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같은 성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저 어머니의 성과 똑같은 성을 가진 완벽한 타인일 수도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승은 마주 선 이사벨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꼭꼭 숨겨진 교점을 찾을 요량으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집요함이 서렸다.
닮았나? 나와 닮은 구석이 한 군데라도 있을까? 손주 며느리라고 했던가? 그럼 결혼하고 나서 남편 성인 파리노드를 사용하는 것일까?
평소답지 않은 초조함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간절함을 숨기고 살았던 것처럼 처절한 기분이 들 정도다. 이성을 완전히 잃기 전, 이사벨이 선한 목소리로 묻는다.
“차한승 씨, 파리에는 처음 오셨나요?”
한국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유창한 한국어였다. 한승은 건조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요. 전에 파리에서 공부했습니다. 졸업한 이후로는 처음이고요.”
이사벨의 얼굴에 친절한 미소가 어렸다.
“오랜만에 파리에 온 감상은 어떤가요?”
누구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인데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같은 질문을 대도 여행사의 정 지부장도 했었는데, 그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의도, 질문에 담긴 의도가 달라서일까? 이사벨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런 목소리를 내는 걸까?
한승의 머릿속에 어쩔 수 없이 저를 낳아 준 모친의 이름이 되새겨진다.
까뜨린느 파리노드.
착각일 수도 있다. 성이 같은 중년의 여자가 묻는 말에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느끼는 것은 과거에 기인한 한승만의 착각일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간절히 묻고 싶어진다. 혹시 까뜨린느 파리노드라는 여자를 아느냐고.
“달라진 게 없네요. 파리는 늘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오랜 시간을 되짚는 것처럼 아득한 말투였다. 이사벨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변하는 건 이곳에 사는 사람들뿐이죠. 파리는 늘 그대로예요. 예나 지금이나.”
한승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한 이사벨은 투박한 모양의 쿠키가 담긴 봉투를 하나 집어서 종이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이건 오랜만에 파리에 왔다는 우리 수아 선배에게 주는 내 선물. 화덕에서 구운 거라 쿠키 색깔이 고르지 않아요. 하지만 맛은 차이 없다는 거 셰프니까 알죠?”
한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봉투를 받아 들었다. 수아는 차분하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의문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Merci, au revoir!(고마워요, 또 봐요.)”
제과점을 나서는데, 전형적인 작별 인사가 한승의 뒷덜미를 잡고 늘어졌다. 당장에 돌아서서 모친의 이름을 입에 올리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하지만 곁에는 완전한 타인이 자리하고 있다. 한승이 구축해 온 견고한 세계 속에 속한 후배 도수아는 영문 모를 얼굴로 한승을 올려다보았다.
“근처에 키슈(quiche: 페이스트리 반죽 위에 달걀을 주재료로 한 부재료를 넣어 구운 요리. 에그타르트와 비슷하나 타르트 속 식감은 달걀찜에 가까움.)랑 커피가 괜찮은 비스트로가 있어요. 야외석에서는 다른 데서 사 온 음식도 같이 먹을 수 있는데, 거기로 가실까요?”
그녀는 오늘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는 의지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당장에는 해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다. 그리고 섣불리 문제로 삼는 것조차 우스울 만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혹시 여기 와 보셨어요?”
그녀는 제과점에서 했던 질문을 그대로 반복했다. 한승은 대답 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이사벨 파리노드가 운영하는 제과점에서 멀어지자, 온몸에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어져 버렸다.
“다행이네요. 여긴 비스트로지만, 이 동네에서 유명한 프랑스 반찬 가게이기도 해요. 다양한 종류의 키슈도 팔고요, 거기에 곁들일 샐러드도 많아요. 커피랑 차도 맛있고요. 여기 카운터에서 주문하고 밖에서 기다리면 가져다줘요.”
“알아서 주문해 줘요. 난 밖에 있을 테니까.”
간신히 목소리를 낸 한승은 가게 입구 반대편에 있는 문으로 향했다.
오래된 나무 문을 밀고 나가자, 작은 공원을 마주한 야외석이 나타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테이블은 전부 비어 있다.
텅 빈 자리에 맺힌 공허함에 한승은 한숨을 머금으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평일 아침의 공원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공원 전체가 다 보일 정도로 작은 공원에는 아이들을 위해 밧줄로 엮어 놓은 정글짐과 벤치 몇 개가 전부였다.
저런 공원을 산책했던 적도 있었을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다. 기억해 내려 애쓴 적도 없었지만, 잊으려 애쓰지도 않았다. 너무 어렸을 때 헤어졌기에 애초에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언젠가 어머니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상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기억에 없으니 지나친 감정도 남아 있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같은 성을 가진 비슷한 연령대의 중년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만으로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갈 만큼 지쳐 버렸다.
무엇에 이토록 지쳐 버린 걸까?
한승은 저도 모르게 자조했다. 아닌 척하면서 그리웠던 거다. 버렸다고 원망하면서도 찾고 싶었던 거다. 반가워서 친모를 아느냐고 달려들고 싶으면서도, 겁이 났던 거다.
잊혔을까 봐.
혼혈이라는 이유로 주변의 눈총을 받고, 따돌림을 당하기는 했어도, 집안에서만큼은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원래부터 자신이 길렀던 자식처럼 대해 주셨고, 새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자식과 동등한 위치에 서도록 한승을 독려했다.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거나 다름없었지만, 공허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친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안고 징징거리는 머저리는 아니었지만, 태생적 결핍은 불쑥 나타나 손쓸 수 없는 고독감을 안겨 주곤 했다.
“구운 베이컨 들어간 키슈로 샀어요. 안색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 커피 말고 페퍼민트 차로 샀는데…… 괜찮으시죠?”
그녀는 아까처럼 만들어 낸 미소를 머금은 채로 한승과 마주 앉았다. 기분이 뾰족해진 탓인지 화살이 괜한 곳을 향했다.
“도수아 씨.”
날카로운 부름에 그녀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한승을 바라본다.
“네, 선배님.”
어색한 웃음기마저 사라진 얼굴은 어제처럼 딱딱하고 차가워 보였다. 차라리 억지 미소라도 짓고 있는 편이 낫다 싶을 만큼 건조한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제 심장마저 말라 버리는 기분이다.
“그렇게 말끝마다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거, 피곤하지 않습니까?”
한승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불편한 심기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안색이 좋지 않으셔서요.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으셨을 텐데, 저 때문에 아침부터 무리해서 나오셨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착각을 잘 하는 성격인가 본데.”
“네?”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되물었다. 당황해서 빨개진 얼굴, 한승은 눈을 질끈 감으며 대꾸했다.
“내가 단지 도수아 씨 때문에 여기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까? 도수아 씨가 아니어도 나는 오늘 여기 나왔을 겁니다.”
비뚤어진 심리,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경을 거스르는 도수아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입니다. 내가 어시스턴트 하나에도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르겠습니까?”
평소였다면 시은이 소개해 준 어시스턴트라면 그냥 믿고 일을 진행했을 것이다. 어차피 헤드 어시스턴트는 시은이 맡을 거였고, 그 아래 역할을 맡을 사람이 수아였다. 거기까지 한승의 손이 닿을 필요조차 없었다.
손이 닿고 싶은 곳은, 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이사벨 파리노드와는 얼마나 친한지, 혹시 그녀에게 까뜨린드 파리노드라는 이름을 가진 가족이 있는지……. 이사벨 파리노드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혹시 이사벨 파리노드의 미들 네임이 까뜨린느인 건 아닌지.
그 질문을 쏟아부으려면 명분이 필요했다. 왜 궁금해하는지 이유가 필요했다. 솔직히 말할 게 아니라면 내세울 만한 명분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죄 없는 도수아에게 쏟아붓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상대가 도수아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쉬웠을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를 머금으며 ‘프랑스인인데 한국어를 잘하네?’ 하고 자연스레 물었을 것이다.
왜, 이 여자한테는 그게 되질 않는 걸까?
해답은 빠르게 튀어나왔다.
숨기고 싶어서.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
소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여자의 뜻을 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과거를 다 털어놓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의 신념을 따르고, 그녀에게 자신의 치부를 감추는 것.
나는 이 여자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건가?
은연중에 신경 쓰이는 여자에게 무의식적으로 잘 보이고 싶었던 나머지, 이제는 그녀의 관심이라도 끌어 보려고 못되게 굴고 있나? 이건 너무 유아기적 감정에 기초한 거 아닌가?
한승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배님.”
그녀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한승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사는 다음에 하죠.”
냉랭하게 돌아섰다.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골목 하나를 빠져나온 한승은 재킷 주머니에 있는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곧장 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시은아. 어시스턴트 다시 구해야겠다. 도수아는 안 되겠어.”
차한승이라는 껍데기 속에 꼭꼭 숨겨 두었던 가브리엘 파리노드를 끄집어내려는 여자를 밀어내자고 마음먹은 순간, 비겁한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수아는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음식을 잠시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마치 혼이 나간 듯한 기분이다. 그가 홀연히 떠난 텅 빈 의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차한승, 듣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