈잖아요? 그 힘을 저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제희 님이 바라는 혼란을 만들어 낼지도 몰라요.”
그 힘은 넓은 지역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만들어 절대적인 통제력을 보여 주는 힘이었다.
“메스키트 님도 그러셨어요. 제가 더욱더 강해지고 가디언으로 인정받게 되면 남의 욕망을 들쑤셔 환각으로 끌어당기는 힘도 함께 사용할 수 있게 될 거라고.”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데이지가 전대 가디언만큼의 수준에 오른다면 가디언이 부렸던 혼란을 사용하게 되어 신전형 던전을 찾을 수 있다니.
“이전엔 메스키트 님께 훈련을 받으면 그저 가르침을 받는다는 느낌에 그쳤는데, 이번엔 대련을 통해 많이 성장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젠 제가 그녀와 동등한 가디언이 되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같은 가디언인 다른 꽃들과도 주기적으로 대련을 해 보려고 해요. 제희 님이 기다리는 것만큼 빨리 성장해서 그 던전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언제나 기특한 나의 드라이어드였다.
“방법이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찾게 된 거니까 데이지까지 조급해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고마운걸.”
장한 마음에 화관의 가시를 피해 데이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이쪽을 바라보는 눈길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오오… 저 드라이어드가 바로 노멀 필드의 가디언.”
“단순한 대화에서도 위엄이 느껴집니다. 드루이드의 귀감이 되는 존재십니다.”
라운은 가디언이 된 데이지를 간만에 봤으니 그렇다 쳐도 룽카의 주접에 가까운 찬양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어쩌면 이번 마차 호위 의뢰에 두 사람이 된 건, 익숙한 사람이라기보단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66번째에서 출발하여 십의 자릿수가 두 번 바뀌니 날이 어두워졌다. 더 이상 가기엔 마차의 연료도 문제였고 마부의 피로도도 문제였다.
40번대라면 안면이 있는 44번째 테라리움도 괜찮을 텐데 방향을 완전히 틀어야 했고, 욕심을 더 내 30번대까지 가자니 중간에 야영을 해야만 했다.
우리 같은 드루이드야 상관없지만 마부는 일반인이었고, 욕심내지 않으면 실내에서 잠을 잘 수 있는데 굳이 무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가까운 건 46번째 테라리움이지만, 48번째 테라리움은 어때요? 그곳은 번호 연계법으로 묶여 있어서 좀 더 나을 거 같은데.”
40번대 테라리움은 이전에 방문하면서 느꼈지만, 30번대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오던 균형이 어긋나며 본격적으로 무법 지역으로 넘어가는 느낌이었다.
도박장과 유흥 시설, 물건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전당포나 말도 안 되는 이자율로 사람들의 등골을 빼먹는 대부업이 활개쳤다. 정상적인 테라리움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사람들의 인심도 야박했고 범죄율도 높았다. 뒤 번대 테라리움으로 내려갈수록 삶은 더욱 피폐해지지만 60번대까지 내려가면 아예 이마저도 없었다. 사람이 없고 불에 의해 치안이 좋지 않으니 낙후된 유령 도시나 다름없었다.
내가 60번째 테라리움을 전쟁터로 바꾸는 데 별로 공들이지 않아도 됐던 원인이기도 했다. 뭐가 없다. 보존해야 될 건물도, 파괴하기 아쉬운 장소도, 아무것도.
그래서 굳이 고르자면 번호 연계법의 특혜를 받아 조금이나마 마음 편한 곳을 고르려고 한 것이다.
“번호 연계법이 뭐예요?”
라운이 물었다.
“테라리움 행정 관리에서 쓰이는 법인데 뒷자릿수가 같은 테라리움은 십의 자리 숫자가 더 큰 테라리움에 연계 관리를 받는 거예요. 모든 테라리움이 중앙 행정 관리부가 있는 1번째 테라리움의 관리를 받을 수 없으니 업무를 나눈 격이죠. 예를 들면 28번째 테라리움의 일은 18번째 테라리움이, 18번째 테라리움은 8번째 테라리움이 관리하는 식이에요.”
“아하, 이해했습니다. 테라리움 번호에 따라 차등이 있다는 거군요.”
“차등이 있는 걸 저도 썩 좋아하진 않지만 아무래도 세계수 가지의 축복에 따라 테라리움 속 삶의 질이 달라지니까요.”
“다들 앞 번대의 테라리움에 거주하길 갈망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합니다. 오히려 전 당연하게 생각하고요.”
차별이 테라리움뿐만 아니라 이를 관리하는 행정 관리원에게까지 이어지니 문제였다. 번호는 하나의 계급이었다.
48번째 테라리움에 마차가 도착하자 엄청난 시선을 받았다. 44번째처럼 간만에 도착한 드루이드에게 일을 알선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도 많았고 마차에 무엇을 싣고 왔는지 하이에나의 눈으로 주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기분 나쁘게 여길 줄 알았던 룽카와 라운은 오히려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66번째 테라리움을 떠나 이렇게까지 앞번호로 온 건 참 오랜만이에요.”
그저 앞 번대 테라리움을 방문하게 되어 기뻤던 것이다.
“뭐어? 당신들 66번째 테라리움 태생이야? 쯧. 병균 같은 거 옮을라.”
“오는 길에 불을 왕창 끌고 온 거 아냐? 이 주변에 화재 피해가 난다면 다 책임져야 할 거야!”
경멸하고 무시하는 주민들의 말 속에서 훨씬 뒤 번대 테라리움 출신임을 밝히는 것이 어떠한 대접을 받게 되는지 배우게 되었다. 적어도 더 앞 번호의 테라리움에선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40번대 테라리움이 과도기의 어중간함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이곳의 행정 관리원을 만나야겠어요.”
“이 늦은 시간에 행정 관리원을 만날 수 있을까요?”
“제가 이전에 40번대 테라리움을 방문해서 느낀 건데, 이곳 주민들은 자신들끼리 똘똘 뭉쳐 있어요.”
난 다이아를 막 쓰고 다녔다가 된통 당했던 44번째 테라리움을 떠올렸다. 테라리움에 텃세가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사건이었지. 유동 인구가 많은 앞 번대 테라리움은 사람이 자주 바뀌니 그럴 일이 드물지만 이쪽은 고인물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우리가 66번째 테라리움에 왔다는 소문은 금방 테라리움 곳곳에 퍼질 거고… 심하면 여관방도 안 내주려고 할 거예요. 그러니 행정 관리원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새로운 마차와 마부를 구해서 새벽까지 달리는 일도 어려울 테지.
“그… 그 정도인가요? 전에 40번대 테라리움을 방문했을 땐 그 정도까진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때도 이 인원으로 방문했었나요?”
“아뇨, 길드에서 단체로….”
드루이드가 단체로 움직이니 길드라는 걸 단숨에 알아봤을 것이다. 어느 테라리움 출신이든 드루이드가 잔뜩 모인 길드에 시비를 걸고 싶진 않았겠지.
룽카와 라운은 자신들을 힐끔힐끔 쏘아보는 주민들을 보고 멋쩍게 웃다가 아무 말 없이 과수원으로 향하는 길을 따랐다.
기대했던 건 아니니 과수원의 건물의 노후화가 심하고 과수원을 지키는 직원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사실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적어도 44번째 테라리움은 행정 관리원이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나 글로리아와 같은 테라리움을 아끼는 실세들이 최소한의 테라리움 구실은 하기 위해 제대로 굴리고 있었다.
허울뿐이라 해도 외부적으론 권력을 제대로 가지고 있었고, 과수원이 테라리움의 얼굴임을 잘 이해해 적당히 사치를 부려 가며 꾸며 두는 노력이라도 했었다는 말이다. 이 정도까지 내버려 둔다는 건 자신이 사는 테라리움에 먹칠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수원만 봐도 이 테라리움에 글로리아 같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가장 먼저 손님을 맞는 데스크도 텅 비어 있었다. 과수원의 불은 24시간 꺼지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물론 사람들은 밤이 되면 쉬나 교대 근무를 통해 항상 과수원을 지키는 직원들이 존재했다.
과수원은 단순히 드루이드들을 맞이해 세계수가 맺은 드라이어드 열매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테라리움의 모든 행정의 중심이며 가장 중요한 건 그 건물이 세계수의 가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크는 텅 비어 있고 그나마 있는 직원들은 한쪽 벽에 기대어 자기들끼리 잡담을 주고받느라 손님이 오든 말든 무관심이었다.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