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형, 도수아 알아요?”
한승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있던 세현이 다가오며 물었다. 주변 테이블에 들릴세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낸 세현의 눈빛에는 부정적인 경계심이 심겨 있었다.
세현은 한승이 그리 좋아하는 후배는 아니었다. 성실하지 못한 태도로 주방에 임하는 것 자체도 탐탁지 않았는데, 늘 뜬소문을 몰고 다니며 그 중심에 서서 허세 부리기를 좋아하는 부류였다.
인생을 대하는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늘만 사는 사람.
그렇다고 한승은 대놓고 싫은 티를 내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싫으면 그만이다. 그것을 일일이 티 내며 고단하게 살 필요는 없다.
한승은 대꾸 없이 세현을 바라보았다. 아느니, 마느니, 미주알고주알 그녀와 마주쳤던 순간을 털어놓을 필요도 없으니까.
세현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세현이 어떤 뜬소문을 물고 와서 털어놓을까, 하는 가십을 향한 관심이 아니다.
저 여자. 도수아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시죠? 저는 갑자기 이름을 부르셔서 형이 아는 줄 알았죠.”
다른 후배들은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는데도, 세현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승에게 형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굴었다.
“형 조심하세요. 쟤 돈 많은 남자 후리는 게.”
세현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예전에 쟤가 만났던 남자가 무슨 중견 건설회사 사장 아들이었대요. 결혼할 여자 있는 남자였는데도, 그 남자 후려서 이리저리 갖고 놀다가 그 남자 여기서 학교도 다 못 마치고 한국 갔잖아요.”
대단한 서사라도 있는 이야기처럼 세현은 과장된 표정을 지어 가며 말을 이었다.
“그 남자 참 불쌍해요. 학교도 못 마치고 한국 가서, 결국 그 약혼녀한테 빌고 빌어서 겨우 결혼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여자네가 뭐랬더라? 어디 저축은행장 막내딸이라고 했는데, 돈 보고 덤비는 년 하나 때문에 앞길 제대로 망칠 뻔한 거죠, 그 남자는.”
세현은 한승의 눈치를 살피며 와인을 홀짝였다.
갑자기 저 세 치 혀에 닿는 와인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세현의 말에 따르면 험한 역사를 가진 쪽은 도수아라는 여자인데, 꼴 보기 싫은 건 앞에 앉은 세현의 밉살맞은 얼굴이다.
“일은 잘돼 가고?”
듣기 싫은 화제를 돌리려 질문을 건넸다. 험담을 즐기는 비겁한 성정도 아니거니와 도수아라는 여자에 대해 떠드는 막돼먹은 이야기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만났던 남자? 후려서 이리저리 갖고 놀아?
몇 달은 옷을 갈아입지 않았을 아이에게 식료품 봉지를 건네고, 길을 건널 때는 좌우를 잘 살펴야 한다는 말을 건넸던 여자의 목소리에 귓가를 맴돌았다.
그리고 알은체를 할까 말까 망설이던 여자의 얼굴도.
아마 이 모임의 일원이었기에 그녀가 자신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한승은 생각했다. 일면식이 없는 상황에서 까마득한 후배가 먼저 알은체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알은체를 했으면 뭐가 달랐을까?
한승이 만약을 가정하며 와인 잔 밑동을 잡고 빙그르르 돌렸다.
“저야 맨날 열심이죠. 아시잖아요, 형. 저 얼마 전에 빈 투 바(Bean to bar) 시스템 있는 쇼콜라 부티크에서 일했거든요. 여러 군데 두루두루 다니면서 다양한 경력을 쌓아야…….”
“얼마나 있었는데?”
거드름을 피우는 세현을 향해 물었다.
“3개월 있으니까, 별로 배울 게 없더라고요.”
한승은 그럴 줄 알았다며 속으로 조소했다. 3개월 일한 거로 경력이 되면 세상 사람들 전부 화려한 커리어를 가지게 될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 이제 어디서 일할 거냐는 질문이 나와야 하는데, 한승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형, 한국은 어때요? 형, 레스토랑 새로 하나 더 낸다는 소문 있던데.”
세현은 적절한 기회를 잡았다는 듯이 치고 들어왔다.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할까 생각하는데, 산뜻한 꽃향기가 비강을 훑고 들어온다. 이제 와인 한 잔 비웠을 뿐인데,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선배, 부탁하셨던 어시스턴트 중 한 명이요. 인사해, 수아야. 차한승 선배님.”
한승은 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시은이 상기된 얼굴로 한승과 수아를 번갈아 보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차한승 선배님. 도수아입니다.”
스치듯 지나갔던 여자가 어시스턴트가 되어 나타났다. 운명의 장난인 것처럼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던 여자가, 한승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건네 왔다.
한승은 시은에게 머물던 시선을 수아에게 옮겨 갔다. 투명한 느낌이 드는 하얀 피부와 대조되는 아찔하게 붉은 입술, 도도해 보이는 콧대와 속쌍꺼풀이 진 기다란 눈매. 마치 고전주의 화가가 그려 놓은 동양 여인의 초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여자다.
“서, 선배.”
아무 말 없이 수아를 올려다보고 있는 한승을 시은이 조용히 불러 일깨웠다.
“어, 반가워요. 나는 차한승. 잘 부탁해요.”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여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딱딱하게 대꾸했다. 긴장감이 역력한 얼굴을 바라보는데, 심장이 기분 좋게 일렁거린다.
평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거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 사람을 긴장시키는 일은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기질인지, 긴장하는 그녀의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까지 저런 얼굴을 할지.
아이를 돕는 여자와 돈 많은 남자를 후리고 다닌다는 여자.
무엇이 그녀의 진면모일까.
“어시스턴트? 무슨 어시스턴트? 야, 시은아. 이게 무슨 소리야?”
세현이 덥석 물며 덤벼들었다.
“선배님이 하시는 일.”
“야, 너. 그런 거 있으면 동기인 나를 불러야지. 왜 도수아를 불러? 형, 저도 가면 안 돼요? 어시스턴트 많으면 좋지 않아요? 얘들 비리비리해서 뭐 무거운 것도 못 들어요. 제가 할게요.”
세현은 난리 법석을 떨며 억울하다는 듯이 읊조렸다.
자기가 억울할 일이 있나, 지금?
“이번에 무거운 거 들을 일은 없을 것 같아서.”
평소 같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가 한승에게서 흘러나오자, 세현뿐 아니라 시은도 다소 놀란 눈빛으로 한승을 바라보았다.
한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진한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너랑은, 다음에 하자, 세현아.”
다정한 말투를 지닌 한승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다들 안심하는 눈치였다.
한 사람, 도수아만 빼고.
한승은 후배들을 둘러보는 것처럼 시선을 돌렸다. 시선 끝에는 당연히 도수아가 걸려들었다.
“시은아.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세현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싫은 내색을 보이는 시은을 데리고 레스토랑 밖으로 향했다.
한승은 본의 아니게 그녀와 단둘이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또다시 두 사람은 서로를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다만 아침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한승의 눈가에는 뜻 모를 여유가, 그녀의 눈가에는 이유를 알고 싶은 긴장감이 엿보였다.
돈 많은 남자 후려서 갖고 노신다?
뜬소문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지만, 그녀를 두고 맹랑하게 떠들어 대던 세현의 야비한 목소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악한 자가 그악한 짓을 저질렀을 때, 세상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선한 자가 그악한 짓을 저질렀거나 그에 준하는 추문을 얻게 되었을 때, 세상은 엄혹한 잣대를 들이밀며 심판하려 든다.
그녀는 심판대에 오른 억울하고 가련한 선한 자일까.
그녀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는다. 붉었던 입술이 하얗게 핏기가 가셨다가 더 빨갛게 물든다. 입술만 보면 악하다. 지나치게 붉다.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서 왜 그냥 지나쳤느냐고 다그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매끈한 하얀 뺨을 붉게 물들이며 당황할까, 기다란 눈매를 촘촘히 메운 속눈썹 끝에 눈물방울을 매달고 훌쩍일까?
여자를 당황하게 만들고, 울리고 싶은 생경한 충동 앞에 한승은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애먼 사람을 괴롭히는 이들을 숱하게 봐 왔다. 그리고 어릴 적에는 그 애먼 사람의 중심에 한승이 서 있었던 적도 있었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악취미는 결코 없었다. 그런 부류에 속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여자는 한승에게 못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저, 그때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당황하실까 봐 인사를 못 드렸어요.”
모른 척하려나 싶었는데, 그녀 쪽에서 먼저 알은체를 해 온다.
“저는 선배님을 알고 있고, 어시스턴트로 뽑힌 상황이었지만…… 선배님은 저에 대해 모르셨으니까요. 갑자기 어시스턴트로 일하게 된 사람이라고 인사드리기엔 너무 갑작스러울 것 같아서,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녀에게서 꽤 긴 말이 흘러나오는 동안, 한승은 그녀가 쏟아 낸 내용보다 청량한 목소리에 더 집중했다.
“이렇게 정식으로 소개받고 인사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인사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언짢으셨다면, 기분 푸셨으면 좋겠어요.”
한승은 저도 모르게 하, 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녀의 기다란 눈매가 동그랗게 변하는가 싶더니, 놀란 눈이 한승을 향했다. 그녀가 건넨 말을 못마땅히 받아들였다고 생각한 눈치다.
남을 괴롭히는 취미는 결코 없다. 후배나 동료 셰프라면 더더욱.
한승은 언제나 너그럽고 선한 선배이자, 동료였다. 누군가를 몰아붙이거나, 못되게 굴어서 상처를 입히는 짓은 해 본 적이 없다.
외양이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당했던 부당한 대우들을 한승은 똑똑히 기억한다. 덮어 놓고 배척하는 치들과 같은 부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름과 변화를 인정할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지닌 사람, 한승이 추구하는 삶의 궁극적인 가치였다.
“내가 그렇게 빡빡한 사람처럼 보였어요? 먼저 인사하는 후배를 고깝게 볼 만큼?”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 그것 외에 분명한 것은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도 변한다. 그게 어떤 충동에 의한 것이든,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어서든 사람도 변하기 마련이다.
한승은 자신에게 묘한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여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먹잇감을 몰아넣고 지켜보는 맹수가 된 기분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를 해하는 맹수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말갛게 젖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비열한 생각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