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11화 (11/62)

#011

수아는 떨지 않으려 노력하며 휴대전화 화면을 응시했다. 왜 하필 이 남자일까, 하는 의문은 이 순간에 쓸모없는 사치다.

“누구야?”

세현이 궁금증 가득한 시선으로 수아와 휴대전화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차한승 선배님이요. 제가 오늘 중으로 마무리해서 선배님께 보내 드려야 하는 일이 있어서요.”

차한승 셰프와 다급하게 처리해야 할 업무가 있는 것처럼 둘러댔다.

“아, 그렇구나. 바쁘네, 우리 수아.”

소름이 끼치도록 기분 나쁜 눈빛을 하고 있던 세현의 눈가가 스르륵 풀어졌다. 눈동자에 어려 있던 광기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나중에 보자, 수아야. 우연이라도 이렇게 보니까 반가웠어.”

역시나 세현은 제삼자가 끼어들면 태도를 바꿨다. 그 누구에게도 수아와의 관계를 들키고 싶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마치 이런 승강이를 하는 것조차 자신만의 것이라고 비뚤어진 소유욕을 드러냈다.

“네, 선배님. 들어가세요.”

수아는 일부러 다시 역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잘 들어갔습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딱딱한 질문에 잔뜩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스르륵 녹아내렸다. 본격적으로 통화 용건을 꺼내기 전에 묻는 일상적인 질문일 수 있는데, 코끝이 찡해지고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수아는 애써 숨을 고르고, 조용히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대꾸했다.

“지금 들어가는 길이에요.”

― 파리에 사는 거 아니었어요?

택시를 탔다면, 파리 어디든 벌써 도착하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밖에 있다고 하니, 그는 의아한 목소리로 재우쳐 묻고 있었다.

― 목소리는 왜 그렇고.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그 질문은 하지 말지.

애써 참고 있던 울음이 툭 터져 나왔다. 빈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고 싶지 않은 남자에게 우는 소리를 들려주는 게 싫어서 숨을 참았다.

― 도수아 씨, 지금 어딥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휴대전화를 잠시 멀리한 채로 숨을 고르고는 눈물을 닦아 냈다.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흔들리는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대꾸했다.

“길이요.”

혹시나 세현이 등 뒤에 따라붙어서 엿듣고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 수아는 자신이 듣기에도 어이없는 대꾸를 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늘 아예 날을 잡았나?

수아와 눈이 마주친 세현이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인다. 입 모양으로 ‘너 걱정돼서.’라고 말하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얼굴을 찌푸리는 시늉까지 한다. 지금 이 길가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세현은 모르는 눈치다.

― 어디냐고.

휴대전화 너머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셰프님은 어디 계세요?”

일부러 세현에게도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를 냈다.

― 튈르리 역 근처에 있는 호텔.

“아, 그러시구나. 그럼, 제가 거기로 갈게요. 좀 이따 봬요.”

― 뭡니까, 지금?

당황해서 되묻는 목소리를 들으며 통화를 마친 수아는 한승을 돌아보았다.

“선배님이 찾으시네요. 저 얼른 다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세현이 물러서고 나면 한승에게 전화를 걸어 대충 둘러댈 생각이었다.

“그래? 야, 지금 시간도 늦었는데. 차한승 너무하네. 지가 돈 주고 일시키면 다야? 오빠가 데려다줄게.”

한승과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세현이 수아의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 안 그러셔도 돼요. 교통비 지원돼서, 이렇게 이동할 때는 택시비 나오거든요.”

“요즘 택시도 위험해. 택시 기사를 어떻게 믿어?”

세현은 막무가내로 수아를 데려다주겠다고 우겼다. 이성적으로 말이 통하는 상대였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잠잠했는데……. 역시나 모임에 나가서 얼굴을 보인 게 화근이었는지도 모른다.

“네, 감사합니다.”

“너 나중에 밥 사라. 나도 바쁜데, 너 걱정돼서 데려다주는 거니까. 그리고 차한승은 이 시간에 널 왜 보자는 거야?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얼버무릴 말이 없어졌다. 더는 거짓말도 소용이 없었다.

“한승 선배 있는 호텔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뭐, 호텔?”

세현이 펄쩍 뛰며 야단법석을 떨어댔다.

“야, 너는 겁도 없이 남자 혼자 있는 호텔을 가? 너 미쳤어?”

“아뇨. 호텔 방으로 가는 게 아니고요.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차한승 선배님이 지금 워낙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 멀리 못 움직이시는 상황이고요. 제가 그래서 자료 전달해 드리고, 설명해 드리려고 가는 거고요.”

수아는 세현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설마 저를 그렇게 막 노는 애로 보신 거예요?”

잔뜩 실망했다는 투로 묻자, 세현이 손사래를 치며 대꾸한다.

“야, 내가 왜 너를 그런 애로 봐. 네가 어딜 봐서 막 노는 애야? 너같이 성실하고 착실한 애가 어딨다고.”

“저는 또 선배님이 저를 오해하신 줄 알고요.”

수아는 싱긋 웃으며 세현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세현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어려 있었지만, 지하철에 올라타고 나서부터는 제법 차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둘이 택시에 나란히 오르는 게 더 위험할 것 같아서, 수아는 사람이 많은 지하철을 택했다. 택시보다 지하철이 더 오래 걸려서 좋다며 세현은 끔찍하게 웃었다.

이제 문제는 눈앞에 있는 세현이 아니라, 손안에서 끊임없이 울리고 있는 휴대전화 속 인물이다.

전화를 끊고 난 뒤, 그는 쉴 새 없이 다시 전화를 걸어 왔다.

아, 가서 뭐라고 둘러대야 하지.

문제는 또 있었다.

만약 한승을 만나고 나왔는데, 그 자리에 세현이 또 기다리고 있다면?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세현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수아의 곁에 섰다. 호러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가장 먼저 죽는 등장인물이 된 듯한 기분이다.

* * *

분명히 우는 목소리였다. 끝없이 울리는 신호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가슴속이 다 타 버릴 것만 같았다. 다른 후배가 이런 식으로 전화를 걸어 왔어도 똑같이 걱정했을 것이다.

그럴 리가. 이렇게 속이 다 타 버릴 만큼 걱정한다고?

울면서 통화를 마친 이후로, 그녀는 30분째 연락 두절이다. 신경에 거슬리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은이 뭔가 알고 있으려나?

도수아에게 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시은에게 전화를 걸려는 순간,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다짜고짜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사람의 감정을 극한으로 모는 재주가 있는 여자다.

한승은 휴대전화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몸속 세포가 전부 일어나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할 것처럼 굴었다.

― 죄송해요, 선배님. 잠시 근처 카페로 나오실 수 있으세요?

30분 전 통화했을 때와는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다려요. 나갈 테니까.”

한승은 재킷을 집어 들고 곧장 호텔을 나섰다. 혹시나 길에서 험한 일을 당하고 있는데, 자신이 전화한 것은 아닐까 싶어서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 놓고 멀쩡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온 여자 때문에 기도 안 막힐 지경이다.

호텔 주 출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파리에서 꽤 유명한 카페가 있었다. 카페 앞에 다다르자,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입구 앞을 서성이는 여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순간 또 이상한 울화가 치민다. 오밤중에 전화했더니 울면서 이쪽으로 오겠다고 해 놓고, 안에 들어가지 않고 초조하게 서 있는 모습이 또다시 한승의 신경을 한껏 건드린다.

“안 들어가고 여기서 뭐 합니까?”

한승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물었다.

“아, 웨이팅이…….”

유명한 카페다 보니 테이블 대기가 걸려 있나 보다.

“얼마나요?”

“5분이면 된다고 하는 것 보니까, 10분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그녀는 프랑스식 대기 시간을 알지 않느냐며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다. 또 눈은 웃지 않는 억지 미소다.

“왜 보자고 했어요?”

카페에 들어가서 앉을 때까지 기다릴 여유조차 없었다. 뭐 이렇게 사람을 안달 나게 하는 여자가 다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 셰프님은 저한테 왜 전화하셨어요?”

그녀는 무구한 눈빛으로 한승을 바라보며 물었다. 밤이 되어 기온이 낮아진 탓에, 그녀의 붉은 입술 새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온다. 한승은 홀린 듯 대기 중으로 흩어지는 그녀의 숨결을 바라보며 대꾸했다.

“앞으로 수고해 달라고 전화한 겁니다.”

늦은 시각인데,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서 전화한 이유도 있었지만, 굳이 덧붙이지 않는다. 괜히 복잡하게 얽히고 싶지 않다. 아니지, 벌써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거 아닌가?

“왜 보자고 했습니까?”

“저는.”

그녀는 할 말을 고르듯이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무슨 어려운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입니까?”

그녀가 지체한 시간은 겨우 3초? 3분도 아니고, 3시간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꾸만 속이 갑갑해져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는 셰프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왔어요. 이런 인사는 직접 얼굴을 뵙고 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고요.”

그녀의 말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마치 무언가를 숨기려는 사람처럼 말을 빙빙 돌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분 나쁘게.

“부족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셰프님께도, 시은 선배한테도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말을 다 마친 그녀는 뿌듯한 눈빛이었다. 한승에게 제 뜻을 제대로 전달했다는 만족감이 아닌, 말을 무사히 끝냈다는 안도감처럼 보였다.

“겨우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이 밤중에 집에 갔다가, 도로 30분을 지하철 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그녀는 진심이라는 듯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한승은 한숨을 훅 몰아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카페 앞 천장은 마치 궁전의 천장화를 모사한 듯 찬란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한승의 온 신경은 그녀를 향해 있었다.

문득 시선을 내렸을 때, 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잡아 보지 않아도 차갑게 식어 있을 온도가 느껴진다.

겨우 그 말을 하려고……?

까마득한 선배에게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찾아오는 일쯤은 할 수도 있는 거다.

진심 반, 거짓 반.

그녀는 지금 한승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넘길 수도 있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다.

웨이터가 두 사람을 안내하겠다며 다가온다.

그녀의 눈꺼풀 아래로 숨어든 거짓을 끄집어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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