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13화 (13/62)

#013

짧은 침묵이 길게 느껴진다. 그의 숨소리마저 사그라든 것처럼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전화가 끊어졌나 싶어서 수아는 휴대전화를 한 번 확인했다. 통화 중임을 알리는 시간이 착실히 숫자를 더하며 흐르고 있었다.

― 내일 오리엔테이션 끝나고 봅시다.

그가 엄혹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목소리가 너무 차가워서 괜한 베팅을 걸었나, 하는 후회가 들 정도다.

“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뒤, 수아는 가슴속 깊은 곳부터 켜켜이 쌓인 한숨을 토해 냈다.

전화 통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데, 내일 저녁은 왜 먹자고 했을까? 나도 참, 나지.

궁금한 것을 못 참을 뿐만 아니라 이유 없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 또한 견디지 못한다.

눈에 띄지 말랬다가, 냄새 풍기지 말랬다가.

그러면서 만나 달라는 요청에는 또 꼬박꼬박 얼굴을 들이밀더니, 이제는 택시로 집에 데려다주고, 마치 미련 남은 구 남친처럼 받기 직전까지 전화해 댄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일관성 없는 그의 행동은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 사람의 심기를 거스른 일이 있었나?

수아는 불 꺼진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피곤한 일이 너무 많은 하루였다. 어지러운 생각은 수마가 몰아내 버렸다.

* * *

여행 둘째 날에는 여행객들과 로컬 시장에서 장을 보고, 그의 지도로 요리 클래스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여행사에서 미리 섭외한 매장 리스트를 살피는 그의 눈빛은 어제처럼 냉혹해 보이지는 않는다.

“잠봉(Jambon: 프랑스식 햄)의 종류와 고르는 방법에 대해서 대략적인 설명하는데, 15분. 여행객들이 선택하고 구매하는 시간 15분. 숙성 일자에 따라 맛이 다른 버터를 다루는 법을 설명하는 데 15분, 구매 시간 15분. 작년 바게트 챔피언이었던 제과점에서 종류별 바게트 설명과 구매에 각각 15분……. 구매하는 시간이 15분이면 너무 짧을 것 같은데요?”

“시간적 제약을 짧게 두지 않으면, 아마 구매 시간이 오래 소요되어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겁니다. 쿠킹 스튜디오 대관 시간이 정해져 있거든요.”

정 지부장이 태블릿 PC를 들여다보며 대꾸했다. 그 역시도 태블릿 PC 속 일정표를 들여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수아는 조심스럽게 정 지부장과 시은의 얼굴을 살폈다.

두 사람 중 누구도 그의 의중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하다. 그의 평소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수긍할 거라 여기는 눈치였다.

그가 클래스에서 시연할 요리는 잠봉 뵈르(Jambon-beurre)라는 간단한 프랑스식 샌드위치였다.

반으로 가른 바게트 안에 프랑스식 햄인 잠봉과 얇게 저민 버터만 넣으면 완성이다. 에멘탈 치즈나 오이, 양상추를 넣어 변형도 가능했다. 한국에서는 이를 변형해 잠봉 대신 앙금을 넣어 앙버터라는 이름의 빵을 팔기도 한다.

“매장에서 설명하는 시간을 좀 줄이는 것도 방법이겠네요.”

역시나 그는 구매 시간이 촉박한 것을 신경 쓰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이 방에서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와 드러내지 않는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사람은 수아 자신밖에 없었다.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제대로 겪은 사람이 자신뿐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매장에서 설명하는 시간을 줄이게 되면, 식재료에 대한 지적 욕구를 충분히 채워 줄 수 없을 수도 있어요. 차한승 셰프와의 여행을 선택한 사람들의 설문 조사지를 보면, 그런 욕구가 강하거든요.”

정 지부장이 회의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럼, 쿠킹 스튜디오에서 시연하면서 설명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매장에 양해를 구했다 하더라도, 한국 대형 마트와는 다르게 프랑스 전통 식재료 매장은 실내가 대부분 좁아요. 거기서 많은 인원을 데리고 설명을 하는 것보다, 쿠킹 스튜디오에 와서 샘플을 가지고 설명하는 게 어떨까요? 매장에서는 간단히 종류만 설명하고요. 자세한 특징이나 쓰임새는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거죠.”

수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마주한 그의 시선이 너무 깊어서, 수아는 잠시 자신이 한 말을 잊어버릴 뻔했다.

“어떠세요, 셰프님?”

정 지부장이 그를 향해 되물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대답을 마친 그가 수아에게서 시선을 길게 끌어갔다. 어제처럼 또 트집을 잡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는 수아의 말에 쉽게 수긍했다. 그러고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엷은 미소를 머금기까지 했다.

만인에게 친절한 남자가 나한테만 못되게 군다. 그런 남자가 내가 한 말에 드물게 미소를 보인다?

수아는 혹시 자신이 변태는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고민에 빠질 뻔했다. 찰나의 순간 보인 그의 아슬아슬한 미소에 심장이 섬세하게 반응하고 말았다. 당황스러워서 얼른 그를 향해 있던 시선을 내렸다.

2차 오리엔테이션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수아가 짐을 챙기는 사이, 그가 수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도 향수 등의 가향 제품은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특유의 상쾌한 체취는 존재했다.

“어디로 갈 겁니까?”

그가 건넨 말에 가방을 챙기던 시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닿았다. 정 지부장 역시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이쪽을 흘끗거렸다.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묘할 것도 없는데 묘했다.

“둘이 어디, 가요?”

시은이 가방 끈을 붙잡고 어정쩡하게 서서 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시은을 향했다. 시은의 질문에 대답을 해 준 것은 한승이었다.

“저녁 먹으러. 일이 좀 있어서.”

그는 더 묻지 말라는 듯이 선을 긋는 말투였다. 시은이 설명을 원하는 간절한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보았지만, 수아는 묵묵부답이었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 시은은 벽을 친 듯 느껴지는 소외감에 가슴이 갑갑해졌다.

한승은 성격이 온순하고, 다정하며, 만인에게 상냥하지만, 결코 타인과의 거리를 좁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나마 후배 중에 각별하게 지내는 이는 시은뿐이었다.

또 수아는 딱딱하고, 차가운 성격이었다. 물론 선후배 사이에서 서먹하게 척을 지고 지내는 것은 아니었고 두루 알고 지내기는 했지만, 수아는 누군가와 쉽게 마음을 터놓고 친해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수아가 시은과는 막역하게 지냈다.

완전히 다른 성격이지만 타인에게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두 사람. 그 두 사람과 그나마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 시은.

두 사람이 시은을 눈앞에 두고 묘하게 어우러졌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온도를 가진 두 사람이 조화를 이루는 분위기는 범접할 수 없는 벽이 둘려 있는 듯했다.

한승은 상냥함과 다정함을 무기로 더는 묻지 말라는 식이었고, 수아는 특유의 차가운 얼굴로 첨언하지 않은 채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시은이 심각한 일이라도 있느냐는 투로 물었다. 만약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 때문이라면 시은도 알아야 했기에 함께 저녁 식사를 했을 것이다.

시은이 배제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프로젝트와 관련한 일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여자와 남자가 단둘이 저녁 식사를 할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시은은 비어져 나오려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두 사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둘 중 그 누구도 이렇다 할 대답을 내놓지 않고 서로를 흘끗 보았다.

순간 가슴 안쪽이 욱신거렸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묻어나는 밀도가 타인을 향한 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아직 서로를 정의할 수 없는 단계. 하지만 보통의 경우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느끼는 중일 것이다.

시은은 목적이 아닌 관계 지향적인 성격이었다. 공부 욕심도 있었지만, 친구 욕심이 더 많았다. 홀로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는 것보다, 어울리는 친구들 모두가 함께 두루두루 좋은 성적을 얻는 게 더 좋았다.

기질은 변하지 않아서, 성인이 된 이후에도 시은은 여러 사람의 일자리를 소개해 주거나, 유학 생활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관계를 맺고, 감정을 헤아리는 데 예민했다.

두 사람에게서 싹튼 감정은 자신이 끼어들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별일은 아니고.”

별일 아니라는 말로 대꾸하는 한승의 태도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늘 일정한 친절함만을 보이는 남자여서, 그 이상의 모습을 본 적도 없기는 했다.

그리고 수아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차가운 표정 뒤에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숨겨져 있었다.

만남의 이유를 명확히 대꾸하지 못하는 여자와 남자. 정식으로 고백하고 사귀기로 한 사이도 아니니, 서로의 이끌림을 만난다는 이유를 댈 수도 없는 상황일 것이다. 그러다 잘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으니까.

시은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물과 기름처럼 성질이 다른 두 사람이 제발 섞이지 않게 해 달라고.

두 사람 중 누구도 한승을 향한 시은의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한 한승과 누구에게나 차가운 수아처럼, 시은은 누구하고나 두루 친하게 지내는 성격이라고 여길 것이다.

차라리 한승에게 진작 고백해야 했을까. 비즈니스 과정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가면 고백을 할 생각이었다.

한승과 알고 지낸 지 6년.

그는 만인에게 친절했지만, 각별한 사람을 곁에 두지는 않았다. 연애 비슷한 것도 없었다.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 그의 사생활을 아주 조금 더 알고 있는 사람이 시은 자신이었다.

미약하게나마 기대했었다.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타인을 배려하는 습관이 몸에 밴 그가 시은의 마음을 헤아리며 기다려 주고 있는 거라고.

그런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돌이켜 보니 그는 유독 수아에게만 차가웠다. 그리고 고고하기로 유명한 수아는 그의 앞에서만 긴장하곤 했다. 돈이 급하다는 이유라고 하기엔 부족해 보일 정도였다.

“나는 가면 안 되는 자리야?”

속은 타들어 갔지만, 시은은 무구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같은 색을 띠며 시은을 향했다. 대답을 망설이는 눈빛은 이미 가슴에 길게 선을 그어 놓았다. 수아가 먼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도 이내 수아를 향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