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1화 (531/604)

“네 몸에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장신구들이랑 같은 취급하지 마.”

아마 내가 시들링이었다면 무기를 빼어 들고 그를 향해 휘둘렀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인내심이 있으니 참았다. 아니 참으려고 했다.

“크윽….”

애쉬가 난데없이 제 가슴을 쥐어짜며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그에게서 놀랄 만큼 뜨거운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그에게 내포되어 있던 내 기운이 마치 껍질을 벗기듯 사라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터져 나오는 열기는 그 반등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와 만났던 베스탈리스들 중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한 경우가 없었기에 더더욱.

애쉬가 본래의 그로 돌아가게 된다면 엄청난 문제였다. 현재 그에겐 열기를 제어해 줄 장신구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를 만난 후 모조리 빼 버렸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폭주라도 하게 된다면….

16번째 테라리움에서 그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무지막지한 힘에 다들 속수무책으로 세계수에 기도를 올려야만 했지.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의 영혼이 제구실을 못하기 전에 떨어져 나간 정화의 힘을 다시 덧입힐 필요가 있었다. 뜨거운 냄비에 손을 올릴 것처럼 그에게 닿은 손이 익는 듯했다.

샘의 기운을 밀어 넣으며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열기를 막아 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 그의 영혼을 정화했을 때와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건 명백히 ‘거부감’이었다. 또는 서로 다른 음이 제멋대로 흘러가는 불협화음 같기도 했다.

내 힘은 애쉬의 힘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생소한 경험이었지만 당황해선 안 됐다. 지금 그를 진정시킬 수 있는 건 나뿐이었다. 또한 해답을 낼 수 있는 사람 역시 나뿐이었다. 이 상황에선 시들링의 대단한 무력도, 애쉬의 뛰어난 반사 신경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머리를 굴려야 했다. 어째서 처음과 달리 그가 내 힘을 받아 낼 수 없는지.

그때와 지금이 다른 건 뭐지?

“폭주하지 마. 너 여기서 터지면 우리는 물론 내 테라리움이 위험해. 그땐 정말 널 죽일 거야.”

애쉬는 빌빌대며 내 손을 파고들 것처럼 이마를 비볐다. 쪄 죽일 것처럼 내리쬐는 한여름의 태양 아래에서 꽁꽁 얼린 생수병을 손에 쥐었을 때와 같은 행동이었다. 날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그의 흉폭한 열기에 맞서 나의 샘의 기운도 덩달아 사나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또한 생소한 감각이었다. 샘의 기운은 재생과 치유의 힘. 고요하게 흐르는 물과 같이 유순하게 타인의 기운을 포용하는 기운이, 마치 휩쓸어 버릴 듯 난폭하게 구는 해일의 기운처럼 변화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기운에 덧입힌 건 바로 분노와 적대감이었다. 재생과 치유의 속성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파괴의 감정이었다. 비로소 나와 애쉬 사이에 왜 불협화음이 발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기운은 감정을 따라간다. 내가 그를 적대하고 밀어낼수록 기운도 그를 밀어낸다.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니 쏟아 내는 기운은 죄다 날카로운 창과 같은 형태를 띤다.

순식간에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겨우 감정에 따라 쉽게 흔들리다니. 동시에 막연한 공포감마저 들었다. 내 감정 동요가 누군가의 생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는 건 실로 끔찍한 일이었다.

애쉬가 상종하기 힘든 인간이며 그의 태도는 날 불쾌하게 만들지만, 그에게 정화의 힘을 사용했을 때 그가 어떤 인간이든 일단 구하고 보자는 마음이 앞섰다. 이미 무고한 자들에게 많은 피해를 낸 데다가 폭력적이며 잔인한 성상은 세상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 여겨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때 수없이 고민했다.

내 드라이어드들의 제압으로 한순간 틈을 보인 그의 머리를 보며 얼마나 갈등했던가.

그럼에도 내가 선택한 것은 또 다른 미래였다. 더 많은 베스탈리스들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그의 오염된 열기를 정화해 주었다.

샘의 기운이 가진 정화의 힘은 상대방의 영혼이 가진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려 할 때 함께 흐를 수 있었다. 영혼에 박힌 불순한 불의 기운 역시 정화되는 걸 원치 않으니 외부의 힘인 내 기운을 적으로 간주하고 반항을 할 터인데, 나 또한 함께 맞서려고 하면 두 기운은 끊임없이 충돌하기만 할 뿐 조화를 이룰 수 없었다.

애쉬를 향한 혐오와 배척감을 잊기 위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바다와 강이 만나 섞이는 하구역처럼 서로 다른 물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흘러 새로운 생태계를 조성하는 걸 상상한다.

“후….”

애쉬의 열기가 눈에 띄게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그의 고통스러워하는 신음 소리도 줄어들었다. 정화의 힘은 다시금 그의 손상된 영혼의 틈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샘의 기운이 더 이상 적대의 기운을 띠지 않는다.

그를 치료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세계수는 기분에 따라 누군가의 생과 사를 결정하지 않는다. 세계수가 분노하여 벌을 내렸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카수스가 세상에 큰 재앙을 불러왔을 때조차 그에게서 자신의 피조물인 드라이어드들을 회수하지 않았다. 그를 세상 밖으로 추방하지 않고 지금까지 부활해 활개 치도록 내버려 둔다.

애초에 세계수에게 감정이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적어도 나처럼 감정에 휘둘려져 줬던 정화의 힘을 빼앗고 누군가를 다시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짓은 하지 않았다.

세계수와 동등한 신이 되겠다고 해놓고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부끄러운 감정의 원인이었다. 난 아직 한참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까불지 좀 마.”

애쉬를 치유하고 난 후의 내 손은 옅은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내 손을 옆에서 보고 있던 시들링이 조심스럽게 잡았다.

“치료가 필요해 보인다.”

“조금 뜨거울 뿐이야. 금방 가라앉을걸.”

“화상은 큰 고통과 후유증을 남긴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그의 턱과 목에 자리한 화상 흉터를 바라보고 말았다.

아직까지 시들링이 저렇게 큰 화상 흉터를 가지게 됐는지 정확한 연유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는 큰 화재를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기에 내 손을 보고 공감하여 걱정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난 천천히 그의 턱 끝, 흉터가 끝나는 지점에 붉게 달아오른 손끝을 대었다.

어쩌면 목숨이 위험했을 수도 있는 흉터. 불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마음 깊이 자리할 수도 있는데 불과 관련된 베스탈리스들을 미워하거나 배척하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세계를 침범한 것이 불이란 이유만으로도 불합리하게 베스탈리스들을 배척하는 와중에, 직접적으로 불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시들링은 섣불리 증오를 내비치지 않는다.

그가 워낙 무덤덤한 사람이긴 해도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란 뜻이겠지.

“난 괜찮아.”

그를 보며 다시금 좀 전에 있었던 일에 크게 반성을 했다.

정상으로 돌아온 애쉬를 보며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그는 내가 분노하여 고통을 받은 걸 전혀 모르는지, 다시금 불구덩이 속에서 자신을 구해 준 내게 미친 듯이 호의를 표했다. 아주 과할 정도로.

내 다리를 붙잡고 매달려 제정신이 아님이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그 짜릿함을….”

그의 형제인 파필리온도 내게 과하게 들이대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건 정도를 넘을 정도였다. 대체 두 녀석의 핏줄에 뭐가 흐르길래….

쿵!

시들링의 육중한 부츠가 애쉬의 머리를 깨부술 듯 내리찍혔다. 하지만 가까스로 애쉬의 머리 옆을 지나갔다. 애쉬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다리에 거머리처럼 붙어 있을 뿐이었다.

내게 붙은 애쉬를 떼어 내기 위한 시들링의 위협과 곧 죽어도 붙어 있으려는 애쉬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난리 통에 내 다리를 붙잡은 애쉬의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허울뿐인 새까만 아티팩트. 그의 아티팩트엔 아직 난쟁이가 없었다. 혹시 그에게 있는 정화의 힘이 지나치게 빨리 사라지는 이유는 난쟁이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어느 난쟁이가 저놈에게 갈까….

스텔라에게 갈 난쟁이를 정할 땐 경쟁적으로 시합도 하더니 애쉬에 대해선 폰이 잠잠했다. 저기 빈 아티팩트가 있는 데다 스텔라 급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 베스탈리스니 하나라도 나설 법한데 난쟁이들이 조용했다. 마치 그들도 애쉬의 잔혹함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룰을 정하자. 지키지 않으면 다신 널 보지 않겠어.”

내 말에 난데없이 시들링의 어깨가 움찔 튀는 게 보였다. 내 발언이 시들링에게 일종의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킨 게 분명하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우리의 만남 초기, 그러니까 시들링이 아직 내게 미운 아기 오리일 시절, 그를 보지 않겠다는 발언을 꽤 많이 했었다. 그의 화법이 종종 내 성질머리를 자극했으니 당연하다.

룰을 정했던 적도 있다. 내가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 말을 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기 전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라거나….

“넌 이제 아니잖아.”

불안해 보이는 그의 어깨에 손을 대니 놀랄 만큼 빠르게 진정한다. 트라우마가 될 정도라니. 과거의 내가 좀 못됐던 거 같다.

“첫째, 함부로 내 몸에 손대지 마.”

있는 힘껏 발길질을 했다. 그러자 의외로 쉽게 애쉬가 떨어져 나갔다.

“손대지 말라니. 그럼 내게 네 손을 잘라 주기라도 할 거야? 응?”

하지만 쉽게 떨어져 나간 만큼 다시금 돌진해 온다. 이에 맞춰 시들링이 검을 빼어 들었지만 내 손이 먼저 뻗어 나갔다. 직접 그를 저지할 생각이었는데 뒤늦게 생각해 보니 내 힘은 그를 이기기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후회와 동시에 애쉬의 멱살에 손이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위이잉.

손등에 작은 떨림이 일었다. 놀랍게도 내가 애쉬를 멈춰 세웠다. 그런데 이 일련의 행동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일시 정지를 누른 것처럼 우뚝 멈춰 선 모습. 그건 내 장갑에 새겨진 장비 강화 스킬 ‘시간 정지’를 발동한 것이었다.

내게서 제이의 모습이 분리되었어도 장비 강화는 전승되어 잘 작동하니 다행이었다.

“둘째, 무슨 일이 있어도 네게 내 신체를 훼손하여 주는 일은 없어. 그러니 그런 언행은 하지 마. 또 온몸이 불타는 고통을 느끼고 싶다면 해 보든가.”

그의 멱살을 잡은 손을 슬쩍 놓고 뒤로 물러났다. 시간 정지가 풀렸음에도 그는 순순히 멈춰 섰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날 뚱하니 바라보았다. 붉은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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