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3화 (3/62)

#003

여자의 슬쩍 벌어진 입술이 시선을 끌었다.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과 대조적인 붉은 입술, 불순물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빨강, 하얀 생크림 위에 붉은 석류즙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명료한 색 대비는 찰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입술을 통해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궁금했다.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이 이토록 몰입감을 주었던 적은 없었다.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 생기 가득했던 여자의 눈빛이 삽시간에 가라앉는가 싶더니, 붉은 입술이 다물렸다. 그녀는 모르는 사람에게 건네는 거리감 있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 왔다.

가벼운 인사였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묵직한 분위기가 흘렀다. 한승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여자를 응시하며, 그녀가 했던 것처럼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마주하고 있는 눈빛에 결이 다른 감정이 깃들기 시작한 것도 동시였다. 여자는 눈에 띄게 긴장하고 있었다.

집시를 돕는 그녀를 의심하는 사복 경찰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변명이라도 하려고 입을 뗐다가 이내 다물어 버린 건가?

그녀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한승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국인인가? 혹시 나를 알아본 건가? 알은체를 하려다가 그만둔 걸까?

한국에서 여러 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여행사 프로젝트에 합류할 만큼 인지도 있는 셰프지만, 미디어에 얼굴을 내비치는 일이 없었다. 가끔 한승의 레스토랑에 방문했던 손님이 알아보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여자의 의도를 헤아리는 동안, 그녀는 한승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에게서 달콤한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향에 민감한 한승은 그녀의 잔향이 스치는 대기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저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 한 번 건네고, 스쳐 지나간 거라는 듯이.

그녀의 등에 달라붙은 한승의 시선은 그녀가 모습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 * *

저녁 7시부터 식사가 가능한 레스토랑 La Tour 앞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7시 10분이 넘었는데도 레스토랑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지만, 누구 하나 불만을 품고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누구누구 온다고?”

“셀 수 없이 많이.”

시은은 건성으로 대꾸하며 길가를 살폈다.

“내가 몇 명 오는지 물었어? 누가 오냐고 물었지?”

얼버무린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세현이 투덜거렸다.

“셀 수 없이 많이 오니까, 누가 오는지 일일이 말하기 어렵다는 뜻이잖아.”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며 세현을 나무라는 투였다. 세현은 말끝마다 저를 무시하는 듯한 시은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시은이 세현의 취업을 돕고 있는 터라 화를 내려다 꾹 참았다.

“넌 좀 한군데 진득하게 있을 수 없어? 내가 소개해 주고 면이 서질 않잖아. 이번이 마지막이야. 다음에는 너 못 도와줘.”

아니나 다를까 시은이 일침을 놓았다. 르 꼬르동 블루 더블 디플롬 동기인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모범생에 친화력까지 좋은 시은은 더블 디플롬을 마치고 현재 비즈니스 과정을 밟는 중이었다.

도처에 시은의 인맥이 자리했고, 시은을 통해 일자리를 얻는 동기와 후배뿐 아니라 선배들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6개월 이상은 다녀야 그래도 레쥬메 한 줄은 채우지. 너는 어떻게 3개월을 못 버텨? 이번에는 이유가 뭐야?”

시은이 한심한 시선으로 세현을 바라보았다. 시은의 입장에서 세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류였다. 성실하지도 않고, 미래 계획도 없으며, 한국에 있는 부모 등골 빼먹으면서, 파리에서 셰프로 일한다고 뻐기는 허세 가득한 족속.

그래도 정신 차렸으면 하는 바람에서 일자리를 소개해 주곤 했는데, 세현은 이번에는 정말 잘 해내겠다고 입안의 혀처럼 굴다가도 3개월이 지나면 어김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거기 분위기가 군대가 따로 없더라고. 알잖아. 말끝마다 Oui, Chef!”

“안 그런 데도 있어?”

“예전에 일하던 데는 이 정도는 아니었어.”

그럼 거기 계속 있지 그랬느냐는 말을 해 봤자 입만 아프다.

“와, 차한승이 대단한 놈이긴 한가 봐? 동기고, 선배고, 후배고. 코빼기도 안 보이던 놈들이 다 나오네.”

세현이 저 멀리 몰려오는 무리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읊조렸다.

“말조심해. 선배한테 놈이 뭐냐?”

“뭐 여기 없는데 알 게 뭐야. 차한승이.”

“차한승이 뭐?”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지와 상관없이 시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선배!”

시은은 지나치게 들뜬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돌아섰다.

“오랜만이다.”

선선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인사를 건네는 한승의 모습은 노력이 무색하리만큼 근사했다.

공들여 매만지지 않았는데도 부드럽게 구부러져 흘러내린 머리카락, 무표정일 때는 겁이 날 만큼 차가운 눈이지만, 미소를 머금을 때면 선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 강직한 성정과 닮은 쭉 뻗은 콧날, 그리고 언젠가는 꼭 머금어 보고 싶은 입술까지.

한승의 모든 것이 시은의 가슴을 무자비하게 뒤흔들어 놓았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었는데도 머리 하나가 차이 났다. 한승의 굽어보는 시선에 후배를 향한 애정이 가득했다.

한승이 과정을 마쳐 갈 무렵, 시은이 르 꼬르동 블루에 들어갔기에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했던 시간은 고작 3개월가량이었다. 한승은 근면하고 성실한 태도와 서글서글한 성격을 지닌 시은을 다른 후배들보다 각별하게 대해 주었다.

“안녕하세요, 형! 아니 형 언제 오나, 하고 있었죠.”

한승은 알 만하다는 듯이 세현을 보고 너그럽게 웃었다.

“언제 오셨어요? 어제 도착하신 거예요?”

한승의 스케줄을 누구보다도 훤히 꿰고 있으면서 시은은 시치미를 뚝 떼고 물었다.

“어, 어제.”

다정한 목소리로 대꾸한 한승은 굳게 닫힌 레스토랑 문에 시선을 두었다.

“여긴 여전하네. 벌써 7시 15분인데.”

“요즘 그래도 좀 나아졌어요. 20분이면 열 거예요.”

에펠탑 근처 그흐르넬가에 자리한 레스토랑은 프랑스 남서부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작년 가을 한승의 동기가 프랑스인에게 인수받아 운영 중이었다.

“여길 제집처럼 드나들더니 성공했네, 이태민.”

“그쵸? 여기 셰프가 기본 30분은 늦게 열었잖아요. 그 전통도 지켜 가야 한다면서 태민 선배는 20분에 열어요. 웃기죠? 그래도 10분 빨리 여니까 평은 더 좋아졌다고 하더라고요. 요즘 구글 평점이랑 리뷰에 혈안이 돼서 아주 난리예요.”

시은은 말이 길어지면서 점점 들뜨는 것을 느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좋네.”

한승의 지긋한 시선이 시은을 향했다.

“옛날 생각 나고.”

그저 함께 지지고 볶고 공부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던진 말이었는데, 시은은 속절없이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터틀넥 스웨터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묻으며 가빠진 숨결을 고르는 사이 레스토랑 문이 열렸다.

“Bon soir! 어? 이게 누구야? 차한승! 이야, 나 귀신 본 줄 알았다? 네가 파리에 다 오고 웬일이냐?”

손님을 맞던 태민이 달려 나와 한승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또 나 오는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오버는.”

“그래. 알지, 알아. 우리 왕자님이 오는데, 내가 왜 몰라.”

태민이 너스레를 떨자, 한승은 그렇게 부르지 좀 말라며 투닥거렸다.

“Han!”

테이블로 손님을 안내하던 마리옹이 달려 나와 한승에게 볼을 맞대며 인사를 건넸다.

“어? 한 번, 두 번, 세 번. 마리옹? 너 한승이한테 비쥬 세 번 했어. 이러기야?”

태민이 아내 마리옹의 허리에 팔을 휘감아 안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10년 전부터 La tour의 매니져였던 마리옹은 태민이 레스토랑을 인수하면서 그와 결혼했다.

“하니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세 번!”

“어? 한승! 이라고 부르라고. 발음도 묘해. 하니가 뭐야. 하니가.”

이제 한국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하면서도 마리옹은 태민을 놀리는 재미에 시치미를 뚝 뗐다.

“보기 좋다, 이태민.”

“보기 좋으면, 너도 결혼해라. 아직도 만나는 사람 없어?”

한승은 묵묵부답으로 웃기만 했다.

“아, 이 새끼 진짜 나 좋아했나 봐. 너는 그 피지컬을 그냥 썩힐 거면 다른 사람을 줘. 아니, 그 좋은 물건을 왜 그냥 놀려? 아님, 날 떼 주든지. 그거 주기적으로 써야 병 안 난다. 그냥 두면 큰일 나.”

태민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응? 태민. 하니한테 좋은 물건 있어? 어디서 떼 와?”

“아니, 마리옹. 그게 아니라.”

태민은 한승의 눈치를 슥 보더니 수습을 위해 마리옹을 데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선배, 이쪽이요.”

본의 아니게 한승과 태민의 대화를 엿들은 시은은 한승에게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로 그를 불렀다. 시은은 레스토랑 안쪽에 준비된 공간으로 한승을 이끌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지만, 안에서는 밖이 보이는 반투명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은 마흔 명 정도가 둘러앉을 수 있는 파티룸이었다. 파티룸 안에는 벌써 제법 많은 인원이 들어차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선배. 잘 지내셨죠?”

아페리티프로 나온 샴페인과 오르되브르를 곁들이며 인사가 오고 갔다. 시은은 오랜만에 마주 앉은 한승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어? 오늘 날이 날이긴 한가 보네. 개싸가지 도수아가 다 오고?”

유리벽 밖을 향해 읊조린 세현의 말에 몇몇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한승의 시선도 자연스레 유리벽 밖을 향했다.

“수아 왔네. 내가 데리고 들어와야겠다.”

시은이 종종걸음으로 수아를 맞으러 나갔다.

“도수아.”

한승은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여자의 이름을 가만히 읊어 보았다. 마치 파리의 어스름한 저녁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다.

달빛을 닮은 단정한 낯빛, 붉게 타는 노을을 담은 듯한 입술, 그녀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하며 한승은 한 번 더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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