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다음에 하자, 시은아.”
한승은 저를 바라보고 있는 시은을 달래듯 상냥하게 말했다. 시은은 이내 미소를 머금으며 아쉽다는 듯이 대꾸한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하지, 뭐. 근데 선배, 우리 수아 너무 잡지 마요. 요즘 수아 얼굴이 반쪽이야.”
역성드는 시은의 말에 한승의 시선이 수아를 향했다. 얼굴이 반쪽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 것 같다고 한승은 생각했다.
“그래? 좀 잘 먹어야겠네.”
평소와 같은 말투로 내뱉었을 뿐인데 시은의 눈빛이 눈에 띄게 동요한다. 그리고 말이 끝나자마자 날카로운 시선이 한승에게 꽂혔다.
한승은 찌를 듯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여자에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자 그녀는 이내 매서운 눈빛을 감추며 태연하게 굴었다.
그쪽도 내가 거슬리나?
묘하게 신경이 곤두서는데, 이번에는 그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한승은 정 지부장에게 인사를 한 뒤, 그녀를 향해 짧게 읊조렸다.
“갑시다.”
“네.”
그녀는 순순히 대꾸하고는 제 뒤를 따랐다. 정 지부장과 시은의 시선이 두 사람의 뒤를 따라붙었지만,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여자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는, 온 신경이 오직 이 여자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어디로 갑니까?”
미간을 슬쩍 찌푸린 그녀는 고민 중인 듯했다.
“저녁 먹자는 사람이 식사 장소도 생각 안 해 봤어요?”
대도 여행사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을 빠져나오며 한승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을밤 바람이 차다. 어제보다 몇 도는 기온이 떨어졌다. 일기 예보를 확인하지 못했는지, 그녀의 외투가 찬바람을 막아 주기에는 지나치게 얇았다.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입을 열었다.
“베트남 쌀국수 좋아하세요?”
찬바람 탓에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나 보다.
“나쁘지 않죠.”
“근처에 괜찮은 쌀국수 집이 있어요. 좀 걸어도 괜찮…….”
그녀가 질문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문다. 일전에 말끝마다 괜찮으냐고 물으면 피곤하지 않으냐고 뾰족하게 말했던 게 생각났다. 그녀는 한승의 눈치를 살피며 혀를 살짝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한승은 그녀의 붉고 촉촉한 혀가 하얗게 마른 입술 표면을 훑고 사라지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금세 윤기를 머금고 붉게 반짝였다. 폐로 들어간 숨이 미처 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흉곽 안을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가슴이 갑갑해져서 한승은 이내 시선을 돌려 버렸다.
“걸으실까요?”
그녀는 말은 마저 해야겠다 싶었는지, 짧게 물었다. 한승은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움츠린 작은 어깨가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옷 좀 두껍게 입지.
그녀는 몸에 알맞게 피트되는 청바지에 얇은 카디건 차림이었다. 두께감 있는 맥코트에 머플러까지 두르고 있는 한승은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는 저녁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었다.
옷을 벗어 주면 이상할 거고, 그렇다고 저 모습 그대로 둘 수도 없고.
한승은 목에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어서 그녀의 목에 척 얹었다.
“어?”
그녀가 흠칫 놀란 눈빛으로 한승을 올려다본다. 제 목에 둘린 회갈색 머플러와 한승을 번갈아 보더니 슬쩍 얼굴을 붉히며 묻는다.
“이게 뭐…….”
“하고 있어요. 옷은 왜 그렇게 얇게 입었습니까? 보는 내가 다 춥네.”
네가 추워 보여서 준 게 아니라, 내가 보기 불편해서 건넨 거니까 거절하지 말라는 뉘앙스였다.
“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어설프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는 마치 머플러가 무슨 바이러스라도 된 것처럼 어색하게 굳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한승이 얹어 놓은 모양 그대로 그녀의 어깨 위에서 머플러가 제멋대로 나부꼈다.
“하아.”
한승은 한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깐 서 봐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무구한 얼굴로 한승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표정 안 어울리는 거 압니까?”
“네?”
그녀의 목소리에서 황당함이 묻어난다.
“기민하고 예민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 세상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 짓는 거. 안 어울린다고.”
입을 슬쩍 벌린 그녀가 뭐라고 말을 하려다 이내 입을 다물어 버린다. 그러더니 안 되겠는지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제가 그렇게 의미심장한 눈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발라당 까진 눈으로 순진한 척해서요.”
예의를 차린 말투였지만, 불편한 심기가 뚝뚝 묻어났다.
한승은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들어 올리며 웃었다. 여태껏 꽉 막힌 사람이 써 내려간 모범 답안 같은 언행으로 신경을 자극하던 그녀가 슬쩍 본색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쪽이 훨씬 낫네요.”
그녀는 뾰족한 눈초리를 했다가 이내 눈매를 풀며 한승을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이유 없이 저녁을 먹자고 해 놓고도, 한 마디도 지고 싶지 않은 눈치다.
“잠깐 서 봐요.”
한승은 자신에 대한 화를 파리 돌바닥에 풀고 있는 그녀를 또다시 불러 세웠다. 은근히 다리에 힘을 주고 걸으며 쿵쿵거리는 게 귀엽게 보일 정도다.
“서라면 서야죠.”
그녀는 자신에게 별수가 없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한승은 그녀의 어깨에 어색하게 얹혀 있는 머플러 끝을 잡았다. 머플러를 넓게 펴서 그녀의 어깨에 숄처럼 두른 뒤, 목으로 한 바퀴 돌렸다.
“이거 조르실 건 아니죠?”
그녀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승을 올려다보았다. 한승은 저도 모르게 픽 하고 웃었다.
“나한테 뭐 죄지은 거 있어요? 내가 목 조르게 할 만큼?”
“아니요. 이유 없이 제 목 조르실 분 같아서요.”
한승은 머플러 끝을 부드럽게 묶어 주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들켰네요.”
그녀는 입을 쩍 벌리며 황당하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속으로 욕하는 소리 다 들리는 것 같은데, 그냥 속 시원히 하지 그래요?”
“면전에 대고 욕하는 건 예의 없는 짓이라고 배워서요.”
“아, 그럼 속으로 욕하는 건 괜찮고요?”
그녀가 우뚝 멈춰 섰다.
“차한승 셰프님!”
“왜요, 도수아 씨?”
씩씩거리는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던 여자. 거리를 두고 어색하게 굴던 그녀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자 놀라운 몰입감과 흥미가 동했다.
정말 유치하게도, 못되게 굴어서 이 여자의 반응을 끌어내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이런 반응이 만족스럽고?
한승은 저도 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잔뜩 올려붙였던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손가락으로 옆 건물을 가리켰다.
“다 왔어요.”
“그게 답니까?”
“네?”
그녀는 참은 인을 새겨 넣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다냐고요. 내 이름을 저주하듯이 불러 놓고, 다 왔다? 이게 답니까?”
한승은 삐딱하게 물었다. 점점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게 흥미진진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박동 수를 높여 갔다. 지금껏 살면서 사람을 두고 이렇게 몰입했던 적은 없었다.
“그럼, 제가 뭘 해야 하나요?”
그녀는 억눌린 음성을 가까스로 내뱉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화를 내 보라고. 아까처럼 자극적인 말로 뒤흔들어 봐, 한번.
머릿속에 떠오른 말을 잇속으로 삼키며, 한승은 그녀의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글쎄, 뭘 하면 좋을까.”
한승이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자, 그녀가 멍해진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렇게 웃을 줄도 아느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하긴 다른 후배들 앞에서는 서글서글하게 굴었지만, 그녀의 앞에서는 늘 퉁명스러웠으니까.
“들어가죠, 얼른.”
쌩하니 불어온 바람에 그녀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수아?”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의 시선이 한승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이사벨!”
뜻밖의 이름이 들려오자 한승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미소가 사라졌다. 기분 좋게 뛰던 심장이 가파른 절벽 아래로 뚝 떨어진 것처럼 쿵 울렸다.
“아, 그때 그 셰프님이랑 같이 있었구나.”
한승은 천천히 돌아서서 이사벨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이사벨은 사뭇 굳은 얼굴로 한승을 가만히 바라보며,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수아, 잠깐 자리 좀 비켜 줄래?”
“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한승과 이사벨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차한승 셰프님, 나랑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죠?”
한승은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파리노드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부터 일어났던 기시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셰프님…….”
그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한승의 안색을 살폈다.
“저녁은 다음에 합시다. 도수아 씨.”
그녀의 손이 어깨에 두른 머플러를 향해 움직였다.
“그건 그냥 하고 가고.”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자와 더 마주 하고 싶었지만, 온 신경을 지배하고 있는 듯한 여자와 앉아서 식사를 함께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파리노드가 먼저다.
“가시죠.”
한승은 이사벨 파리노드와 함께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얼마쯤 거리가 벌어졌을 때, 이사벨은 눈앞에 있는 카페를 가리키며 눈짓했다. 한승도 대답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함께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수아가 아니었으면 못 만날 뻔했네요.”
이건 또 무슨 이야긴가 싶어서 한승이 미간을 좁혔다. 작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은 이사벨은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저녁을 먹자고 한 사람이 저녁 먹을 식당도 알아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식사가 목적이 아닌, 이사벨 파리노드와의 우연한 만남이 목적이었나?
괘씸한 기분이 들어서 짜증이 치밀었다. 이사벨 파리노드가 어디까지 말했을까?
한승은 감정을 비워 낸 눈빛으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까뜨린느는 내 친구이자, 가족이에요. 내 남편의 여동생이거든.”
머릿속에 있던 복잡한 생각이 전부 휘발되어 버렸다. 친모의 이름이 흘러나온 순간, 전부 의미를 잃어버렸다.
“살아 계십니까?”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아들로 살아가고 있는 한승을 단 한 번도 찾지 않은 것은, 그녀가 죽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럼요.”
그런데 왜 찾지 않은 거냐고 따져 묻고 싶었다. 아버지의 말처럼 정말 버렸기 때문인 거냐고.
아무렴 자식을 버렸다고 한들, 단 한 번도 보고 싶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