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스의 말대로 전황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주변의 치안율이 갈수록 상승하는 게 느껴진다.
끝도 없이 밀려들어 오는 불의 수가 줄어들었고 그 기세도 확연히 꺾여 버렸다.
가장 다행인 건 온갖 그래프트를 끌고 와야 할 만큼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한 번의 위기만으로도 전세는 급격히 흔들린다.
“아니…. 뭔가 이상해. 왜 없지?”
이상함을 눈치채는 게 늦었다. 너무… 쉬웠다. 방어전이 너무 쉬운 게 이상했다.
“너무 순조롭게 상황이 정리되고 있어. 이건 전력이 더 투입된 것만으론 해결이 될 게 아니었는데? 축복이 균형을 찾았다 하더라도 정작 중요한 92번째 테라리움의 축복이 많이 약화된 상태라….”
갑자기 불안한 기운이 엄습해 온다.
궁지에 몰린 자들은 어떻게 하지? 살길을 찾아 도망간다. 사람도 동물도 그리고 불도.
대부분의 불은 먹잇감이 눈앞에 보이면 돌진하지만 간혹 지능을 가지고 있는 놈들은 피하기도 한다. 이미 많이 겪어보지 않았는가?
어린 데이지를 향해 게걸스럽게 달려들던 놈들이 지금의 데이지를 보면 슬슬 피하는 모습을.
92번째 테라리움이 안전하게 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렇다면 사냥터를 잃은 불들이 도망갈 곳이 어디겠는가?
“애초부터 양동 작전을 펼쳤어야 했어!”
난 다급히 길드원들을 불러 모았다.
이 방어전은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선 안 됐었다. 92번째와 93번째 테라리움을 동시에 지켰어야만 했다.
현재 92번째 테라리움에 네임드라 불릴 법한 보스 몹들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뻔했다. 전부 93번째 테라리움으로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탈환이 쉬워도 너무 쉬웠다.
이곳에선 수많은 드루이드 사상자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드루이드를 이기고 드라이어드를 차지하고 더구나 생태계 최강을 모방하는 습성에 서로 합치기까지 하는 성질도 있는 불인데, 보스라고 불릴 만한 대단한 놈이 없다는 걸 도착하자마자 눈치챘어야만 했다.
내 소식을 들은 길드원들이 하나둘 모였다.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 와 달라고 했기에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다들 이 기세를 몰아 완전히 92번째 테라리움을 사수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93번째 테라리움으로 전력을 분산해야 해요!”
난 내가 느끼는 불안을 그들에게 전했다. 그들 역시 당장 닥친 상황에 집중하느라 전투가 너무 쉽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순조로운 전황은 호재나 다름없기에 이걸 의심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보스급 불들은 축복의 균형 없이 새로운 전력들만 투입됐다면 사냥터를 옮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92번째 테라리움은 바로 옆의 91번째 테라리움과 아래 방향의 101번째 테라리움에 새로운 가지가 생기며 가장 큰 균형의 수혜를 받았다.
한 번에 환경 변화가 크게 일어나니 불은 곧바로 자리를 옮겨 버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전력을 분산시키면 전세가 나빠질까 우려됩니다.”
한때 이리스 파티와 함께 길드 생활을 했다는 스코플루스가 난처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도 맞았다.
지금 전력이 방어전을 진행하기에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은 전력.
“하지만 93번째 테라리움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됐을 거예요. 사상자가 엄청난 속도로 발생하고 그만큼 힘을 얻은 불도 늘어나겠죠.”
“외부에서 더 지원을 받지 않는 이상 양동 작전을 펼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확실히 많은 온건파 베스탈리스들이 모여 줬다. 하지만 두 개 테라리움에서 동시에 안정적으로 방어전을 진행하기엔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스텔라가 필요해.”
아직 남은 희망은 있었다. 인페르노로 향한 스텔라가 설득에 성공하여 동료들을 모아 오는 것.
“일단 저와 함께 93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할 분들이 필요해요. 급한 불은 꺼야죠.”
그녀는 반드시 올 것이다. 길을 알려 주는 별처럼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난 그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 주면 된다.
결국 조금 불안하지만 최정예라 불릴 수 있는 길드원들 몇 명만 나와 함께 93번째 테라리움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리스 파티는 둘로 갈라졌고 시들링은 남았다.
전력이 빠지는 걸 보충해 줄 실력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퍼와 헤르마는 나와 함께 가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이리스 파티의 회복형 드라이어드인 도깨비바늘과 월계수를 전부 빼 오는 격이 됐지만, 다행히 최근 이리스가 영입한 발레리안 아이들이 회복형이었다.
드라이어드 교습소에서 특훈을 받아 어엿하게 제 몫을 해낼 정도가 됐다고 들었다.
마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마침내 93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참상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그곳은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