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마주 앉은 여자가 친모가 아니니, 왜 저를 찾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는 없다.
“나랑 까뜨린느는 한국어를 공부하다가 만났어요. 그러다 나는 까뜨린느의 오빠와 결혼했고, 까뜨린느는.”
이사벨은 잠시 망설이듯 말을 멈추었다.
“말씀하십시오.”
“아, 까뜨린느 이야기를 내가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직접 들어야 하지 않나 싶고.”
엷은 미소를 머금고 내뱉은 말에 한승은 고개를 내저었다.
“만날 생각 없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친모 이야기를 하시려고 불러 세우신 것 아닙니까? 프랑스 전통 브랑제리 비법이라도 알려 주시려고 도수아 씨한테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신 겁니까?”
떠나보낸 아들을 27년간 찾지 않은 여자다. 한승은 당장 그녀를 만나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사가 확인되었으니 그것으로 끝이다.
“흐음.”
내내 긍정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이사벨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정말 만나 볼 생각이 없어요?”
“없습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일어날까요?”
목적은 달성한 거나 다름없었다. 궁금증은 거기까지였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더 궁금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방어본능일지도 모른다. 원치 않았던 아이가 태어난 과정이라든가, 그 아이가 처절하게 버려진 과정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까뜨린느는 지금 니스 근처에 있는 에즈라는 마을에 살아요. 수아한테 들었는데, 이번에 니스에도 간다고요?”
직감적으로 그 여자가 신경에 거슬리던 이유가 있었던 거다. 어디선가 폭발할 것 같은 위태로운 감정을 아슬아슬하게 전가하던 여자는 지금 이 자리의 촉매제 역할을 한 거였다.
시린 달빛처럼 차가운 여자의 낯빛을 떠올리자, 가슴 근육이 뒤틀린다. 그 여자는 이사벨에게 한승의 이야기를 전하고, 또 어떤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까?
학창 시절까지는 한승을 괴롭히는 시선들이 끊임없이 따라붙었었다. 성인이 되고 사회에 나와 역량을 발휘하며 어느 시점에 올라섰을 때부터는 동경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사람들은 능력 있고, 친절하고, 상냥한 한승에게 의심을 품지 않았다. 설사 속으로 한승의 외모나 배경에 관한 의문을 품었다고 할지라도 입 밖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안락한 세상 안에서 한승은 평화를 누리며 살았다.
만인에게 친절하게 굴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틈을 파고들려는 사람은 용납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틈을 파고들려는 사람, 회갈색 머플러를 두른 채로 한승을 올려다보던 여자의 얼굴이 갑자기 떠올라 한승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제가 니스에 간다고 해서, 그 근처에 사는 친모를 만나고 와야 할 의무는 없다고 봅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확인해야 할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친모는 아들이 이곳에 와 있는 줄도 모르는데, 친모의 친구였다는, 지금은 가족이라는 사람에게서 기억할 수 없는 시절의 상처를 전해 듣고 싶지 않다.
그것은 친모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제 이야기였다. 듣지 않을 권리가 마땅히 있다. 이야기를 들을지 말지 선택할 수도 있다.
카페를 박차고 나온 한승은 하얀 입김이 불거져 나오도록 한숨을 몰아쉬었다. 검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이 치솟았다.
한승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숨을 고르며, 불안정하게 떨리는 가슴이 가라앉기를 바랐다. 태생적으로 눈에 띄는 용모를 가진 탓에 한승은 제 인생에서 불안정하게 튀어나오는 것이 있으면 쳐내고 다듬었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갑작스럽게 튀어 오르는 감정을 부단히 가라앉히고, 크게 기뻐하는 일도, 크게 슬퍼하는 일도, 크게 화를 내는 일도 없었다.
심호흡 몇 번이면 가라앉을 것이다. 몇 번만 크게 숨을 내쉬면.
“셰프님.”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제자리를 찾아가던 감정선이 탁 깨져 버렸다. 한승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아까 돌려보냈던 여자가 단단한 시선으로 한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목과 어깨에는 한승이 매듭지어 준 머플러를 그대로 두른 채였다. 코와 볼이 새빨갰다. 얇은 옷이 신경 쓰여서 머플러를 둘러 주고 들여보냈는데, 그녀는 카페 앞에서 한승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대체 왜?
한승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저, 셰프님.”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한승을 올려다보는 게 시선 끝에 걸렸다. 한승은 정면을 응시한 채로 그녀에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았다.
“왜?”
나직하고 짧은 물음에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무슨 일 있기를 바라고 기다렸습니까?”
매끄럽지 않은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한승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걱정스럽다는 듯이 묻기는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틈이 없었다.
하긴 이 여자는 어떤 경우에도 틈을 보이지 않는다.
항상 적정한 선을 그어 버리는 저 얼굴이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왜 나는 이 여자를 무너뜨리고 싶은 걸까?
제 감정은 누그러뜨리려 부단히 노력하면서, 마주 선 여자는 무너지기를 바라는 이기심이 어디서 발동한 것인지 모르겠다.
“들어가요.”
짧게 일갈한 한승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셰프님, 안색이 안 좋아요.”
등 뒤에서 들려온 말에 한승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또다시 멈춰 섰다. 저 여자는 불우한 사람을 보고는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박애가 넘치나 보다.
“안 좋건 말건, 도수아 씨가 상관할 일 아닙니다.”
“무슨 말씀…….”
한승은 한 걸음 내딛다 말고 멈춰 섰다.
“나누셨어요? 이사벨은 제가 소개한 사람이잖아요. 두 분이 따로 심각하게 나눌 이야기가 있었나 싶고, 또 저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신경 쓰입니다.”
그녀는 그 이상의 감정이나 의도가 섞인 것은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입장을 헤아려 보면 저런 걱정을 하는 게 이상한 것만은 아니다.
아니면 이사벨 파리노드에게 모든 것을 전해 듣고, 노파심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이사벨 파리노드와의 만남은 그녀가 설계한 필연적 우연일까?
30분 전까지만 해도 온 신경을 건드리는 이 여자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마주 앉아서 그녀를 들여다볼 생각에 젖어 가슴까지 뛰어 댔었다.
지금도 가슴이 뛰어 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빈틈없는 얼굴 뒤에 감추고 있는 위선에 차가운 분노가 치미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의 성질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끝내는 속이 터지려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승은 얼굴에 나타난 복잡다단한 감정을 지우려 노력하며 그녀를 향해 돌아섰다.
“일 이야기 했습니다. 이사벨이 저에게 궁금한 게 좀 있었나 봅니다. 도수아 씨하고 관련한 일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요.”
한승은 건조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아는지, 이사벨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는 다가오지 말라며 선을 긋는 말이었다.
“그럼, 어디 아프세요?”
참을 수 없는 한숨이 쏟아져 나온다. 그냥 지나쳤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한승의 컨디션 난조에 부채의식이라도 느끼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러면 의심하게 되잖아, 도수아. 네가 내 치부를 알고 있다고, 그걸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겁먹게 되잖아.
“피곤해서 그럽니다.”
더는 말 시키지 말라는 듯이 일갈하고 돌아섰다. 신경을 거스르는 목소리가 더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뒷덜미를 잡아끌었다.
달려가서 그녀를 붙들고 캐묻고 싶은 마음 반, 다시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평생에 느끼지 못했던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 * *
“수아, 나와 줘서 고마워.”
냉랭한 얼굴로 돌아서던 남자의 뒷모습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일 이야기를 했다고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피로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 피로감을 자신이 안겨 준 것도 아닌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묘한 책임감이 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수아는 이사벨의 맞은편에 앉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제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대립각을 세웠다. 그 사이에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수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런데 그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직감적으로 그에게 불편한 자리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신경이 쓰여서 자리를 뜨기가 힘들었다.
“사실 내가 수아 몰래 차한승 셰프한테 연락을 좀 했었어.”
“네?”
뜻밖의 이야기에 수아는 멍한 시선으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차한승 셰프가 파리 미식 투어 가이드를 한다고 해서. 우리 가게를 좀 소개해 줄 수 있는 자리가 없을까, 하고 무리한 부탁을 했거든. 어제는 그것 때문에 이야기를 좀 한 거였어.”
“아, 네.”
수아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이사벨의 평소 성격으로 짐작해 보건대 엎어 놓고 무례한 부탁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가게가 많이 안 좋은가요?”
스타 셰프를 통한 관광객 투어 홍보에 뛰어들어야 할 만큼 제과점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좀 그래. 요즘 워낙 대형 프랜차이즈들도 많이 생겼고. 파리도 예전 같지 않지. 파리에서 스타벅스가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어. 불과 10년 전만 해도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동네마다 없는 곳이 없잖아.”
수아는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 정말 이런 부탁하기 싫은데, 수아.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이사벨의 눈빛에 간절함이 어렸다.
“알잖아. 그 가게, 우리 남편 할머니 때부터 운영하던 곳이야. 전쟁 때는 지하 화덕에 숨어 있기도 했고. 숨겨 주기도 했고. 우리 가족한테는.”
말을 잇지 못하고 이사벨이 시선을 떨구었다.
수아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재소자 자식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돈을 끌어다 쓰면서, 한국에서 한 푼 보내 주지 않아 생활비가 바닥났던 적이 있었다.
며칠이나 빵을 사러 들르지 않는 수아의 딱한 사정을 먼저 알아본 것은 이사벨이었다. 한국 유학생 여럿을 돕고 있다며, 생활비를 선뜻 내어 주기까지 했었다.
“수아는 힘든 형편에도 어려운 아이들 먹을 것도 챙겨 주고 그러잖아.”
“제가 어떻게 도우면 될까요?”
안타까운 음성이 가까스로 흘러나왔다. 이사벨의 얼굴에 그제야 은은한 미소가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