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나] 투명한 비밀
#001
“가도 돼?”
그가 허락을 구하듯 물었다. 가까이 다가서도 되느냐는 물음이었다.
그는 주방 입구에서 진득한 시선으로 수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솜털처럼 부드럽고, 칼날처럼 날카롭게 살갗 위로 스민다.
수아는 손에 쥐고 있던 슬라이싱 나이프를 도마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젖은 손을 마른행주에 닦고, 조리대 위를 괜히 한 번 훔쳤다.
시선이 흔들리는 건지, 손이 떨리는 건지, 아니면 왼쪽 가슴속이 달아올라 버려 온몸을 떨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답해 줘.”
탁한 그의 목소리가 뜨겁게 날뛰는 심장을 콱 옭아맨다. 수아는 천천히 시선을 끌어 올려 그를 마주 보았다. 눈가에 뭉클뭉클 물기가 차올라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일그러진다.
뭉개진 인영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망설이듯 느릿하게 움직이는 발걸음에는 복잡한 감정이 녹아 있었다.
“도수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안타깝게 부서져 내린다. 수아는 눈을 길게 늘이며 눈물을 삼키기 위해 애썼다. 그의 앞에서는 눈물조차 흘릴 자격이 없다.
그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그의 숨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저항할 수 없는 이끌림에 길든 심장이 아까부터 세차게 뛰고 있다. 수아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애석하게도 눈물방울은 속눈썹을 검게 적시고 붉게 튼 뺨 위로 따갑게 흘러내렸다.
“네가 싫으면, 싫다면.”
그도 벅차오른 심장 때문에 숨이 가쁜지 말을 토막토막 끊어 냈다.
“여기까지만 할게.”
물러설 수 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예사롭지 않은 뉘앙스가 풍긴다. 그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거다. 이번이 아니라면 다음에, 다음도 아니면 그 다음에.
그는 수아를 찾아내고, 옭아매고, 마치 너그럽게 선택권을 주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다. 그가 너그럽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한없이 다정하고, 너그러웠으며,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이다.
문제라면 단지 그걸 받는 사람, 수아에게 있었다. 타인에게 완벽하게 굴며, 일정한 거리를 두는 저 남자가 수아에게는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다가왔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이었다.
꿈결 같던 사랑을 안타까이 등진 후, 폐허가 된 수아의 삶은 재건될 새도 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해 버렸다.
끝내 끝이 났다고 생각했었다. 제가 일하는 보조 주방이 그의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지도 못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수아는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하긴 알았다고 한들 떠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
진작 들켰다고 하더라도, 지금처럼 뻔뻔하게 그의 앞에 서서 말했을 것이다.
“내일 콜드 키친에 들어갈 소스 재료 다듬어 놔야 해요. 이것까지만 할게요.”
수아는 슬라이싱 나이프를 다시 집어 들었다. 조리대 옆으로는 얇게 저며야 하는 레몬이 상자째 쌓여 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나오는 월급조차도 사라진다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등 뒤에 있는 싱크대에서 물줄기가 쏟아지는 소리에 상념이 날아간다.
금세 손을 씻은 그가 수아의 곁으로 도마와 슬라이싱 나이프를 들고 다가왔다.
“뭐 하시는 거예요?”
수아는 별 이상한 광경을 다 보겠다는 투로 물었다.
“이거 다 하고, 내 말에 대답해 준다는 거 아냐?”
“아무리 그래도 그랜드 셰프가 보조 주방에 와서 칼을 잡아요?”
수아가 나무라듯 그를 쏘아보았다.
“여전하네, 도수아.”
그의 입가가 비스듬히 기울며 근사한 미소를 그려 낸다. 순간 심장이 빠듯하게 조여들어서 수아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칼자루를 쥔 손이 파르르 떨린다. 그의 눈빛이 흘끗 수아의 손을 훑는다.
“비켜.”
그가 낮게 읊조렸다.
“내 일이에요.”
“내 주방이야.”
“이상한 고집 좀 피우지 마요.”
수아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는 슬라이싱 나이프를 곧게 세워서 도마에 꽂고는, 손바닥으로 칼자루 끝을 짚은 채 고개만 돌려 수아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고집을 피워서 사람 속을 새까맣게 태운 게 누군데?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분명 나무라는 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는 애정이 뚝뚝 묻어났다.
“없어요. 나한테는 아무런 자격도 없으니까 그랬겠죠. 이제 좀 비켜 줄래요? 정신 사나워서 내가 칼을 쓸 수가 없잖아.”
그와 반대로 수아의 목소리에서는 원망 섞인 신경질이 뚝뚝 묻어났다.
어쩌자고 이러는 건데, 대체.
뭘 어쩌자고. 다 알았으면서.
수습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도 알면서, 이렇게 나서서 뭘 할 수 있다고.
수아는 입 안쪽 살을 짓씹으며 다시 레몬을 저미기 시작했다.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고, 눈가는 서러운 횡포를 부리는 눈물로 뒤덮여서 자꾸만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 속도로 언제 끝내? 여기서 밤샐 생각이야?”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흘끗거리고는 덧붙였다.
“콜드 키친에 들어갈 소스 재료면 진작 정리가 됐어야지. 이런 속도로 해서 내일 레스토랑 문이나 열 수 있겠어? 여기서 공수 받아서 내일 점심 장사해야 하는 레스토랑만 다섯 군데야. 지금 본인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모르고, 나한테 비켜라 마라 하는 거지?”
하여간 일로 까는 데는 도가 튼 남자다. 수아 혼자서 해도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일이다. 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이례적으로 보조 주방이 빨리 마감하는 날일 터였다.
“도수아. 속으로 욕하는 거 다 들려.”
“욕할 만하니까 하겠죠.”
“욕은 입 밖으로 하라고, 여러 번 말했을 텐데?”
수아는 부아가 보글보글 치미는 것을 느끼며 고개만 돌려 그를 비딱하게 올려다보았다.
“앞으로는 무슨 말이든 해. 욕이든, 신세 한탄이든, 희망이든, 절망이든. 나한테는 전부 말해.”
그동안 있었던 일을 숨겼던 수아를 나무라는 말이었다.
“네가 꿈꾸는 희망이든, 네가 떠안고 있는 절망이든.”
쉽게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쉽게 말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니다.
“혹시요.”
“혹시, 뭐.”
“우리 이제 죽어요?”
그는 칼질을 멈추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자조 섞인 목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그가 다시 칼을 잡고 레몬을 저미기 시작했다. 수아도 쉬지 않고 칼자루를 쥔 손에만 집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깨끗하다 못해 삭막하게 느껴지는 보조 주방 안은 과육이 썰리는 섬뜩한 소리와 상큼하다 못해 쓰게 느껴지는 레몬 향만이 가득했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은 그였다.
“너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기 전에 뭘 했는지 알아?”
“몰라요.”
기도라도 했나? 울었던가?
머릿속에는 셰익스피어의 소설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나온 바즈 루어만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재생되고 있었다.
팔자 좋네, 도수아? 수아는 자조했다. 한국에 들어온 뒤로 웃을 날이 없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나란히 서서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만한 처지도 못 되었다. 그저 묵묵히 돈을 버는 데만 집중했다.
감정을 지운 사람처럼 살았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지독할 정도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수아를 울리고, 뒤흔들고, 급기야 오래전에 봤던 영화 장면까지 떠올리게 한다. 이런 잡생각이 가능했던 때가 언제였더라?
수아는 멀쩡한 레몬 하나를 집어 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키스.”
그가 덤덤하게 내뱉은 짧은 단어에 수아의 손이 멈칫했다.
“뭐라고요?”
“키스라고. 둘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건.”
“거짓말.”
“로미오가 먹은 독약을 나눠 먹겠다고, 줄리엣이 달려들었을 거야.”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나지 않는 것도 같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요.”
수아는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뇌까렸다.
“나도 기꺼이 달려들 거니까.”
멈칫하려는 손을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읍.”
정신을 딴 데 두고 서두르는 바람에 칼이 엇나가 손끝이 살짝 베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주방 한쪽에 있는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누가 칼 들고 딴생각을 하래?”
그는 수아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뜨거운 악력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려는 듯 위태롭게 뛰어 댔다.
“제가 할게요.”
“가만히 있어.”
손을 빼내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그는 수아의 손가락에 밴드를 붙여 준 뒤에도 놓지 않았다. 수아는 마뜩잖은 눈빛을 보이려 노력하며 그를 노려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리웠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달콤한 숨결과 따뜻한 미소와 가슴 깊이 팽창하게 만드는 나직한 목소리도. 모조리 그립고, 그리웠다.
“도수아.”
그가 기도하는 것처럼 경건하게 이름 석 자를 읊었다.
“네가 입에 독을 물고 있다고 하면, 내가 다 빨아 마실 거야. 네가 죽겠다고 하면, 내가 살려 낼 거야. 네가.”
그는 감정을 고르는 듯 한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아무리 밀어낸다고 해도, 나는 미련하게 네 옆에만 붙어 있을 거야.”
상황을 다 알면서 이러지 말라고 다그쳐야 하는데, 꽉 잠긴 목소리를 내기가 어렵다.
“그 독, 네가 혼자서만 입에 물고……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그거. 내가 빨아 먹어도 되나?”
그는 수아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가슴이 맞닿았다. 그가 비스듬히 얼굴을 기울이자, 뺨 위로 달아오른 숨결이 쏟아졌다.
살갗을 타고 그의 숨결이 흘러내린다. 그가 슬쩍 고개를 틀었고,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내가 말했던가?”
수아는 가라뜬 눈으로 그의 입술을 바라보며 숨을 멈추었다.
“너한테선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 냄새가 난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수아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너그러운 태도는 사치라는 듯 그는 단숨에 뜨거운 혀로 입안을 휘젓고 들어와 연한 살을 문란하게 헤집었다.
“으음.”
순식간에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려서 수아는 그의 팔뚝을 붙잡으며 두 발에 바짝 힘을 주었다. 그가 수아의 허리를 당겨 안아서 조리대 위에 앉혔다. 벌어진 다리 사이에 그가 자리했다.
“하읏.”
떨어진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베어 물었다. 커다란 손은 하얀 셰프복을 들추고, 바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의 손이 얇은 팬티 위를 쓸어 올리고는 단번에 벗겨 냈다. 그는 결박하듯 수아의 등허리를 안은 채로 뜨겁고 단단하게 밀고 들어왔다.
“아아.”
수아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목을 뒤로 젖혔다. 눈앞에 흐릿한 천장 불빛이 아른거렸다. 세상이 뒤집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가 전해 주는 쾌락은 절대적이었다.
돈 버는 데 혈안이 되어 제 몸 썩는 줄도 모르고 일하다가 죽는 것보단,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겨서 죽는 게 낫지 않은가.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이대로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의 품에서 영면할 수 있다면.
“흐읏.”
억눌린 신음을 내뱉은 순간,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자비하게 파고들었다. 다리 사이 깊은 곳에서 뜨거운 팽창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수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마주 대었다.
“도수아. 앞으로 사라지지 마. 내 옆에 있어. 죽더라도 내 옆에서 죽어. 내가 널 살릴 수 있게.”
죽음에 관해 생각한 것은 그의 품이 처음이었다. 그런 그가 죽으려면 곁에서 죽으라고 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는 대답을 원하는 얼굴로 수아를 바라보았다. 비딱하게 대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간절함이 절박하게 묻어났다.
숨기고자 했던 비밀도, 그동안은 알지 못했던 쾌락도, 두 사람 사이에 놓이면 투명하게 드러나 서로를 옭아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