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2화 (2/62)

#002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파리다.

정서적으로 깊숙이 맞닿아 있는 곳에서, 삶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올 여자를 만난 셈이다.

“오셨습니까?”

회색 맥코트를 입은 남자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 화면에서 ‘차한승’이라는 이름 세 글자가 깜빡거렸다.

입국 게이트 앞에서 픽업 기사가 웰컴 보드를 들고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하더니, 앞에 선 남자가 대도 여행사 파리 지부에서 보낸 사람인가 보다.

4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넨다.

“대도 여행사 파리 지부장 정환식입니다.”

게이트 앞에서 휴대전화 화면에 깜빡이는 이름을 띄워 놓고 기다리는 이들은 대부분이 공항 픽업과 샌딩을 업으로 삼은 파리의 택시 기사다. 그들 사이에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 여행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인 대도 여행사의 파리 지부장이 서 있었다.

“지부장님이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차한승입니다.”

한승은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였다.

“일단 호텔로 가시겠습니까?”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아랫사람을 시켜도 되는 일에 직접 나선 정 지부장에게선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고자 하는 결연한 투지가 느껴졌다.

한승은 단발성 이벤트임을 강조하며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했지만, 프로젝트 협약을 맺은 대도 여행사 측의 생각은 달랐다. 이번 프로젝트를 주기적으로 이어 가고 싶다는 뜻을 꾸준히 밝혀 왔다.

하지만 그와 달리 한승은 대도 여행사 기획팀에서 근무하는 친구의 부탁으로 이 자리에 섰을 뿐, 프로젝트를 이어 나갈 생각은 없었다.

공항을 나서자 젖은 대기의 축축한 냄새가 비강을 적신다. 한승은 잠시 숨을 멈추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후각에 의존한 기억은 같은 냄새를 맡았을 때, 의지와 상관없이 상기되곤 한다.

잊고 살았던 날의 한 가닥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다. 파리에서 유학할 때에도 비슷한 날씨, 비슷한 기온, 비슷한 정취를 마주할 때마다 되살아났던 기억들.

당시 한승의 이름, 가브리엘 파리노드(Gabriel Parinaud).

샤를 드골 공항이 아닌 오를리 공항이었고, 비가 많이 온 후라 대기는 지금처럼 축축했었다. 엄마의 손을 붙들고 공항까지 온 한승은 그날 처음 아빠라는 남자를 보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언어의 정체는 한국어라 했다. 엄마는 이제부터 아빠와 함께 한국에 살아야 한다는 말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했다. 그리고 당시로써는 제대로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 석 자를 얻었다. 차한승.

가브리엘 파리노드로 5년, 차한승으로 27년을 살았다. 한승은 가끔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단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렇게 기억이 되살아나는 순간에는 혼란이 가중되었다.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밴에 오르자, 정 지부장이 서류 파일을 하나 건넨다.

“어시스턴트는 파리에서 만날 계획이라고 하셔서 따로 준비하지 않았습니다만. 수행원이 필요하면 말씀해 주십시오.”

정 지부장은 나이가 열 살은 더 어릴 한승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예의를 차렸다.

“수행원은 따로 필요 없습니다.”

한승이 여행사에서 준비한 프랑스 미식 여행 최종 기획안을 검토하는 동안, 차는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퇴근 시간과 맞물린 파리 도심의 도로는 혼잡했다.

돌길을 구르는 승차감을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건지.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에서 그랜드 디플롬 인 프로페셔널 이멀젼(Grand Diplome in Professional Immersion: 요리와 제과, 두 과정을 통합 이수하는 프로그램)을 마친 뒤, 파리를 떠난 이후로는 다시 돌아올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없었나?

한승은 지난 몇 년을 돌이켜 보며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기획안에 시선을 두고 있던 한승의 미묘한 표정 변화에 정 지부장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시차 적응이 안 돼서 잠시.”

파리는 어스름한 저녁이었지만, 한국은 지금 새벽 2시다. 잠들어 있어야 할 시간에 깨어 있으니 혼몽한 것도 사실이다.

정 지부장은 다감한 미소를 머금으며 한승을 바라보았다. 여행 상품의 성공적 론칭을 위한 기대감이 어린 미소이기도 했지만, 인간 차한승에게 호감을 내비치는 미소이기도 했다.

한승은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 기민한 편에 속했다.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을 가졌지만, 보통의 동양인과는 조금 다른 외형을 가진 한승은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어릴 때부터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결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자연스레 구불거리며 이마 위로 쏟아졌다. 짙은 눈썹 아래로 가파르게 깊어지는 눈매는 우뚝한 콧대와 대조를 이루며 분위기 있는 음영을 그려 냈다. 도톰한 입술과 어우러진 날카로운 턱 선은 배우 출신인 어머니를 빼닮았다고 했다.

자신의 외형이 사람들의 이목을 쉽게 끌어당긴다는 것을 한승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주목받는 일은 축복이면서 재앙이다. 재앙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고까운 감정을 가지고 다가오는 이들을 잘 구별해 내야만 했다.

다행히 정 지부장은 한승에게 인간적 호의를 보였다. 최소한 사람을 두고 계산기 두드려 가며 대할 치는 아니었다.

“며칠 여유가 있으니, 푹 쉬십시오.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시고요.”

그렇다고 치근덕거리며 사람을 귀찮게 하는 부류도 아니었다. 7년째 파리에서 거주 중이라는 정 지부장은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살지 못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파리는 변한 게 없죠?”

정 지부장의 물음에 한승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하네요.”

“100년이 지난다고 해도 파리는 이 모습 그대로일 겁니다. 예스러운 건물이 변함없이 자리한 도시가 세계 패션을 선도한다는 게 참 신기해요. 패션은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잖아요.”

“제가 맡은 투어가 끝나면 디자이너 투어가 있다고요?”

한승이 맡은 프로젝트는 분야 전문가와 함께하는 프레스티지 여행 상품이었다. 한승의 프랑스 미식 기행을 시작으로, 디자이너가 이끄는 파리 패션 기행, 음악평론가가 이끄는 영국 대중음악 기행, 산악전문가가 이끄는 알프스 등정 등이 이어질 예정이라고 했다.

정 지부장과 여행 기획안을 논의하는 사이, 공항을 떠난 밴은 호텔 앞에 다다랐다. 짐을 옮겨 주며 체크인을 돕겠다는 정 지부장을 정중히 돌려보낸 뒤, 한승은 홀로 객실로 향했다.

리노베이션을 거친 호텔 객실은 깨끗했지만, 나무 창문틀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주석 손잡이를 돌려 창문을 열자 어둠에 휩싸인 튈르리 정원이 눈에 들어온다.

존재조차도 의심스러운 시간을 배회하는 기억이 유난히 또렷해지는 밤이다.

비행기에서 한숨도 이루지 못한 한승은 그대로 곯아떨어져서 아침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여행 상품 개시는 앞으로 일주일 후. 일주일간 한승은 어시스턴트를 만나기 위해 파리에서 지내는 르 꼬르동 블루 출신 한국인 모임에 나가는 것과 투어 오리엔테이션 외에는 별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다.

차라리 약속을 잡을 걸 그랬나?

파리에서 유학할 때는 늘 바쁜 일과를 보냈었다.

추억이든, 비탄이든. 잠길 시간이 없었다.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잔상이 이제 와서 불쑥 튀어나와 머릿속을 헤집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가브리엘 파리노드. 어린 아들에게 대천사의 이름을 빌려다 지어 주셨던 어머니.

아들을 떠나보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여자.

한승은 자신이 속한 세계에 순응하는 법을 이르게 깨우쳤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한승이 파리 유학 이야기를 꺼냈을 때, 집안의 반대가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들은 한승이 그들의 세계를 무너뜨릴 리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한승조차도 이제 그 세계에 완벽하게 속한 일원이니까.

아버지는 파리로 향하는 아들에게 짧게 당부했다.

「네가 차한승이라는 것만 기억하거라.」

가브리엘 파리노드로 살았던 시절은 완전히 잊으라는 말이었다.

한승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버지의 말에 순응했다.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은 잔상으로 남아 있었고, 어머니의 기억은 흐릿했다.

불쑥 기억이 떠오르긴 했어도 궁금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도의적 책임감인지, 핏줄의 의무감인지. 어머니의 생사가 궁금해졌다. 지금 어디서 어떤 얼굴로 살아가고 있을지, 아들을 기억하는지……. 그리워했을지.

지금까지의 삶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감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호텔을 나온 한승은 무작정 걸었다. 젖은 나뭇잎이 돌길에 엉겨 붙어 미끌미끌했다.

“Attention, Gabriel!(조심해, 가브리엘.)”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음 사이로 청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한승의 고개가 저절로 움직였다.

시선이 닿은 곳에서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동양인 여자와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갈색 머리 남자애가 서 있었다. 여자의 복장은 비교적 깨끗했지만, 남자애는 누가 보기에도 난민에 가까웠다.

여자는 아이에게 식료품이 가득 담긴 봉투를 내밀며 주의를 시키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여자를 향해 있었지만, 시선은 불안한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여자가 건넨 식료품 봉투는 꼭 끌어안고, 여자가 하는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여 댔다.

“A demain, Gabriel.(내일 봐, 가브리엘.)”

여자의 마지막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골목 어딘가로 내달렸다. 여자는 아이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여자의 뒷모습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겹치는 것 같아서 한승은 눈을 꾹 감았다.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어머니의 흐릿한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제부터 생각의 흐름을 걷잡을 수 없다. 제멋대로 흘러가는 머릿속을 갈무리하며 눈을 떴을 때, 여자의 투명한 시선이 한승을 향해 있었다.

열 걸음쯤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서로를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뜻 모를 아련함을 느끼는 남자와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눈빛을 가진 여자.

여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천천히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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