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8화 (598/604)

“그런데 너 그 팔에 문신 언제 했어? 원래 없었던 것 같은데.”

내 세계로 돌아갔을 때, 갑자기 생긴 열쇠 문신. 그 문신에서 미친 듯이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무한 다이아의 [???] 업적을 완수하고 얻었던 신비한 열쇠, 그 열쇠를 통해 난 테라리움 어드벤처에 오게 되었다. 또한 원래 세계에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때도 다시금 열쇠의 영향을 받았었다.

아티팩트로 가려진 손목에서 가라앉아 있던 문신이 갑자기 떠오르게 된 상황과 눈을 멀게 만들 정도로 가득 메운 빛.

문득 세계로 오게 된 첫 순간이 떠오르게 만들었다. 방 안을 가득 메웠던 빛.

열쇠가 의미하는 건 단순했다. 잠긴 문을 열 수 있는 도구. 어디론가의 이동을 돕는 도구.

“…열쇠가 나타났다는 건….”

그리고 내가 세계를 이동할 때마다 나타났던 도구.

따지고 보자면 내 존재는 이곳이 밀폐형 테라리움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증거이기도 했다.

내가 세계를 넘나들고 있으니 나 자체가, 세계를 넘나들게 만들었던 이 열쇠가 또 하나의 틈이 되기도 했다.

난 열쇠 문신이 새겨진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내 손끝에서부터 넓게 공간이 갈라지고 문이 열렸다. 챠르르, 막대한 양의 다이아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틈을 여는 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며 이를 대체할 게 다이아라는 것처럼 말이다.

간신히 형상화된 문이 활짝 열리고 필드에 흉물처럼 놓여 있던 거대한 핵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새하얀 빛 때문에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진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른다. 그 지옥도를 다시 보고 싶진 않았으니까.

엄청난 흡입력으로 인해 핵의 반 이상이 넘어가자 안에 웅크려 있던 괴생물체가 기괴한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가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몸부림을 치며.

하지만 끝내 핵은 문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마치 열쇠를 잠그듯 왼손을 돌리자 열렸던 문이 닫혔고 크기가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주변을 가득 메우던 빛 역시 잦아들더니 간신히 문신만 반짝거리는 수준이 되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어디론가, 어쩌면 세계 밖으로 추방시킨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일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더구나 열쇠가 그런 틈을 여는 역할을 할 줄이야.

일을 끝마치자 평소와 다름없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왼손을 보니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대체 뭘 한 거야?”

불쑥 엘더가 물었다. 하지만 난 곧바로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달싹거릴 뿐이었다.

“이건….”

“몸은 괜찮은 거야? 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일을 저지른 거 같은데 네 몸에 무리를 줬을 게 분명해.”

“정말 이상하게도 난 아무렇지도 않아. 멀쩡해.”

몸이 조금 떨리긴 했지만 이 세계에 빛과 함께 처음 당도했을 때처럼 긴장으로 인한 가벼운 떨림이었다.

더구나 모든 일을 대신한 연료는 내 생명력이 아니라 다이아였고 애초에 한계까지 끌어 쓰지 않는 한 내게 무리를 주지 않았기에, 엘더의 말처럼 엄청난 일을 저질렀음에도 내 몸 상태는 평이했다.

“핵을 세계 밖으로 추방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애초에 그건 이 세계에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었으니까. 그랬더니 갑자기 열쇠에서 빛이 나서…. 아, 열쇠는 내가 이곳에 올 수 있도록 만든 매개체 같은 건데….”

주절주절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스텔라를 보고 아차 싶었다. 내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건 드라이어드들은 알고 있었지만 스텔라에겐 생소한 이야기일 테니.

“어… 어쨌든 핵을 날려 버렸어.”

날 보는 스텔라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뭔가 묻고 싶은 게 많은 눈치였지만 날 추궁하진 않았다.

“세계 밖이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포인세티아가 일련의 기이한 사건으로 인해 머리가 복잡한지 발을 쿵쿵 굴리며 답답해했다.

“일단은 큰 위험 없이 마무리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죠. 하지만 오늘 일에 대해서 우린 많은 이야기가 필요해 보이네요.”

메스키트는 당장 내게 부담을 더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상황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런데 그렇게 딱 마무리하도록 상황이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핵이 사라지자 주변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동안 불과 벌인 전투의 끝은 ‘소강상태’였다. 불의 개체 수를 줄여 새로운 불이 침입하기 전까지 안전한 상태로 만들어 두는 식이었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불이 생성되고 있으니 그 구역에서 불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뭐… 몇 분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하지만 핵을 없애 버리자 말 그대로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어어…?”

주변에 당황스러움이 가득 찬 웅성거림이 들린다.

전투 중이던 불도 주변을 배회하던 불도 전부 핵이 사라짐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훅, 하고 꺼졌다.

열기가 일시에 걷히는 경험은 뭔가 색달랐다.

“뭐야? 갑자기 다 어디로 간 거야?”

“증발해 버렸어.”

그 누구도 이 상황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무리 수많은 모험을 해 본 드루이드라도 구역의 불이 통째로 사라지는 경험은 완전 처음이었으니까.

휘두른 무기 끝의 목표를 드라이어드들도 허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93번째 테라리움에 참상을 몰고 왔던 불이 모두 사라지자 어색한 평화가 내려앉았다. 환각을 의심하던 자들도 뒤늦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기뻐하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은 점점 환호로 변했고 다들 완전한 승리를 한껏 누렸다.

“어떻게 해치운 건가요? 드라이어드의 힘을 이용한 건가요?”

잡몹들을 마저 처리하러 간 드루이드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내 주위엔 핵의 처리를 논하기 위해 남아 있던 드루이드도 제법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불이 사라졌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던 하나가 내게 한달음에 뛰어와 상황을 묻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드라이어드가 그런 힘을….”

“전 알 것 같아요. 공간 조절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드라이어드가 있으니까 그 힘을 이용한 게 아닌가요? 그렇죠?”

“하지만 그렇게 부피가 큰 적을 단숨에 옮긴다고요? 그럼 옮긴 쪽은 지금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요?”

“땅속이나 바다 한가운데로 보내 버린다면….”

“그게 가능했다면 전투가….”

하지만 답은 마치 자신들이 유추해 보겠다며 온갖 시나리오가 흘러나왔다. 물론 그중에 정답은 없었다.

나 역시 공간 조절 능력을 가진 드라이어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카수스가 그 능력을 통해 탈출했던 걸 직접 겪었으니 충분히 의심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포인세티아의 겨울눈의 방도 그런 계열이기도 했고.

“맞아요. 스페셜 등급 가디언의 능력이에요. 그런데 다른 곳으로 옮긴 건 아니라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스노우 필드의 드라이어드를 보유하신 분은 아시겠지만 겨울눈의 방이란 기술과 비슷한 류의 기술을 사용했다고 보시면 돼요.”

그들을 향해 난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세계 밖으로 보내 버렸다는 진실을 허용할 수 있는 범위는 딱 내 드라이어드들까지였기 때문이다.

물론 냉정히 따져 본다면 결코 드라이어드의 능력이 아님을 알 테지만 이 자리에서 그것 외에 설명할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이 없었다. 믿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핵은 불을 계속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기도 했죠. 아마 주변의 불이 일시에 사라져 버린 건…. 핵이 사라져서….”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어둠 속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전투는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해치워야 할 불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 존재한다.

핵을 없애니 일대의 불이 함께 사라진다는 말은 다른 곳의 핵도 없애 버린다면 전투를 소강상태로 만드는 게 아닌, 완전히 끝내 버릴 수 있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불의 침입을 완전히 막아 내는 게 가능하다는 걸 수도 있잖아?

“핵을 발견한 건 우연일까…?”

아니면 여태 발견하지 못했던 게 우연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혹은 발견되었는데 몰랐던 상황이라면?

중얼중얼, 새롭게 피어나는 가능성에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불은 끊임없이 세계에 침입하려 들고 핵이 그 침입 성공의 결과라면, 아주 효율적인 방식 중 하나라 볼 수 있었다.

세계에 핵을 밀어 넣어 이를 통해 새로운 불을 만들어 낸다면 안과 밖에서 계속 침입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테니 말이다. 마치 좁게 보자면 93번째 테라리움의 방어전처럼.

“저기, 킹은 갑자기 생겨났다고 했죠?”

93번째 테라리움에 오래 있었던 걸로 보이는 드루이드 한 명을 잡고 물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몇 번 묻더니 그렇다고 내게 말해 줬다.

“예전부터 있었다면 이 테라리움은 진즉 망했을걸요. 정확히 언제부터 생겼는진 모르겠지만….”

애초에 93번째에서 옛날부터 존재하던 게 아닌, 101번째 테라리움의 마지막 방어선이 무너지자 생겨났던 킹. 그리고 단숨에 터주의 자리에 오른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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