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9화 (579/604)

“전투가 너무 끝도 없이 계속 이어져….”

93번째 테라리움에 도달한 지 어느새 반나절이 훌쩍 넘어갔다. 그 시간 동안 제대로 쉬지도 않고 필드를 뛰어다녔다. 내가 물러서면 곧바로 무너져 버릴 전세가 느껴졌기 때문에 도통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아직까지도 승기가 완전히 넘어올 만한, 92번째 테라리움에서 그랬던 것처럼 승리를 확신할 만한 무언가가 없었기에 계속해서 마라톤을 해야만 했다.

문득 이대로라면 스텔라의 전력이 합류하여도 확 바뀌는 건 없을 것 같은 조금 비관적인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장에 또 하나의 승부수를 놓는 걸.

주머니 겉을 만지작거리며 93번째 테라리움을 바라봤다.

“아직 과수원은 건재하겠지.”

가디언을 깨워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격려하는 방법이야말로 이 상황을 좀 더 낫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열매에 리버 필드 가디언이 없을 수도 있다. 운 좋게 가디언이 들어 있다 하더라도 본래 주인에게 돌아가려고 했던 드라이어드가 순순히 내 말을 들을 리도 없었고, 심지어 영혼의 연결을 거부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가디언 역시 수호의 의무를 저버린 지 오래라 데이지보다 훨씬 더 영혼의 부름을 행하는 게 힘들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 방법을 떠올린 건 이미 나라는 개인이 이 전쟁에서 해낼 수 있는 한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불은 계속 생성되고 그들은 인간과 달리 쉽게 지치지 않는다.

먹이가 가득한 땅으로 가는 최후의 관문을 불이 쉽게 포기할 리도 만무했다.

“열매를 개화해야겠어.”

보통의 드라이어드가 나온다 하더라도 전력이 더해지는 셈이니 개화만 시킬 수 있다면 어느 쪽으로든 이득이겠지. 당장 회복형 드라이어드가 하나 더 나오기만 해도 더 많은 이들을 치유할 수 있으니까.

아니, 가디언 열매와 쌍둥이처럼 맺혀 있던 열매에서 태어난 드라이어드이니 그 안에 있는 존재가 결코 평범하다고 볼 수 없진 않을까?

봉인되어 있던 세계수 가지에 특별히 맺혀 있던 열매였다. 무엇이 나오더라도 가디언의 의지를 따라 세계로 나온 드라이어드일 테니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내겐 아직 목화 드라이어드가 걸어 준 축복도 유효했다. 내게 꼭 필요한 꽃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지금이야말로 내게 무언가가 꼭 필요한 순간이 아닌가?

“메스키트!”

결심을 한 후 메스키트를 불렀다. 한창 전장에서 활약하는 중인 그녀를 부르는 게 그녀에게나 앞으로 도움받을 이들에게나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가 안전히 테라리움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가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테라리움 안으로 들어가야겠어.”

“지금 당장 말인가요?”

내 결정에 그녀가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너 설마….”

내 말을 들은 엘더 역시 크게 반응을 했다. 그러곤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을 했다.

“왜 메스키트만 부른 거지? 난?”

마침 주변에 있던 실새삼이 반응해 이쪽으로 다가왔다.

“네 영혼에 묶을 세계수 가지를 늘릴 셈이라면 그만둬. 네가 스스로 가지를 만들어 내는 건 네 영혼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 듯하지만 본래 있던 가지를 네 영혼에 편입시키는 건 부담이 커. 더구나 이렇게 주변이 위태한 상황에서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엘더는 화난 얼굴로 내게 잔소리를 쏟아 냈다.

“흠, 물론 이 상황에서 테라리움이 축복의 힘을 예전만큼 회복한다면 상황이 더없이 좋아지겠지. 하지만 나 역시 그 방법엔 동의하지 않는다. 내 경고를 허투루 들은 건 아니겠지? 세계수와 가까이해서 네게 좋을 게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내 걱정이라면 원 톱을 달리는 메스키트도 아직 조용한데 두 걱정 인형이 설레발을 친다.

하지만 차라리 가지를 내가 먹어 현재 미약한 축복의 힘을 회복하는 방법도 최후의 수단으로 삼기엔 나쁘지 않았기에 살짝 고민은 됐다.

“고려하겠다는 그 표정은 집어치우거라.”

기민하게 알아챈 실새삼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 다 그만. 아직 제희에게 제대로 된 의견을 들은 게 아니잖아요? 그녀에게 생각이 있겠지요.”

뒤따라 함께 걱정할 줄 알았던 메스키트가 오히려 날 두둔했다. 역시 메스키트였다.

“그래. 가지를 이 이상 더 늘리는 건 나를 위해서 관두기로 했지만, 듣고 보니 최후의 수단으로 쓰기에도 나쁘지 않은….”

와그작 구겨지는 두 드라이어드의 얼굴에 설핏 웃음이 나왔다.

“농담이고. 내가 테라리움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드라이어드 포트를 이용하기 위해서야.”

주머니에서 드라이어드 열매를 꺼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투명한 유리 공과 같은 상태.

“이 열매를 당장 개화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리버 필드의 가디언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고, 너희가 했던 것처럼 이 필드의 가디언들을 조금이라도 더 격려할 수 있다면 상황을 나아질 거라 생각했거든.”

“그곳에 리버 필드의 녀석이 없다면 헛수고이지 않느냐?”

“꼭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아. 이곳에 오기 전 목화 드라이어드에게 내가 꼭 필요한 꽃을 얻게 될 거란 소릴 들었거든. 일종의 내게 내리는 축복처럼 말이야. 그렇다면 뭔가 대단한 드라이어드가 나오지 않을까? 시기상으로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 어떤 드라이어드가 나오든 전력이 늘어난다면 좀 더 수월하겠지.”

“겨우 드라이어드 하나가 늘어난다고 전세가 크게 바뀌진 않을 거다.”

“그래. 그렇긴 해도 지금 난 한계라는 생각이 들어. 가디언 중에 킹이라 불리는 불을 본 자는 없어? 그 녀석을 해치워야 뭐가 될 텐데 난 아직도 털끝 하나 보지 못했어. 드라이어드가 하나 더 생기면 킹을 찾으러 다닐 생각이야.”

나보다 더 전장 깊숙한 곳에서 활약하고 있던 두 가디언도 아직 킹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한 눈치였다.

“아마 포인세티아라면 봤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녀는 활발하게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으니까요.”

“산책이라도 나온 꼴이었지.”

“그렇게 말하지 마. 포인세티아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보지 않아도 알겠던데.”

자연스럽게 포인세티아를 디스하려는 실새삼을 막았다. 포인세티아가 실새삼보다 먼저 영혼의 부름을 성공했다는 점에서 둘 사이의 골이 더 깊어진 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열매를 지금 꼭 개화시켜야겠다는 거죠?”

“응. 테라리움 안으로 진입할 힘마저 떨어져 버리기 전에 하고 싶어.”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도울게요.”

방패를 고쳐 잡으며 말하는 메스키트의 모습이 더없이 든든해 보였다.

“테라리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의 밀집도가 높아질 거야. 센 녀석들도 많고.”

하늘에서 본다면 먹이에 바글바글 붙어 있는 개미 떼의 형상을 하고 있을 터였다.

“단순히 진입하는 게 목적이니까 전투를 피해도 상관없어.”

“데이지도 부르는 게 좋겠어요.”

메스키트의 말에 한창 전투 중일 데이지도 불렀다.

내 부름에 그녀는 마치 하늘을 날 듯 순식간에 내 곁으로 왔다.

“불렀어요?”

가디언이 셋이나 한 곳에 모여 있는 건 좋지 않았다.

“실새삼, 넌 돌아가는 게 좋겠어. 돌파는 이 인원으로 충분해. 넌 가디언이 둘이나 빠진 공석을 메꿔 줬으면 좋겠어.”

물론 그의 힘까지 빌린다면 더 쉽겠지만 벌써부터 가디언이 빠진 여파가 보이기 시작했다. 기둥이 빠진 건물처럼 말이다. 그만큼 그들은 이 위태로운 전장에서 큰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내 말에 실새삼은 더 머물지 않고 곧바로 본인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다들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많이 지쳤다는 게 느껴졌다. 한 그루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 크다 보니 지치지 않을 리가.

이대로 가디언들마저 제 힘을 낼 수 없는 순간이 오게 된다면…. 아니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우린 93번째 테라리움으로 향하는 일직선 최단 거리를 잡았다.

“가요. 제가 길을 뚫을 테니 데이지는 뒤를 부탁해요.”

“네!”

문득 이 상황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쉴 새 없이 몰려드는 불들을 메스키트가 어그로를 끌어 집중시키자 데이지가 광선처럼 쏘아져 나가 대미지를 입혔다. 데이지가 쓸어 버린 땅에 메스키트가 거대한 모래 벽을 세워 내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

양방향 모두 벽이 생기자 그대로 달리기만 하면 되는 안전한 복도가 되었다.

난 지체할 것 없이 길을 따라 뛰며 내가 느낀 기시감을 깨달았다. 다름 아니라 내가 첫 퀘스트를 받고 28번째 테라리움에 도착했을 때와 상황이 거의 같았다.

그때도 테라리움 주변에 포진한 불을 뚫고 SOS 신호를 보내는 드루이드를 찾기 위해 드라이어드의 호위를 받아 달렸었다. 메스키트, 엘더, 데이지, 셋만 있을 때였고 그들만의 힘으로 단순히 불의 틈을 돌파하기 위한 전법을 펼쳤었지.

그때도 테라리움 주변에 불이 가득해 지옥처럼 느껴졌지만 지금에 비하면….

지금은 그때의 구성 셋만으로도 테라리움 주변을 대부분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웃기지. 그때는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이걸 성장했다고 해야 할지, 거만해졌다고 생각해야 할지….

통로의 바닥엔 마치 레드 카펫처럼 바곳이 독의 늪을 깔아 불의 움직임을 저하시키고 기세를 약화시켰다. 해치우는 게 최우선이 아니었기에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뚫리려는 모래 벽은 가막살나무가 가지를 불러와 버팀목을 추가하며 방어벽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앞에 아직 불이 많아. 그래프트를 사용하려는데 어때? 내 그래프트로 해치울 순 없겠지만 약화엔 도움이 될 거 같은데.”

28번째 테라리움에서 교감도가 부족해 엘더와의 그래프트가 자욱한 안개 정도로 그쳤던 게 떠올랐다. 그때 수준의 불들은 엘더와의 그래프트로도 처치가 가능했었지. 지금의 드센 녀석들에겐 약화에 그치겠지만.

“너와 그래프트까지 펼친다면 완전 그때와 다름이 없겠네.”

“그때?”

“26번째 테라리움에서 스케어크로우를 구출하러 갈 때도 같은 상황을 겪었잖아.”

스케어크로우의 이야기가 나오자 가막살나무가 곧바로 반응하는 게 보였다.

“그래, 그랬지.”

엘더의 얼굴이 잔잔하게 풀어진다. 그도 그때의 경험을 떠올리는 것처럼.

달리며 엘더의 손을 잡았다. 그래프트를 쓰자는 그의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이에 그래프트는 세심하게 영혼의 교감을 찾아 느껴야 하는 과정을 선행해야 하는 게 아니라 원한다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척하면 척하고 말이다.

엘더의 스태프를 쥐고 하늘 높이 올리자 순식간에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곧이어 챠르르 하는 다이아끼리 맞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솨아아, 세찬 비가 쏟아져 내렸다.

모래 벽과 가막살나무 울타리로 만든 벽에 독의 늪이 깔린 바닥, 그리고 다이아 비로 완성된 지붕까지.

93번째 테라리움 정문까지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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