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게 말로만 듣던 3월의 태양이 맺힌다는 보석, 젊음의 아쿠아마린?
보석은 여태 봤던 태양의 보석들 중에서 가장 컸다. 손바닥 안을 거의 다 차지할 만큼의 상당한 크기에 대체 이런 크기는 몇 캐럿이라고 부를까 궁금해질 정도였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거대한 보석에 모든 드라이어드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3월이면 흔치 않은 전투 보너스 달이었지만, 달이 달라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보너스를 받을 수 있었다.
“와….”
반짝이는 것에 환장하는 엘더의 눈은 거의 광기에 가까웠다. 마치 보석에 영혼을 뺏겨 버린 것처럼 잔뜩 홀려 있었다.
땅속에서 보석을 꺼내자 기다란 금속 줄도 함께 달려왔다. 단순히 보석만 덜렁 있는 게 아니라 펜던트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와 빛을 보자 그 영롱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무심하게 모든 상황을 관망하던 애쉬의 눈에도 이채가 돌 정도였다.
“이게 설마… 봉인석인 걸까? 뭔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데.”
모두의 시선이 보석을 다루는 내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난 펜던트를 이리저리 살피다 뒤집어 보았다. 보석을 고정하는 금속판 위에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처음 보기에 뜻을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우리 중에 이 문자를 해석할 수 있는 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거… 누구 줄 거야?”
탐욕을 이기지 못한 엘더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니잖아. 어쩌면 봉인석일지도 몰라. 그러니 드라이어드에게 선뜻 주기에는….”
꿀꺽, 노골적인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들레 아이들이었다. 작은 키로 목을 쭉 위로 빼고 하염없이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민들레 아이들이 3월에 전투 보너스를 받았지. 그렇기 때문에 어떤 보석에든 욕심을 내는 엘더를 제외하면 이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도 이 보석이 욕심날 터였다.
“어떤 힘을 가지고 있을지 몰라. 어쩌면 봉인석이란 특성 때문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그러니 그렇게 침을 질질 흘려도 주지 않을 거야.”
목에 걸고만 있어도 엄청난 무게가 느껴질 것 같은 거대한 보석. 솔직히 말하자면 이 땅에서 나온 거기 때문에 참골무꽃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존재들 중 유일하게 그녀만큼은 보석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제 두 손 안에 고이 놓인 동족의 씨앗들에만 관심을 보였다.
“젊음의 아쿠아마린이라…. 그래서였군.”
실새삼이 흥미롭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원한 젊음, 그건 활기와 넘치는 생명력을 의미하지. 씨앗들이 생기 충만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던 데엔 어느 정도 보석의 역할이 컸을 거다.”
“씨앗과 보석이 함께 보관된 건 따로 이유가 있었던 걸까? 씨앗 자체에도 태양의 가호가 맺혀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다시 아쿠아마린을 이리저리 살폈다. 보석은 재물로서의 가치보다 오롯이 드라이어드의 전투력 상승을 돕는다는 점에서 욕심이 있는 나라도, 이 정도 크기의 아름다운 보석엔 마음을 뺏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봉인석은 태양의 보석과 태양의 가호가 함께 융합되어 탄생했다고 했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보석에선 태양의 가호가 느껴지지 않는 듯해.”
“그거 나 주면 안 돼?”
안달 난 엘더가 다시금 조르기 시작했다.
“안 된다고 했잖아. 그리고 주더라도 넌 6, 7월이니까 3월인 민들레에게 줘야지.”
그 말에 민들레 아이들 쪽에서 환호가 터진 반면 엘더의 얼굴은 말도 못 하게 침울해졌다. 만약 이걸 민들레 아이들에게 넘긴다 하더라도 문제였다. 아이는 둘, 하지만 보석은 하나. 수준도 성장도 똑같은 아이 중 누구를 선택하기 어려울뿐더러 하나를 고르면 싸움이 벌어질 게 뻔했다.
“어쨌든 이건 당분간 내가 가지고 있을게. 그리고 미안하지만 이제 내가 태양의 가호를 가져가도 될까?”
보석을 미련 없이 주머니에 넣자 주변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시들링의 드라이어드들도 숨 쉬는 걸 잊을 만큼 집중해서 바라본 건 마찬가지였다.
참골무꽃의 몽글몽글한 씨앗들에는 인삼 군락지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이질적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정말 어떤 종류의 힘인 줄도 모르고 그걸 가져가겠다고?”
“회피나 방어의 일종으로 생각된다고 했잖아. 정확히 알 수 없어도 그런 종류의 힘이야말로 내게 꼭 필요해.”
내가 가져가도 가호의 힘이 남는다면 시들링 또한 힘을 원하지 않을까?
“넌 어때?”
그를 바라보니 자신은 그 힘을 그다지 원치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시들링의 바크 강화는 이미 균형을 이루고 있어요. 또 새로운 힘을 손에 넣으려면 보석을 비워야 하는데 그건 장인의 손길이 필요해서 당장은 할 수 없어요. 그러니 시들링은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옆에서 칼미아가 시들링의 갑옷을 툭툭 치며 이유에 대해 대신 말해 주었다. 시들링은 이미 풀 강화를 끝낸 장비를 착용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럼 이건 나만….”
씨앗에 손을 대었다. 흡수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된다고 했었지. 인삼 군락지에서 했던 것처럼 기운을 끌어 올리니 씨앗에 붙어 있던 빛이 넘실넘실 춤추듯 흔들렸다.
상의에 붙은 흑요석들 중 심장에 가까운 흑요석에서 이에 동요하듯 은은하게 빛이 났다. 그 순간, 씨앗에 모여 있던 빛이 마치 불꽃처럼 허공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이내 빛은 나팔을 닮은 참골무꽃의 꽃 문양을 그려냈다.
문양이 선명해지자 이에 동요하던 흑요석에도 변화가 생겼다. 새까만 보석 안에 선명한 보랏빛이 잔을 채우는 액체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흑요석을 가득 채워 더 이상 흑요석이라고 부를 수 없는, 보랏빛 보석으로 변모하였다.
바크 강화의 순간은 언제 봐도 멋있었다.
“아….”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참골무꽃이 아쉬움을 담은 탄식을 터뜨렸다. 우려했던 대로 나로 인해 남아 있던 태양의 가호가 사라졌다. 씨앗을 감싸던 모든 빛 또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생긴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나는 가슴께에 위치한 보랏빛 보석을 툭툭 두드렸다. 대체 무슨 힘을 가지고 있을까 싶었는데….
“어라?”
보석이 내 손짓에 따라 밝게 빛을 발했고 그와 동시에 내 손끝부터 천천히 온몸이 옅어지고 있었다.
“와, 세상에 이게 뭐야?”
손 아래로 땅이 투과되어 보일 정도였다.
“이게 태양의 가호의 힘인가 봐!”
신이 나 드라이어드들에게 말하자 그들은 놀랍다는 눈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된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군. 네 모습이 옅어질 뿐만 아니라 존재감 역시 미약해지고 있다. 이게 자신을 건들지 말라는 꽃들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적해 놓은 힘의 정체였군.”
“이런 힘 때문에 참골무꽃이 그동안 불에게서 무사할 수 있었구나.”
참골무꽃 군락지에서 얻은 태양의 가호는 ‘은신’이었다. 게임에서 종종 은신 혹은 배니싱이라고 일컫는 기술로 적들의 시야에 발각되지 않게 자신의 존재를 숨길 수 있었다. 잠입 같은 특수 임무를 할 때 용이했지만 적군으로 만난다면 상당히 까다로웠다. 보이지 않는 적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고급 기술을 내가 사용할 수 있게 되다니.
따지고 보자면 전투에 큰 도움을 주는 기술은 아니었다. 공격력이나 방어력을 높여 주는 건 아니고 적과 맞서기보다 전투를 피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겐 아주 유용한 기술이기도 했다. 시들링처럼 직접 전투에 나서기보단 관망하는 역할에 가까웠으니 이왕이면 더욱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몸을 숨기면 안전해질 수 있었다.
“아….”
그런데 태양의 가호를 얻고 난 후 인벤토리에 넣어뒀던 아쿠아마린에 이상 현상이 생긴 걸 느낄 수 있었다. 화들짝 놀라 펜던트를 꺼내 보니… 보석에 가호의 기운과 같은 보랏빛 오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더욱이 펜던트 뒷면의 금속판에 음각으로 새겨진 알 수 없는 문구에서도 빛이 나기 시작했다.
손끝으로 문구를 쓸자 놀랍게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되리라.]
읽을 수 없으나 문구는 그런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나도 모르게 느끼게 되었다.
“봉인석….”
태양의 보석과 태양의 가호를 함께 이용해 만들었다던 봉인석.
내가 태양의 가호를 얻음으로써 무언가가 발동한 걸까?
이로써 어쩌면 4개로 나뉘어졌을 봉인석의 형태와 행방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단서를 얻자 다음 행동은 빨랐다.
우린 약도에 적혀 있는 4개의 태초의 군락지를 모두 찾아가기로 했다. 참골무꽃 역시 동행하게 되었다.
방문한 나머지 3곳 중 참골무꽃처럼 드라이어드를 만날 수 있었던 곳은 없었다. 다음으로 방문했던 퉁퉁마디의 군락지는 이전 군락지처럼 생명을 틔워 내려는 시도는 있었는지 식물의 흔적을 찾아볼 순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고사한 지 오래였다. 본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맣게 타들어 간 모습이 마음 아팠다.
어쩌면 참골무꽃의 군락지에서도 지금의 드라이어드가 태어나기까지 이런 모습을 수없이 반복했을 것이다. 이미 해 봤던 대로 땅을 뒤엎어 보석과 씨앗을 찾았다.
퉁퉁마디의 군락지에서도 역시 큼직한 아쿠아마린을 발견했는데 한쪽 귀걸이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여기 또한 얼마 남지 않은 씨앗에 미약하게 태양의 가호가 남아 있었는데, 역시나 내가 흡수하자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퉁퉁마디의 군락지에서 얻은 태양의 가호는 흑요석을 다홍색으로 물들인 ‘정화’의 힘이었다. 다만 ‘은신’ 능력처럼 발동과 동시에 그 효과를 확인할 순 없었기에 그 능력을 추정만 할 뿐이었다.
귀걸이에도 펜던트처럼 작게 문구가 새겨져 있었는데, 태양의 가호와 보석이 동조하게 되자 그 뜻을 알게 되었다.
[악한 것을 정화하리라.]
그다음 찾아간 바로 근처의 군락지는 추정컨대 ‘갯방풍’의 태초의 군락지였다.
다른 군락지들이 하나씩 씨앗을 틔워 보낸 것과 달리 확률을 더 늘리기 위해 일제히 올려 그중 살아남는 하나를 꾀한 모양인지 터 중심에 죽은 식물이 한가득이었다. 제대로 자란 것은 찾기 힘들었고 더구나 불이 한 번 훑고 간 모양인지 온전한 것이 없었다.
다행히 참골무꽃이 이웃한 꽃을 알아보아 그곳이 갯방풍의 군락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고립되어 자란 참골무꽃이 이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게 신기하긴 했으나 어쩌면 자연 발생 드라이어드들이 땅으로부터 이치를 배우듯 그 안에 과거의 역사를 자신도 모르게 흡수했던 걸지도 모른다.
갯방풍의 군락지에선 아쿠아마린이 박힌 남은 귀걸이 한 짝과 역시나 미약하게 남은 태양의 가호를 얻을 수 있었다. 한 번에 지상 위로 생명을 틔우는 시도를 했던 것만큼 묻혀 있던 갯방풍의 씨앗도 상당히 많았는데, 이 역시 참골무꽃이 퉁퉁마디의 씨앗을 따로 챙겼던 것처럼 갯방풍의 씨앗도 소중히 챙겨 들었다.
이곳에서 얻은 태양의 가호는 흑요석을 새하얗게 물들인 ‘기다림’의 힘이었다. 이 또한 발동과 동시에 그 효능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은 아니었으나…. 사용과 동시에 다른 보석들이 함께 반응하는 걸 보고 다른 가호와 연계되는 능력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었다.
태양의 가호의 동조로 읽게 된 귀걸이의 문구는 [때를 기다리리라.]였다.
마침내 마지막. 다른 3개의 군락지와는 완전히 반대 방향에 위치해 있으며 거리도 멀었다. 아마 육지에 위치해 있던 군락지가 아닐까 싶었다.
그곳의 군락지엔 어떠한 흔적도 존재하지 않았고 참골무꽃 또한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이름 모를 식물의 군락지에서는 아쿠아마린 반지와 갈색의 매끈하고 콩을 닮은 씨앗들을 찾아냈다.
4개의 군락지 중 가호의 빛이 가장 약했으며, 어쩌면 땅은 더 이상 생명을 틔울 시도를 해 보지도 못할 만큼 쇠퇴했던 걸지도 모른다.
곧 사라질 것처럼 희미했던 가호는 내 어깨에 장착된 흑요석에 흡수되어 이를 보라색으로 물들였고, 이내 그 힘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이 또한 발동해도 바로 능력을 알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다.
내가 나머지 3개의 가호를 획득하는 걸 엘더는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정체도 모르는 가호로 귀한 흑요석을 그렇게 낭비해도 되냐는 뜻이었지만, 포르타의 장비는 비싼 값을 들인 만큼 강화 슬롯 역시 넉넉했기에 상관없었다. 괜히 최고급 장비가 아니었다.
어떤 힘이 있는지는 나중에 모험 도중 찬찬히 시험해 보면 될 일이고. 오히려 정확히 모르는 쪽이 스킬 트리 연구하는 느낌도 나서 재밌잖아?
가호에 동조되어 반지 안쪽의 문구가 빛을 띄웠고 이내 그 문구엔 [그 누구도 진실을 알 수 없으리라.]라는 뜻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