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8화 (8/62)

#008

신호음이 두 번쯤 울렸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짧은 응대에 긴장감이 밀려들었다. 수아는 주눅 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담담한 목소리를 냈다.

“저, 도수아입니다.”

― 알아요.

피로감 가득한 대꾸가 이어졌다. 고작 전화 한 통 했을 뿐인데, 그는 마치 수아가 스토킹이라도 해 대는 것 같은 투로 대꾸했다.

“방금 시은 선배 전화받았어요.”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듯이 한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린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간절하게 매달려야 하는 상황이지만 수아의 목소리도 부드럽게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너무 딱딱하게 이야기했나 싶으면서도, 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하다는 인간이 자신에게만 고깝게 구는 게 못마땅해서 괜히 억울해졌다.

아버지의 곧은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은 수아는 어릴 때부터 부당한 일을 겪는 것을 참지 못했다. 불의를 보면 나서야 했고, 정의를 위해 소신껏 행동하는 일에 거침이 없었다.

그 때문에 국회의원이 된 아버지 곁을 지키지 못하고 프랑스까지 오게 되었지만,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버지 곁을 지키지 못한 것이니, 엎어치나 매치나.

그러니 만인에게 선한 사람인 그가 자신에게만 유독 까칠하게 구는 데, 약간은 울화가 치미는 것도 같았다.

― 무슨 기회를 말하는 겁니까?

나직이 가라앉은 목소리에서 신경질이 묻어난다.

히스테릭한 성격을 꼭꼭 숨기고 사셨나. 히스테리의 맹점을 내가 건드린 건가?

수아는 산란한 머리를 가볍게 털어내며, 이성적인 사고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를 증명할 기회를 한 번 더 주셨으면 합니다.”

프로젝트가 코앞인데, 짧은 시간 내에 마땅한 사람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옳은 말이었으나, 그가 들어서 기분 나빠할 말이기도 했다.

― 증명할 기회를 달라……. 오늘 주지 않았나?

그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한숨이 비어져 나올 것 같아서 수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가 자주 가는 제과점과 비스트로를 소개해 드렸을 뿐, 저를 증명할 기회는 없었습니다. 면접을 치르겠다고 하셨지만, 저의 소신이나 직업적 각오를 묻는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충분한 기회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을 할수록 속도가 빨라졌다. 감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지만, 억울함이 슬쩍 묻어나기까지 했다.

― 지금.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더욱 깊게 가라앉는다.

지금?

수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귀를 기울였다.

― 웁니까?

이어진 질문에 수아는 황당해졌다. 그저 말이 조금 빨라졌을 뿐인데, 징징거리느냐고 다그치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요. 안 우는데요.”

수화기 너머에서 ‘흐음.’ 하고 짙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이어졌다.

― 이따 저녁때 봅시다.

그는 수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수아는 혀를 쯧 차며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상대하기 껄끄러운 것은 분명했다. 다들 능력 있는 편한 선배라고 칭송하기 바쁘던데, 그를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였다.

수아는 걱정을 싸매고 있을 시은을 안심시키기 위해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니 안도하기엔 이를 수도 있지만, 일을 소개해 준 사람에게 진척 상황을 알려야 했다.

[언니, 오늘 저녁에 한승 선배랑 다시 만나기로 했어요. 잘 이야기해 볼게요. 언니가 소개해 준 일인데, 저 때문에 일이 꼬인 것 같아서 죄송해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시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네가 죄송하긴 왜 죄송해.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한승 선배 어디서 보기로 했어?

“아직 장소랑 시간은 안 정했고요. 그냥 저녁에 보자는 말씀만 하셨어요.”

시은은 자기도 다시 한 번 통화해 보겠다며 수아를 달래려 애썼다.

― 어머님 검사가 언제랬지? 다다음주?

“네.”

― 이거 안 되면, 다른 일 알아봐 줄게. 아니면 내가 빌려줄게, 수아야. 걱정 마, 응?

자신도 빠듯한 형편에 공부를 이어 가고 있으면서, 돈을 빌려주겠다는 시은의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감사합니다.”

― 기운 내. 잘될 거야.

통화를 마친 수아는 그와 함께 먹으려던 음식이 포장된 봉투를 들고 비스트로를 나섰다. 듣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남자와 저녁에 다시 마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체기가 인다.

그를 다시 만나기로 한 곳은 팔레 루아얄 근처에 있는 타파스 바(Tapas Bar)였다. 여러 가지 종류의 음식이 소량으로 서빙되는데, 그중에서도 마늘 버터 소스를 곁들인 맛조개 요리가 인기였다.

아침과 달리 그는 수아가 권해 주는 음식을 주문하고 접시를 모두 비울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꼬리를 잡아 물며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평범한 질문에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예민하게 굴지도 않았다.

그 덕에 수아는 애써 미소 지으려고 입가에 경련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었고, 비교적 편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사실 아침에 그와 헤어진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시은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신경이 쓰여서 좀처럼 뭘 넘기기가 힘들었다.

냅킨 끝으로 입가를 닦는 그를 바라보는데, 서늘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수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찍 늘리며 미소를 머금었다.

“눈은 안 웃고 있는 거 압니까?”

수아는 기다란 눈매가 사르륵 접히도록 웃어 보였다.

“억지로 웃지 말라는 말인데요.”

위장으로 향하던 타파스가 솟구치는 듯하다. 예민하게 굴지 않는다는 말도 취소다.

수아는 어색하게 표정을 풀며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내가 불편합니까?”

그걸 말이라고? 되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불편하지 않다는 거짓말을 하려는데, 그가 더 빨랐다.

“피차 불편한데, 왜 굳이 나랑 이 일을 하려고 해요?”

이 말인즉, 그는 지금 수아가 불편하다는 의미였다. 대체 어떤 부분에서 자신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수아는 애써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려 노력했다.

“선배님께 배울 게 많으니까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말일 겁니다.”

배울 게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기는 했으니 거짓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에는 이 일을 통한 돈이 더 급하다.

“아, 배울 게 많으니까 불편해도 견디겠다? 고작 3주인데, 뭐 배울 게 있겠어요?”

왜 그렇게 삐딱하게 구느냐 묻고 싶은 것을 또 꾹 참았다.

“르 꼬르동 블루에는 하루짜리 특강도 있는걸요.”

“그건 교수님들이 가르치는 거고.”

“저에겐 선배님도 그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아, 이건 너무 나갔나 싶다.

“교수님들 들으시면 서운하시겠어요.”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는지, 그의 얼굴에 언뜻 미소가 번지는 듯했다.

“선배님이시라면 아마 수긍하실 겁니다.”

본심을 숨긴 가식적인 대화만 이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갑갑했다.

“되도록 내 눈에 안 띄었으면 합니다.”

그는 다가온 서버에게 신용카드를 건네며 미소 짓고는 수아를 향해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네?”

마치 누아르 영화에서나 볼 법한 대사 같았다. 눈에 띄지 말라는 경고조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난감했다.

“주된 업무는 시은이가 진행하도록 두고, 그쪽은 시은이 어시스트 잘 하길 바랍니다. 그럼.”

그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아는 그가 정갈하게 접어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냅킨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용한 냅킨도 곱게 접어 놓는 남자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로 무례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일시적이기는 하나 아무리 고용주의 입장에 있다고 하더라도 부당한 대우였다.

눈에 띄지 말라고?

열불이 날 것처럼 가슴이 타들어 갔다. 마음 같아서는 이깟 일 안 한다고 때려치우고 싶다.

하지만 배울 게 많은 사람인 것도 분명했고, 이제 막 인턴을 끝낸 수아가 당장에 이런 목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차일피일 병원 가기를 미루며 마음고생할 엄마를 떠올리자, 가슴이 시큰해진다.

그래, 까짓거. 눈에 안 띄면 되는 거잖아.

부당한 대우를 조금 받았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 그가 눈에 띄지 말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명예가 땅바닥에 떨어진 것도 아니다.

수아는 이런 면에서는 자신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엄마를 닮았다고 생각하며 자조했다.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딸 수아를 위해서라면.

몸이 부서지는 것도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그런 엄마를 위해 싫은 소리 잠깐 듣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수아.

그 엄마에 그 딸이다.

당장 내일부터 프로젝트를 위한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된다.

눈에 띄지 말라고 했는데, 이번 일만 지나면 다시는 보지 않아도 무방한 사이인데…….

뭐가 잘못된 건지도 모르면서 만회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 * *

“첫날 저녁 세느강 디너 크루즈가 첫 일정입니다. 여기서 시연하는 요리는 없고요. 저녁 식사를 하면서 대면식을 갖는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 지부장의 설명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눈에 띄지 말라고 했지만, 오리엔테이션 자리를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시은과 마주 앉았고, 수아는 그의 대각선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이거 지난번에 나한테 메뉴 보내 준 거 맞지?”

그의 질문에 시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네, 맞아요. 선배.”

“준비하라는 메뉴 카드는?”

식사를 마친 뒤, 여행객에게 그날 저녁 식사의 전체 메뉴가 적힌 카드가 제공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메뉴 카드와 관련한 업무 진행을 맡은 사람은 수아였다.

“제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기 시안 샘플입니다.”

내내 태블릿 PC를 향해있던 그의 시선이 수아를 향해 움직였다. 더없이 차가운 눈빛, 불쾌감마저 어린 눈동자가 심장을 쿡 쑤시고 들어와서, 순간 울컥 억울함이 치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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