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
“수아가 열심히 한다고요. 그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한승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는 잠시 내뱉기를 멈추었다.
프로젝트가 결정되고 나서 급하게 프랑스 현지 어시스턴트를 요청했다. 그랜드 셰프인 한승이 자리를 비우는 마당에 레스토랑에 있는 인원을 빼 올 수는 없었다.
3주간 현지에서 자신을 도울 어시스턴트를 구한다는 말에 시은은 흔쾌히 응했다. 거기에 이제 막 디플롬을 마친 유능한 후배를 데려오기까지 했다.
물론 그들에게는 한승과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했다는 사실이 경력에 도움이 될 테지만, 시은이 바빠서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일을 처리해 왔다는 그녀와 시은 모두 한승이 한없이 고마워해야 할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역성을 드는 시은을 마주하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알았다. 신경 쓸게.”
“감사합니다, 선배.”
“감사는 무슨. 내가 고맙지.”
그게 무슨 어려운 말이라고 귀까지 붉히는지, 한승은 당황한 시은의 어깨를 가만히 도닥여 주었다.
“어? 두 분 왜 나와 계세요?”
정 지부장이 두 손 가득 간식거리를 들고 오며 야릇한 투로 물었다.
“잠깐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회의 시작하죠.”
“네, 네. 그래야죠.”
흐뭇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훑은 정 지부장은 앞장서서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 테이블에 간식거리를 내려놓은 정 지부장은 호쾌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모쪼록 훌륭하신 셰프님들과 함께 일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프로젝트 마무리될 때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이끄는 정 지부장 덕에 회의실 공기가 한결 가벼워졌다.
한승은 정 지부장이 사 온 음료 캔을 하나 따서 수아에게 건넸다. 그녀의 시선이 음료수 캔을 따라 한승의 팔을 훑더니 마침내 얼굴에 닿았다.
의아함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한승은 그녀의 앞에 음료수 캔을 내려놓은 뒤, 또 다른 하나를 따서 시은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한승은 이렇게 자연스럽게 받으면 되는 거라는 듯이 수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또 입만 웃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목소리를 냈다.
“감사합니다.”
순간 눈은 안 웃고 있는 걸 아느냐고 지적하자 사르르 눈웃음을 지었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 한승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러자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에 오묘한 빛이 어린다.
비강을 찌를 듯한 내음을 풍기고 다니면서, 가향 제품은 쓰지 않는다고 우기는 여자.
신경을 있는 대로 건드려 놓고, 자신이 더 억울하다는 듯이 쏘아보는 여자.
하긴 신경을 쓴 것도, 복잡한 개인사를 대입해서 예민하게 군 것도, 그녀가 풍기는 향기에 반응을 보인 것도 한승이었다.
그녀는 시은이 말했던 대로 그저 묵묵히 제 자리에서 열심히 일했을 뿐이다.
“잘해 봅시다, 앞으로.”
이 말만큼은 진심이다. 자신을 제멋대로 뒤흔들어 놓는 여자의 존재감을 지우려 일에서 배제하고자 했었지만, 지금은 진심이다.
눈치가 빠르고 기민한 사람 같았다. 철두철미하게 준비했다고는 하지만 성에 차지 않아서 갑갑한 속을 들여다본 사람도, 이 회의실에서 그녀가 유일했다.
지금쯤 수아는 한승이 그녀를 보통 후배들과는 다르게 대했다는 것을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만회하고 싶은가? 모르겠다.
저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아직 감이 서질 않는다. 분명한 것은 다르다는 것뿐이다. 여타 후배들을 대할 때와는 분명히 다르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시은이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먼저 대꾸를 해 왔다. 한승은 시은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겨 갔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 특유의 청량한 음성이 회의실을 조용히 울렸다.
“셰프님.”
이어진 그녀의 단정한 부름에 한승은 마치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른 후배들과 다르게 대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지했다는 듯이 그녀는 ‘선배님’이 아닌, ‘셰프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한승의 한쪽 입가가 비스듬히 호선을 그렸다. 앞으로 프랑스에서 머물 한 달여의 시간 동안 지루해질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여자가 눈앞에 있는 한.
* * *
회의는 밤 9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늦었으니 꼭 택시를 타고 귀가하라며 정 지부장이 소정의 교통비가 담긴 봉투를 건네주었지만, 수아는 시은과 함께 나란히 지하철에 올랐다.
“이렇게 소소하게 들어오는 지원금도 쏠쏠할 거야.”
“그러네요. 택시비라고 넣어 준 돈이 꽤 돼요.”
50유로, 이 정도면 파리 북부에서 샤를 드골 공항까지 갈 수 있는 택시 정액 요금이다.
“교통비, 식사비 다 지원되니까. 조금 아껴서 쓰면 3주 동안 한 달 생활비도 모을 수 있겠다. 그치?”
시은의 물음에 수아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갈아타는 역에서 시은이 내리고 난 뒤, 수아는 두 정거장을 더 가서 지하철에서 내렸다.
치안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유학 초기에는 택시를 타는 일도 더러 있었지만,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요령을 터득하고 난 뒤로는 늦은 시각에도 지하철을 이용했다. 비교적 한국인이 많이 사는 15구 역 근처에 운 좋게 한국인이 세를 놓은 방을 얻은 뒤로는 택시를 타는 일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숙소 주변에는 자정까지 운영하는 바가 여러 개 있었고, 오가는 사람이 많아서 비교적 안전했다. 하지만 발걸음과 경계를 늦추는 일은 없었다. 언제 어디서 누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것은 서울이나 파리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처럼.
“이제 들어가? 늦었다. 도수아.”
그늘진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은 세현이었다. 수아는 저도 모르게 슬쩍 뒷걸음질 쳤다. 세현이 이곳까지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여긴 어떻게…….”
뻔히 알면서 물었다. 그의 목적은 도수아, 자신이었다.
“아, 그냥 지나는 길에 너랑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있더라고. 근데 너무 늦게 혼자 다니는 거 아냐?”
“지금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이 근처 살아?”
세현은 아직 수아가 어느 건물에 사는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아뇨. 이 근처에 어학연수 같이했던 친구가 살아서요. 잠깐 만나러 왔다가 이제 집에 가려고요.”
“그렇구나. 어학연수 같이했던 친구면, 성헌이 형도 아는 애 아냐?”
의심 가득한 목소리로 읊조린 이름은 수아의 전 남자 친구였다. 사실 전 남자 친구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관계다. 죽자 사자 쫓아다녔던 성헌과 사귀면서 만난 건 딱 두 번? 이제 두 번이었는지, 세 번이었는지도 헷갈릴 정도다.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래? 다행이다. 그 자식 진짜 나쁜 놈이었잖아. 그놈하고 알고 지내는 친구면, 이제 만나지 말라고 하려고 했지. 그놈한테 네 소식 들어가는 거 나는 괜히 싫더라.”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길게 흘러내렸다. 세현이 한 발짝 다가오는가 싶더니 수아의 머리카락 끝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머리카락에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전신이 소름이 돋아날 만큼 끔찍했다.
“너 그렇게 말할 때마다 진짜 나 서운하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세현은 속이 상해서 죽을 것 같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말한 거는 생각해 봤어?”
셀 수 없이 거절했는데도, 세현은 거절의 말은 못 들었다는 듯이 다시 다가왔다.
처음 세현이 고백을 해 온 것은 수아가 처음 모임에 나간 날이었다. 그때는 성헌의 성화로 어설픈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터라, 남자 친구가 있다는 말로 거절했었다.
성헌과 헤어졌다는 소문이 돈 후, 세현은 재차 고백을 해왔다.
“죄송해요, 선배님.”
“하아, 배성헌 개새끼. 그 새끼가 대체 너한테 얼마나 상처를 준 거야? 내가 그 새끼 죽여 줄까? 하아, 시발 새끼. 좋아하는 남자가 고백하는데,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상스러운 욕을 아무렇지 않게 뇌까리며 세현은 분개했다. 자신이 수아에게 거절당하는 이유가 성헌에게 입은 상처에 기인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수아 역시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단단히 착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아는 성헌에게 상처를 입은 적도, 이렇다 할 연애 비슷한 것도 한 적이 없었다. 또 세현을 좋아하기는커녕 피해 다니기 바빴다.
그동안 모임에 나가지 않은 것도 세현 때문이었다. 차한승 셰프와의 일이 아니었다면, 이번에도 모임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모임에서 네 얼굴 보니까 좋더라. 너도 나 많이 보고 싶었지?”
애틋한 얼굴로 묻는 말에 대꾸하기가 힘들다. 위태로운 세현의 눈빛은 두렵기까지 하다. 한동안 잘 피해 다녔고, 먼저 연락 오는 일이 없었기에 이제 끝이 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모임에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다른 곳에서 대면식을 하자고 할 걸 그랬다.
언젠가 시은에게 세현이 고백했다는 말을 한 적 있었다.
「걔는 고백 안 한 여자가 없을 거다.」
시은은 별스럽지 않은 일이라며 웃어넘겼다. 세현이 집요하게 달라붙는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이제껏 위협적인 상황은 없었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여겼다.
사실 유학 생활을 하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일을 당하고 있으니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누구든 혼자였고, 누구든 기댈 곳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집 앞에 찾아온 세현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불길함에 정수리까지 쭈뼛 섰다.
시은에게만이라도 사실대로 털어놓을 걸 그랬나? 지금 도움을 요청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머리카락을 잡은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려 수아는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끝에서 머리카락이 스르륵 빠져나왔다.
제발 누가 전화라도 걸어 줬으면 좋겠다.
수아는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 온 시늉이라도 해 볼까 생각했다. 단둘이 있을 때는 무섭게 달라붙으면서, 제삼자가 끼어들면 세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제발 전화 한 통만.
마음속으로 간절히 비는 소리를 누군가 들었을까?
거짓말처럼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차한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