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숍을 지키거나 주변을 배회하는 불들을 처치하자 틈이 생겼다. 비숍 역시 디버프의 피해를 주기적으로 받고 있었기에 많이 약해진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스릉.
가막살나무의 대검이 크게 거대한 몸체를 가르자 비숍이 발악하며 포자를 뿌리는 버섯처럼 불씨를 내뿜었다.
바곳은 광범위 디버프 공격이 특화였으나 다른 공격형처럼 강력한 한 방을 낼 수 없는 기술이 없다는 게 단점이었다. 또한 자신을 중심으로 넓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공격을 펼치는 형태이기에 기동성이 많이 떨어졌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비숍의 막타를 치는 역할은 가막살나무가 나서야만 했다.
본래라면 방어 특화이기에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가막살나무는 네임드급 불에 많은 피해를 입히지 못할 테지만 바곳으로 인해 약화된 상태였기에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비숍이 뿌리는 회복의 불씨는 동족인 불에겐 이로운 영향을 끼치지만 드라이어드에겐 그렇지 않았다. 비숍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되면 마치 바곳의 공격처럼 주기적으로 공격 피해를 받는 격이었는데, 오히려 탱커인 가막살나무의 방어가 튼튼하고 생명력이 높아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공격형이라면 크게 한 대 쥐어박고 빠지는 식의 플레이가 필요했을 텐데, 공격형보다 좀 더 오래 걸리더라도 묵묵히 대미지를 넣는 방어형이 어쩌면 이 비숍을 파훼하는 데 제격인지도 모르겠다.
위험하다 싶으면 엘더의 회복이 가막살나무를 뒷받침해 주었고 마침내 이 구역에서 전투를 까다롭게 만들던 비숍을 해치웠다.
“이런 놈이 하나가 아니란 말이지….”
힐러가 사라지자 주변 불들의 기세가 한풀 꺾여 해치우기 편해졌다. 애를 먹던 드루이드와 드라이어드들도 이 기세를 몰아 주변을 정리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이 비숍은 지키는 나이트가 없어서 수월했어. 다른 드루이드가 간신히 나이트는 해치웠나 본데….”
무방비 상태의 힐러를 처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전투도 동일하리라 보긴 어려웠다.
“그래도 맡은 바 최선을 다하자. 결국 이겨 낼 거야.”
“열심히 할게요.”
내 말에 바곳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패색이 짙던 전장이 조금이나마 완화되어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진 게 보였다. 곧 죽을 거란 절망이 가득한 표정에서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닮은 표정으로 변했다.
가디언들이 전체적인 사기를 끌어 올리고 전력을 증대시키며 뒤늦게 투입된 전력들이 외곽부터 숨통을 터 주며 중앙으로 진입한다.
93번째 테라리움의 상황이 마냥 비관적인 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망하기 직전에 간신히 구명줄을 끌어 올려 준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늦었다면….
“곳곳에서 가디언의 영향을 받은 드라이어드들이 느껴져.”
파라다이스 테라리움에선 가디언의 부름을 받은 드라이어드의 머리 위엔 마치 후광이나 헤일로처럼 색색깔의 고리가 떠올랐었다. 가디언의 부름에 멀리서부터 반짝반짝 화답하듯 빛을 내보였던 게 바로 저 머리 위의 빛일 것이다.
지금 주변엔 그때처럼 빛을 품은 드라이어드들이 많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힘든 전투에도 활력을 잃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표정도 달랐다.
그걸 보며 내게 가디언이 더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오 필드와 스노우 필드가 다른 필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식물들의 수가 적은 특수 필드이다 보니, 그들의 빛을 내는 드라이어드는 수많은 노멀 필드의 빛 속에서 아주 간혹 보일 정도였다. 좀 더 많은 전력에 힘을 보탰으면 하는 생각에 아주 살짝 아쉬움이 따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주머니에 곤히 자리하고 있을 드라이어드 열매가 떠올랐다.
하나의 가지에 쌍둥이처럼 열렸던 두 개의 열매. 둘 중 하나는 카수스가 노리던, 예전의 주인에게 돌아갈 마음이 가득했던 리버 필드 가디언의 열매인 게 분명했다.
나와 카수스는 두 개의 열매를 극적으로 나눠 가지게 되었다. 아직 둘 중 누구의 열매가 가디언의 열매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 내 주머니 속에 있는 열매에 리버 필드 가디언이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쪽에 도움이 필요해 보인다.”
열매에 집중하고 있던 와중 가막살나무가 곤경에 빠진 드루이드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린 그를 구하기 위해 전투에 뛰어들었다.
강력한 공격력을 가진 불을 구분하기 위해 체스 말의 폰이라고 부른다고 했었지. 드루이드는 무려 셋이나 되는 폰을 홀로 상대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실력 있는 드루이드인 게 분명했다. 그의 드라이어드들은 폰들을 상대하는 게 버겁다 느껴졌는지 결국 주인을 지키는데 급급했다.
가막살나무가 곧바로 공격을 퍼붓는 폰들을 가로막고 방어에 돌입했다.
난 드루이드를 부축하며 말했다.
“드라이어드들끼리 연계할 수 있도록 임시로 팀을 맺어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월렛을 꺼냈다. 우리 사이에 스톤헨지 모드가 활성화되며 엘더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드라이어드들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파티가 되며 바곳의 능력 역시 아군에겐 피해를 입히지 않게 되었다.
갑작스레 맺은 팀이었지만 상대가 워낙 실력이 뛰어난 드루이드였기에 곧바로 원활한 협력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 방어, 공격, 회복의 밸런스가 좋은 내 드라이어드 구성은 여기에 어떠한 포지션을 추가해도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었다.
“저기 제 드라이어드는 지속 피해를 입히는 공격을 써요. 탱커가 주의를 집중시키는 동안 약화시킬 테니 마무리 공격을 준비해 주세요.”
내 말에 드루이드는 곧바로 자신의 지원형 드라이어드를 바곳에게 붙였다. 바곳의 디버프 공격 능력을 증진시키는 효과적인 처신이었다.
보스급 불을 셋이나 한 번에 상대하는 것임에도 두려움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충분히 어려워할 상황이었음에도 이곳에 오기 바로 전 전투가 카수스와의 결전이었기에 오히려 쉽게 느껴졌다.
그와의 전투를 회상해 보면 차라리 이곳에서 한 무리의 폰들을 상대하는 게 훨씬 낫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뭘 하든 가디언 여럿의 능력을 한 번에 상대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제가 당신의 드라이어드들의 능력은 잘 모르니 타이밍은 직접 재셔야 해요.”
“알겠습니다.”
내 말에 그는 바곳의 능력의 여파로 보글보글 검은 거품을 뿜어내는 불을 집중하여 바라보며 마무리 일격을 날릴 타이밍을 노렸다.
긴 창을 사용하는 드라이어드가 로켓처럼 슉 하늘로 뛰어올랐다가 단번에 가장 왼쪽의 불의 머리 위로 꽂혀 내렸다.
콰앙!
마치 미사일이라도 내리꽂힌 것처럼 엄청난 파괴력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완전히 두 갈래로 찢겼던 불은 이내 뒤이어 날아오는 속사포와 같은 창술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드루이드의 공격형 드라이어드들이 다음 불을 노리는 데에도 거침없었다. 하나같이 눈에 띄는 실력에 어쩌면 이 드루이드가 이리스나 시들링과 같은 실력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폰 셋을 해치우고 나자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부상을 입으셨다면 이대로 물러섰다가 회복하고 오시는 것도 방법이에요.”
대단한 실력자에게 내가 이런 조언을 해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그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좀 전엔 하마터면 이곳이 제 마지막 여행지가 될 뻔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드라이어드들에게 후퇴 의사를 밝혔다.
“저쪽 방향으로 가시면 돼요. 제 드라이어드들이 정리를 해 놔서 안전히 임시 초소까지 갈 수 있을 거예요.”
메스키트가 절대 방어를 펼쳐 퇴로를 뚫어 놨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드루이드는 지체 없이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려갔다.
더 싸울 수 있다고 버티거나 부상을 무릅쓴 투혼을 펼치겠다며 무리하는 모습을 보일까 걱정했는데, 자신의 상태와 현재 상황에 깔끔할 정도로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모습이 꽤나 보기 좋았다.
이곳은 자신을 모두 불태우면서까지 버텨야 할 최후의 싸움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런 행동은 불에게만 이득이기에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 전쟁은 아주 길게 전략적으로 앞을 내다봐야 한다는 점에서 포기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떠나는 드루이드의 판단은 옳았다. 물론 그 정도 판단력을 가지고 있으니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거겠지만.
그가 완전히 멀어지자 스톤헨지 모드가 비활성화된다는 알람이 떴다.
드루이드를 구출하고 난 이후에도 몇몇 국소 전투를 계속 이어 갔다. 확실히 전세는 나아졌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전황을 뒤바꿀 만한 무언가는 없었다. 이 아슬아슬한 균형만 계속 이어질 뿐, 결국 체력 싸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중앙에서 끊임없이 전력을 보충시키는 킹을 쓰러뜨리거나 좀 더 기세를 우리 쪽으로 가져올 변수가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92번째 테라리움에서 도망쳤을 보스급 불은 이게 다인가? 뭔가 수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데.”
그 불들은 마치 이방인, 이레귤러처럼 체계적인 전투를 펼치는 불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수가 무척 적다고 느껴졌다. 모두 몰려왔으니 더 신나서 깽판을 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와중에 아주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다.
멀리 장판처럼 납작하게 바닥을 기는 불을 발견했다. 그 넓이는 학교 운동장 반은 될 정도로 아주 넓었는데, 그런 크기에도 바닥을 납작 기어 다녔기에 용케 눈에 띄지 않았다.
흐르는 용암처럼 꾸물꾸물 땅을 기다 이레귤러 불의 발밑에 섰고….
“헉…!”
그대로 이레귤러 불은 순식간에 흡수당했다. 마치 물속에 퐁당 빠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불이 동족 포식을 통해 몸집을 키우는 건 빈번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기에 이상할 일은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크기가 더 작거나 능력이 약한 불이 크고 강한 불에 포식당하는 방식이었다.
이레귤러 불은 본래 이곳에 터를 잡고 있던 불들보다 체계적이진 못해도 하나하나가 준보스라 부를 수 있는 강력한 불이었다. 그런 불을 단번에 흡수해 버릴 정도라니.
대체 저 용암처럼 흐르는 장판 불의 정체는 뭐지?
그 괴상한 불은 그렇게 필드 위의 이레귤러 불만 쏙쏙 흡수해 간 뒤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다른 불처럼 전투에 가담하는 모습은 없었다.
그 불의 형태는 렉스가 알려 줬던 체스 말의 어떤 형태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체스 말 중 하나가 비지 않나?”
렉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 땅의 터주인 킹과 지원형 특성을 가진 룩, 회복형의 비숍, 방어형의 나이트, 공격형의 폰이 있었다.
“퀸은 왜 없지?”
퀸 한 자리가 비었던 것이다. 굳이 체스를 차용해 불을 구분했다면 강력한 네임드를 구분 지을 수 있는 퀸을 빼먹을 이유는 없었다.
난 드라이어드들과 함께 전투를 하며 제법 93번째 테라리움 주변을 넓게 돌아다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킹의 모습을 조금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킹은 돌아다니지 않고 어딘가에 짱박혀 계속 불을 뽑아내고 있을 뿐이란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그 킹에게 먹이는 대체 누가 가져다주고 있는 거지?
흡수한 드라이어드의 능력을 분화하여 만들어 내고 있다면 언젠간 분화해 낼 능력도 동이 날 텐데…. 필드에 계속해서 불이 공급되고 있는데다 더구나 이곳에서 드라이어드를 삼켜 자체 생산될 이레귤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지속적으로 먹이를 킹에게 운반하는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했다.
아무래도 내가 방금 본 장판과 같은 불이 킹 수준의 터주인 퀸이며, 먹이를 운반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