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을 감싸고 있던 화염이 모두 걷히고 그 안에 가려져 있던 게 드러났다.
그건 아주 거대한 구슬이었다.
막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안이 훤히 보이는, 마치 드라이어드 열매와 같은 그런 구슬이었다.
“저건….”
내가 왜 이걸 ‘알’이라 착각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구슬 안엔 생명의 징후를 보이는 어떠한 존재가 잠들어 있었다. 나는 저 존재의 태동을 읽고 이 거대한 구를 알이라 여겼던 것이다.
용암이 흐르는 비늘은 갑옷처럼 단단해 보였고 화염으로 만들어진 뿔은 여러 갈래로 돋아 가지가 빽빽하게 자란 나무와 같았다. 재에 감싸인 새까만 피막은 완전히 펼친다면 테라리움 반을 뒤덮을 수 있을 만큼 넓어 보였다.
구슬 안엔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기이한,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물이 거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굳이 찾자면… 악마라고 칭할 수 있지 않을까?
머리로 추정되는 곳이 움찔 움직였고 이내 그 가운데 박힌 동그란 공이 드러났다.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 그건 한 쌍의 눈이었다.
그것과 눈이 마주한 경험은 악몽을 오래 들여다보는 것처럼 무척이나 불쾌하고 끔찍한 경험이었다. 내 영혼을 전부 불살라 버릴 것처럼 맹렬하게 타오르는 눈빛.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는 마치 날 관찰하듯 뚫어져라 바라봤고 난 그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주변의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아주 느리게 흘러갔고 이 공간에 저 알 수 없는 생명체와 단둘이 남겨진 느낌이 들었다.
오래 눈을 마주했을 때, 내가 보던 환각에 변화가 생겼다.
어딘가에 있을 모를 틈을 깨부수는 존재가 무엇인지 드러난 것이다. 구슬 안에 들어 있는 저것과 똑같이 생긴 불의 괴물들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사용해 틈을 부수고 있었다.
둥, 둥, 파괴의 여파로 공간에 진동이 일었고 깨어진 틈이 자리한 윤곽이 이에 맞춰 드러났다. 그건 또 다른 거대한 구였다.
마치 세계를 전부 뒤덮을 만큼 아주 거대한 구. 그 안에 자리한 넓은 하늘과 땅, 바다 그리고 중앙의 세계수.
구는 마치… 테라리움과 닮아 있었다.
언젠가 버스 터미널의 공방에서 보았던 밀폐형 테라리움이 떠올랐다.
유리 안의 또 다른 세상. 외부 환경과 극도로 차단된 용기 안에서 작은 자연이 순환되고 있어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왜 이 세계의 배경과 같은 게임 이름이 ‘테라리움’ 어드벤처인 걸까?
다만 그때는 이곳에 테라리움이 상징하는 바가 많았기에 그런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넘겼었다. 마을을 부르는 명칭도 테라리움, 드라이어드들을 위한 공간도 테라리움 아티팩트.
하지만 사실 테라리움란 단어가 가장 잘 나타내는 건 이 세계 그 자체였던 것이다.
거대한 구 안에 담겨 있는 세계, 그 안에 세계를 순환시키는 한 그루의 신 세계수.
난 시선을 돌려 틈의 안쪽이 아닌 바깥쪽을 바라봤다. 불이 필사적으로 넘어오려고 하는 그 반대편, 새까만 어둠 속 끝없이 펼쳐진 불이 들끓는 지옥도.
잠깐 세계의 밖을 엿보려고 했을 뿐인데도 안구가 타 버릴 것처럼 극심한 열기가 날 덮친다.
무척이나 끔찍했다. 아니 끔찍하단 말로도 부족했다.
테라리움 밖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만 존재하는 공간뿐이었다.
불길 속에 유일하게 색채를 품은 행성과 같은 테라리움은 공간과 더욱 극명하게 대조되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래서 침입하려는 것들이 더욱 욕심내는 걸지도 모른다.
‘저렇게 외부와 연결된 틈이 생겨 버렸으면 더 이상 밀폐형이 아니겠지?’
그날 버스 터미널에서 금이 간 테라리움을 보며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어쩌면 깨진 틈을 통해 느꼈던 기묘한 감정은 데자뷔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지금 세계의 상황과 그날 봤던 테라리움의 모습이 더없이 닮아 있었으니까.
내 영혼은 세계수의 묘목으로 시작되었으니 세계수가 느끼는 위기를 내 영혼도 느꼈던 게 아닐까?
밀폐되어 있을 땐 이 세계는 더없이 안전한 공간이었지만 금이 가고 깨지며 바깥의 불이 쳐들어오며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게 되었다.
불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세계의 밖에서 세계를 깨부수며 침범해 오고 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가 밀폐되어 완전할 땐 세계수의 힘만으로 생명의 순환이 가능했을 텐데, 밀폐가 깨져 버린 지금은 불완전하다고 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세계수는 계속해서 힘을 잃어 가고…. 틈이 더 커지고 세계수가 완전히 힘을 잃어버린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고스란히 불의 먹이가 되는 걸까? 세계가 사라져 버리는 건가?
세계 지도의 반이 사라져 버린 시점에서… 이 세계는 얼마나 안전하다고 볼 수 있는 걸까? 세계의 수명은 얼마나 남은 거지? 이 세계는…. 세계수가 묘목을 만들어 낸 이유는….
“눈을… 뜨거라.”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언가가 내 두 눈 위를 덮으며 주위를 가득 메운 열기를 식힌다. 절대 나를 해할 리 없을 거란 믿음, 나를 보호하려는 조심스러운 느낌.
“또 멋대로 그런 짓을….”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은 실새삼이었다. 언제나처럼 환각과 상념에 갇힌 나를 구해 내기 위해 그가 찾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너다워서 차마 혼을 내진 못하겠구나. 걱정하는 이들이 많으니 그만 현실로 돌아오는 게 어떻겠느냐?”
“넌 이게 보이지 않아?”
내 눈은 실새삼의 손이 가리고 있기에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았다.
“네 영혼이 불구덩이 한가운데에 있다는 건 느껴진다. 드라이어드들이 참지 못하고 ‘저걸’ 깨부수기 전에 네가 무사하다는 걸 보여 주도록.”
화악, 무언가가 날 잡아끄는 듯한 느낌이 들며 주변의 멈춰 있던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깨지는 소리도, 날 잡아먹을 듯이 구는 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자 난 다시 메스키트의 안전한 방패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제희!”
눈가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한 번 깜박이자 주위로 새하얀 무언가가 투두둑 떨어진다.
“악… 따가워! 이게 뭐야? 눈?”
두 손을 들어 눈 주변을 훔치니 새하얀 눈이 만져졌다.
“그대로 내버려 둬! 네 눈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알아? 완전 불덩이였어! 실명이라도 되는 줄 알고 난….”
새하얀 눈의 주인이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그녀의 말처럼 손끝으로 눈을 더듬으니 아직까지 남아 있는 열기가 느껴졌다.
“이젠 움직일 수 있나요? 부디 저것과 멀어지면 안 되나요? 당신에게 그다지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보긴 어려운데.”
메스키트는 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악마가 웅크리고 있었다.
“다들 저 안에 기이한 생명체가 보여?”
“아뇨, 제 눈에 보이는 건, 아니 어쩌면 모두의 눈엔 그저 타오르는 불밖에 보이지 않을 거예요.”
난 고개를 돌려 스텔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도?”
“나 역시 별다른 게 보이진 않으나 오래 보고 있으면 무척이나 끔찍한 감정이 느껴지는구나.”
이곳에서 저 악마를 볼 수 있는 건 나뿐. 다만 드라이어드와 다르게 베스탈리스는 부정적인 감정도 함께 느끼는 듯했다. 그건 그들의 영혼 속에 동류의 것을 숨기고 있기 때문인 걸까?
“저 안에 괴물이 있어.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괴물이.”
“그건 불인가요?”
“불로 만들어진 건 맞는데 그것보다 좀 더… 원시적인… 고대부터 존재해 온 듯한….”
킹이 왜 불을 생성하는 능력을 가졌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체 뭘 본 거죠?”
저 악마의 눈을 통해 세계의 진실을 조금이나마 엿봤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내가 정말 세계의 진실을 봤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불은 사람을 홀린다고, 그들이 날 홀리기 위해 거짓을 보여 준 거라면?
이 진실을 알고 있는 건 오직 세계수밖에 없지 않을까?
입술을 깨물며 입을 다물자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난 적어도 내 입 밖으로 이야기를 꺼내기 전 이를 확신시켜 줄 증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 더, 세계를 침범하는 불과 그 틈이 왜 베스탈리스들의 영혼 속에 있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내가 본 건 세계의 결계라 부를 수 있는 보호막을 깨부수던 불의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베스탈리스의 영혼 속에 자리한 틈은 그런 게 아니었다.
진실이 제대로 완성되려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스텔라, 내가 인페르노가 찾아내어 관리하는 고대 베스탈리스에 대한 역사를 보고 싶다고 했던 거 기억나요?”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그것과 관련하여 이야기해 주마. 긴 이야기를 나누기엔 좋지 않은 장소라고 생각되는구나.”
고대 베스탈리스에 대한 진실이 함께 필요했다. 그들은 무언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좋아요. 저 안에 있는 게 괴물이라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하죠?”
세계의 밖에서 왔으니 원래 있던 곳으로 추방하는 수밖에. 난 저걸 다른 불처럼 해치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추방해야 하는 거지?
그때였다. 난데없이 왼쪽 손목이 미친 듯이 떨리며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윽….”
이윽고 이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눈부신 빛이 손목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상 현상은 아티팩트로부터 비롯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