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5화 (5/62)

#005

아직은 이 여자를 향한 감정의 방향까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신경에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27년간 듣지 못했던 이름을 부르던 여자의 지나치게 청량한 목소리, 안쓰러운 아이를 돕는 선한 눈빛, 은은하지만 속이 울렁거릴 만큼 자극적인 향기, 그리고 딱딱하게 선을 그으면서도 눈에 띄게 긴장한 저 태도까지.

보통과는 분명히 다르다.

“아니요. 선배님을 그렇게 오해한 건 절대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예의가 아니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늘 그렇게 본인 소신대로만 행동합니까?”

그녀의 태도에 흠잡을 것은 없었다. 그런데 흠이 잡고 싶어진다. 아주 연하고 흐릿한 약점이라도 잡아서, 쥐고 흔들고 싶은 비릿한 욕구가 치솟는다.

“저는.”

그녀에게 있어 꽤 결정적인 질문이었나 보다. 이제껏 또박또박 대답을 잘하던 그녀가 잠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인다.

대답을 망설이는 이유가 지적을 당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 뜻을 명확하게 관철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는 것인지.

한승은 집요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제껏 살면서 타인에게 이토록 몰입했던 적은 없었다.

겨우 두 번 얼굴을 보았고, 이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지 15분도 채 되지 않았다. 시간의 물리적 경계가 무색하리만큼 여자의 존재감은 분명했다.

다시 말하지만, 아직은. 왜 이 여자가 삽시간에 이런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소신을 버리는 것은 가장 최후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게 삶의 궁극적 가치는 소신을 지키는 것인가 보다.

“말을 너무 어렵게 하시네.”

그녀의 의중을 알아차렸으면서도, 한승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나 거슬린다. 지나치게 거리를 두고 딱딱하게 구는 여자가 어떻게 하면 허물어질지 궁금하다.

물론 한승도 이제껏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왔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으로.

그런데 이 여자는 한승과 완전히 다른 부류였다.

딱딱하고, 건조하고, 차가워 보이는 여자.

마주 앉은 사람에게는 거북한 거리를 두면서, 거리의 부랑자에게는 선행을 베푸는 아이러니한 여자.

“죄송합니다. 말을 너무 딱딱하게 했네요. 저는 소신껏 사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요. 제 자신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녀는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목을 빳빳이 세운 채로 면접에서 정답을 이야기하는 지원자처럼 굴었다.

“그 소신이 뭔지 궁금하네요.”

한승은 순수한 의문이 어린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입가에 머무는 미소는 추비했다.

“솔직히 내가 시은이는 잘 알거든요? 시은이 일하는 방식에서부터 마인드까지.”

일부러 한승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녀가 더 긴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의도였다.

“근데, 도수아 씨는 시은이한테 일방적으로 소개받은 사람이고, 같이 일하려면…… 그래도 면접 비슷한 거라도 봐야 하지 않겠어요?”

한승은 이제껏 살면서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수작을 부려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이미 함께 일하기로 한 내정자에게 면접을 빌미로 꾀어내는 기가 막힐 일을 벌인 적은 결코.

“아무래도 그렇겠죠?”

깍듯이 예의를 차리면서도 내내 당당하던 여자의 얼굴에 고민하는 기색이 어린다.

“내일 따로 봅시다.”

사무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평소보다 훨씬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다.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는 그녀의 시선이 한승에게 닿아 있었다.

얼음을 깨부수는 얼음송곳처럼 그녀의 시선 끝이 차갑게 얼어붙은 한승의 얼굴을 녹일 듯 찔러 댔다.

* * *

「아침 식사 시간에 보는 게 좋겠네요. 장소는 도수아 씨가 정해서 알려 주고.」

마치 면접관으로서 그녀의 취향을 가늠해 보겠다는 듯이 건넨 말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녀의 취향이 궁금한 것은 사실, 단지 면접관으로서가 아닌 인간 차한승이 갖는 호기심이었다.

“일찍 오셨네요? 죄송해요.”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내쉬며 그녀가 다가왔다.

바람결에 부드럽게 헝클어진 긴 머리카락, 발갛게 상기된 두 뺨, 덩달아 달아오른 붉은 입술과 가쁘게 내뱉는 숨결에 섞인 청량한 목소리까지.

“오래 기다리셨어요? 일찍 나왔는데, 오늘 지하철 파업이 있는지 엉망이더라고요.”

가만히 있으면 오래도록 시선을 붙들 것 같은 그녀에게서 가까스로 눈을 뗀 한승은 짧게 대꾸했다.

“오래 안 기다렸어요.”

그녀가 만나자고 한 곳은 하필 지하철 역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 앞이었다. 지극히 대중적이라 취향을 파악할 수 없는 곳이다.

“아직 아침 식사 안 하신 거 맞죠?”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재차 묻는다.

“좀 걸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이번에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어색하게 웃는다.

갑작스럽게 웃는 얼굴이 낯설다. 아이를 걱정하는 얼굴, 선배를 마주하고 얼어붙은 얼굴은 봤어도 이렇게 웃음기가 어린 얼굴은 처음이다. 생경함 앞에 심장이 제멋대로 반응했다.

5분쯤 걸었을까, 그녀는 허름한 제과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한승을 만나자고 한 곳은 생제르맹데프레 지역, 파리 시내에서 비교적 관광객이 적은 곳이어서 한승도 유학 시절 자주 왔던 동네이기도 하다.

“혹시 여기 와 보셨어요?”

한승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자 그녀가 안도하는 얼굴로 읊조렸다.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입니까?”

“오늘 제 안목 보시려고 아침 식사 때 보자고 하신 거잖아요. 그런데 선배님이 이미 알고 계신 곳으로 안내하면 안 되잖아요. 물론 선배님과 안목이 비슷하다는 점이 플러스 점수가 될 수도 있지만, 저는 저만 알고 있는 특별한 곳으로 안내해 드리고 싶었거든요.”

긴장했는지 여자의 말이 점점 길어졌다.

“오랜만에 파리에 오셨는데, 영감을 얻어 갈 수 있는 새로운 장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선배님이 여기 처음 오시는 걸 다행이라고 한 겁니다.”

똑 부러지는 대답에 한승은 저도 모르게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그녀의 얼굴빛이 아주 조금 환해진다.

그녀는 한승의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점은 마음에 들었지만, 환한 미소조차도 노력의 산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영 마음에 차질 않는다.

내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웃는 것도 기껍지 않은가?

“들어가실까요?”

삐걱거리는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소한 빵 냄새가 풍긴다.

“여기 빵은 보르도 지역 밀을 이용해서 만드는데요. 오븐이 아닌 지하 화덕에서 빵을 구워요. 아직도 중세 방식을 그대로 사용해서 빵을 굽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중세시대부터 있었던 곳은 아니고요. 생긴 지는 123년 되었어요. 지금은 창업자의 손주 며느리가 운영 중이고요.”

제과점 안은 서너 평 될까 말까 한 크기였다.

“바게트도 맛있지만, 여긴 딱뜨 오 뽐므(Tarte aux pommes: 사과 타르트)가 맛있어요. 고온의 화덕에서 빵을 구울 수 있는 환경이어서, 오븐에 구울 때처럼 사과를 얇게 저미지 않고 뭉텅뭉텅 썰어서 넣어요. 폭신한 빵에 가까운 타르트예요.”

단골은 맞는지 그녀를 알아본 직원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직원을 향해 상냥하게 인사하고는 다시 한승을 돌아보았다.

“이거 드셔 보시겠어요?”

한승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그녀는 또다시 당황스러울 정도로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직원은 사과 타르트 두 개를 쟁반에 담아서 카운터로 가져가 포장을 시작했다.

“수아, 오랜만이네.”

카운터 안쪽 공간에서 나타난 프랑스 여인이 그녀에게 알은체하며 다가왔다. 원래는 갈색이었을 머리가 세월에 탈색되어 희끗희끗했다. 50대 중반은 되었으려나. 깡마른 프랑스 여인은 유창한 한국어로 그녀를 반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벨.”

이사벨이라 불린 여인은 한승을 한 번 흘끗 보더니,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묻는다.

“누구? 남자 친구?”

그녀는 당황스러운지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서는 아니라며 손사래를 쳐 댔다.

“아니요, 이사벨! 이분은 제 선배님이세요. 한국에서 유명한 셰프고요.”

“처음 뵙겠습니다. 차한승입니다.”

한승이 시의적절하게 끼어들었다. 그녀는 한승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는지 어깻숨을 내쉬며 안도했다.

내내 그녀를 향해 있던 이사벨의 시선이 한승을 향해 움직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대조적으로 이사벨의 눈동자는 검고 투명했다. 감정을 비워 낸 듯 텅 빈 눈빛. 한승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이사벨의 시선을 가만히 받아 냈다.

“차한승 씨.”

이사벨은 한승의 이름을 부르고는 잠시 숨을 골랐다.

“만나서 반가워요.”

은은한 미소가 깃든 전형적인 인사에 한승은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제과점 직원이 포장한 빵을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한승이 습관적으로 카운터 위에 놓인 제과점 명함을 집으려 손을 뻗는데, 그녀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면접 보러 오는 사람이 돈 쓰는 경우도 있습니까?”

그녀가 분홍색 반지갑을 손에 든 채로 머뭇거렸다. 한승이 카운터 쪽으로 신용카드를 내밀자, 그녀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비싼 데 갈 걸 그랬다. 그런 생각 합니까?”

긴장 좀 풀어 보라고 건넨 농담이었는데, 그녀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그녀의 취향은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가벼운 농담도 잘 통하지 않는 고지식한 성격이라는 것은 알겠다.

아니면 나한테만 이러는 건가?

어제 레스토랑에서 지켜본 바, 그녀는 다른 후배들과는 별 탈 없이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까마득한 선배이고, 처음 보는 얼굴이라도 그렇지. 그녀는 한승 앞에서 지나치게 긴장했고, 오묘하다 싶을 만큼의 거리를 두었다. 심지어 환하게 짓는 미소조차도 가식적으로 느껴질 만큼 어색하다.

그리고 그게 한승의 신경을 한껏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듯했다.

계산을 마치고, 무심코 옮기던 시선 끝에 제과점 명함이 걸려들었다.

미색 종이 위에 정갈하게 새겨진 제과점 사장의 이름은 이사벨 파리노드(Isabelle Parinaud)였다.

붉게 충혈된 한승의 눈동자가 마주 선 이사벨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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