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6화 (586/604)

전장 곳곳에 붉은 빛이 떠올랐다. 이를 보며 더 호들갑을 떨 줄 알았던 맹그로브는 오히려 잠잠한 눈으로 이를 감상하듯 지켜봤다. 그의 눈엔 그리움, 후회, 반가움 등 복잡하고 많은 감정들이 담겨 있었다.

“그래… 이것이 필드였지. 내가 수호해야 했던, 내가 저버렸던.”

기본적으로 밝고 명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쉽게 다운되는 모습도 보였다. 감정의 폭이 크고 풍부한 드라이어드였다.

“좀 감이 와? 할 수 있겠어?”

“그의 규율에선 후회와 반성이 느껴지는군. 권위적이고 자기 잘난 맛에 살았던 실새삼이 이런 감정을 담아 규율을 재정립할 줄은 몰랐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구나.”

시간의 변화를 실새삼의 변화로 느끼다니.

“아아, 그래. 이건 할 수 없어도 해야만 하는 일이도다.”

“그렇다면 보여 줘. 오션 필드의 의지는 뭐야?”

내 말에 그는 황금 삼지창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러자 그를 휘감은 물줄기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오션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에게 알리노라. 깊은 잠을 끝내고 내가 돌아왔노라!”

엄청난 성량은 메스키트보다 한 수 위였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는 귀가 아플 정도로 울렸다. 드라이어드의 영혼을 울리는 게 아니라 귀를 울리는 게 목적일 정도로.

오죽 컸으면 전투를 하던 자들이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볼 정도였다. 어그로를 끄는 실력이 가히 탱커 중 원탑이라 볼 수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넓고 깊은 바다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여. 태초에 바다가 있었고 생명은 바다에서부터 시작되었노라. 우리는 수많은 생명들을 보살피는 어버이들이다.”

쏴아아.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맑은 파도 소리와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점점 공간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바다의 백성들이여. 바다의 근본을 이루는 자랑스러운 백성들이여.”

맹그로브는 끊임없이 오션 필드의 드라이어드들을 불렀다.

실새삼의 영혼의 부름이 귀족적이라면 맹그로브는 그보다 더 위인 왕 혹은 황제 같은 느낌이었다.

“거친 소금물이 가득한 땅은 아무 식물이나 피어날 수 없다. 하물며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가진 바다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미지의 공포를 선사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다 깊은 물 속에도 물 위 표면에도 인접한 갯벌에도 우리는 존재한다.”

넓이로 따지자면 노멀 필드에 버금가며 다양하고 수많은 식물들이 살아가는 바다.

그가 제대로 영혼의 부름을 성공한다면 이 전장에 그가 격려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의 수는 아주 많을 터였다.

하지만 그의 부름에도 좀처럼 빛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명이 살아가는 데 가장 근본적인 먹이가 되기도 하고 약한 자들을 위한 은신처가 되기도 하며 보금자리가 되기도 하지. 우리의 뿌리는 거친 소금물을 이겨 내고 생명의 보고를 지키기 위해 뻗는다.”

주변을 감도는 바다의 기운이 더욱 강해진다. 맹그로브에게서 그의 성량만큼이나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왔다. 어쩐지 성공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맹그로브는 잠시 말을 멈추고 기운을 느끼다 다시금 소리쳤다.

“친애하는 오션 필드의 규율 협약자들이여. 우리는 생명의 보고를 보살피는 어버이들. 드넓은 바다의 모든 곳에 우리의 보살핌의 손길이 내려앉는다. 우리는 자비로우며 자애롭도다. 우리의 뿌리가 독특한 이유는 바다의 모든 영역에 가릴 것 없이 존재하기 위함이다. 물속에도 물 위에도 진득한 땅에도 부드러운 모래에도, 우리는 존재하여 생명들을 보살핀다.”

“어….”

그 순간 불꽃처럼 잠깐 반짝이다 사라진 푸른빛을 발견했다. 맹그로브의 부름이 드라이어드들에게 닿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린 비는 결국 바다로 모인다. 우리의 바다는 미지의 공포를 품은 곳이 아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곳임을 끊임없이 알리도록. 육지와 바다를 연결하여 양쪽 모두에게 공평한 자비를 선사하는 어버이들임을 잊지 말도록.”

이번엔 푸른빛들이 좀 더 오래 반짝거렸다. 마치 깊은 바다와 같은 짙푸른 빛이었다.

“알리노라. 오랜 잠을 깨고 바다의 수호자가 돌아왔노라. 나는 줄어든 바다가 옛 모습을 되찾을 때까지 끊임없이 싸우고 노력하겠노라!”

마침내 전장 가득 푸른빛들이 떠올랐다. 빛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마치 바다를 바라보는 듯했다. 반짝반짝 물결치는 빛에 드디어 맹그로브가 영혼의 부름을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노멀 필드만큼 압도적인 수는 아니었으나 상당히 많았다. 즉, 맹그로브의 격려를 통해 증진될 전력도 아주 많다는 걸 뜻했다.

역시 전투 중간에 드라이어드를 개화하러 간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오션 필드 드라이어드를 위한 버프로 인해 전반적인 사기가 한 층 더 상승하여 세계수 가지의 축복과 좋은 시너지를 내게 되었다.

“좋았어! 이렇게 된다면 더 이상 불에 밀릴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완전히 우세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팽팽한 균형을 이룰 수 있게 된 걸로 보여.”

“흠흠.”

맹그로브는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칭찬을 바라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맹그로브 대단해! 대단해!”

하지만 나 대신 미니미들이 열과 성을 다해 본체를 띄워 주고 있었기에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과거에 비하면 아직 모자란 수준이지만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겠다.”

양껏 칭찬을 받은 맹그로브가 소감을 말했다.

“이제 다시 전투에 집중하면 되는 건가?”

“아니.”

난 곧바로 불의 어그로를 끌려는 맹그로브를 말렸다.

“상황이 나아졌으니 이제 미뤘던 일을 할 순간이야.”

열악한 전장이기에 급한 불을 끄는데 정신없었지만 이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이곳의 터주 ‘킹’을 찾아야 할 때였다.

“미뤘던 일이라 하면?”

“이 테라리움 어딘가에 터주라 불리는 엄청난 불이 있다고 해. 끊임없이 불을 생성해 내는, 이전엔 본 적 없는 별종이지.”

“그건 과거에도 들어 본 적 없군.”

카수스 시대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기이한 불. 세상이 변함에 따라 불도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다가왔다.

“이 전쟁의 승패는 그 불을 빨리 찾아 진압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

밖에서 밀려오는 불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안에서 생성되는 불은 막아야만 했다. 해치우는 속도만큼 끊임없이 몹이 젠 된다면 끝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쪽 방향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반대로 넘어가려고 해.”

이 근방은 내 드라이어드들과 길드원들이 충분히 살펴봤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킹에 대해 어떠한 보고도 받지 못했다는 건, 완전히 반대 방향에 존재하고 있다는 뜻 아닐까?

그때였다.

“저 녀석은….”

막 어떤 드라이어드가 해치우려던 이레귤러 불 밑에 장판이 깔리는 모습이 보였다. 킹이 생산한 것이 아닌, 92번째 테라리움에서 이동해 온 이레귤러 불을 흡수하는 퀸이었다.

난 흡수만 하고 곧바로 자리를 뜨는 행태에 어쩌면 저 장판 형태의 불이 킹을 위해 재료를 모아오는 퀸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킹은 다른 불들과 달리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활동하는 것 같진 않은데 이레귤러 불을 끊임없이 사라지고 있고…. 특별한 행태에 렉스가 설명해 준 체스 말 중 하나의 자리가 빠져 있던 걸 보면 이 근방에서 활동하는 터주 중 하나라 봐도 무관했다.

“그렇다는 건 회수가 끝나면 킹에게 돌아가겠지?”

그 순간 아차 싶었다.

불을 흡수해 킹에게 전달하는 역할이라면, 퀸의 뒤를 쫓기만 하면 쉽게 킹을 찾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굳이 이 넓은 지역을 전부 수색하는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쫓아가자!”

“뭘?”

내 말에 맹그로브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말했다.

“저기 바닥에! 장판처럼 기어 다니는 불 말이야. 이러다 놓치겠어! 데이지! 포인세티아!”

난 활동 중이던 가디언들, 특히나 기동성이 좋은 데이지와 포인세티아를 불러들였다. 속도가 빨라 내가 달려서 쫓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그들의 능력을 이용할 셈이었다.

“오오! 그대들은…! 가만… 기운은 분명 맞는데 얼굴들이 새롭군.”

맹그로브는 나타난 가디언들에 반색하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실새삼처럼 과거 연이 있는 가디언들인 줄 알았다가 아님을 알게 된 듯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반응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 녀석을 쫓아 줘! 킹이 있는 곳으로 안내할 거야.”

“그렇다는 건 결전을 벌일 수도 있겠네? 엄청난 녀석이라고 했잖아. 다른 가디언들을 부르지 않아도 괜찮겠어?”

“일단 찾고 나서 결정할게.”

내 말에 데이지와 포인세티아가 날렵한 몸놀림으로 바닥을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퀸을 쫓았다. 퀸이 위협받는 걸 알아차린 다른 불들이 둘을 막으려 했지만, 기동성이 좋은 둘을 잡는 건 어려웠고 특히나 완전히 회피로 돌아선 데이지를 붙잡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포인세티아는 센스 있게 자기가 지나간 길에 눈꽃을 피워 내 흔적을 남겼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처럼.

난 한참 앞선 포인세티아의 흔적을 쫓으며 달렸다. 다만 그들과 달리 난 불과의 전투를 완전히 피하는 건 무리였기에 테라리움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을 다시 써먹을 수밖에 없었다.

“좀 더 늦게 부르려고 했는데…. 메스키트!”

“오오, 그대는!”

불을 방어하기 위해 나타난 메스키트를 보며 맹그로브가 반색했다.

“으음, 자세히 보니 그자가 아니군. 자리를 계승한 건가?”

이번에도 메스키트를 향해 반가움을 표현하다가 멈칫했다.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 자리 또한 교체되었다. 그런데 과거 데저트 필드의 가디언도 벨벳 메스키트였기 때문인지 맹그로브는 더 크게 실망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실새삼과 맹그로브를 제외하면 다른 세 가디언은 새로운 계승자들이긴 했다.

“여긴 제가 막을 테니 가세요!”

“나도 도울까?”

“넌… 공격력이 없으니 그냥 날 따라와.”

맹그로브의 모든 능력을 본 건 아니지만 그가 그래프트를 보통 능력처럼 사용할 수 있는 메스키트만큼의 효율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렇기에 차라리 나와 함께 킹을 잡으러 가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퀸을 쫓아 테라리움을 끼고 빙 돌았고 마침내 킹이 있는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 전쟁의 진정한 보스, 과거엔 존재하지 않았던 특별한 능력을 보유한 기이한 불.

전쟁의 승패를 가릴 때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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