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
“글쎄. 나도 어떻게 도와 달라고 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네. 차한승 셰프하고 같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미 투어 프로그램은 다 나와 있는 상태여서요. 그건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이사벨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수아도 돕고 싶은 마음만은 간절했지만, 섣불리 나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거니와 그럴 권한도 없었다.
“죄송해요. 다른 방법을 한번 찾아볼까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이사벨이 조용히 되물었다.
“차한승 셰프를 한 번 더 만날 수 있을까?”
순간 냉랭하게 굴었던 남자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외적으로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 그는 해마다 셰프가 되고 싶은데 가정 형편이 어려워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어려운 사정을 알면 도와줄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자신에게만은 예민하게 구는 사람이지만, 동종 업계에 있는 곤란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그냥 두고 지나칠 사람은 아니다.
“한번 이야기해 볼게요.”
사실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껄끄럽기는 했다. 시은을 통해서 이야기해야 할까?
그는 같은 자리에 앉아서 시은에게는 온화한 미소를 보이면서도, 수아에게는 억하심정이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혹시나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어제부로 싹 씻겨 나갔다. 머플러를 둘러 줄 때만 해도 그의 산뜻한 체취에 파묻혀 가슴이 두근거렸었다.
그런데 싸늘하게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고 난 이후에는 수아의 가슴도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럼, 부탁 하나만 더.”
“말씀하세요.”
오늘따라 이사벨도 적당히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서 전에 없던 절박함마저 느껴져서 안타까웠다.
“사실 어제 이야기가 잘 안 풀려서, 차한승 셰프 기분도 언짢아 보였거든. 미안하지만, 나랑 만나는 건 이야기하지 말고……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을까?”
이사벨의 목소리는 곧 부서질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수아는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사벨의 말대로라면 그를 속이고 약속을 잡아야 했다.
“아무래도 어렵겠지?”
수아가 고민에 빠진 것을 알아차린 이사벨이 쓸쓸하게 읊조렸다.
“미안해. 무리한 부탁을 했네, 내가. 이번 달까지 딱뜨 오 뽐므 부지런히 먹어 둬. 다음 달부터는 못 먹을 수 있으니까.”
“네?”
스산한 어조에 수아가 펄쩍 뛰며 재우쳐 물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다음 달부터는 못 먹을 수 있다니요, 이사벨.”
“그렇게 됐어.”
생활비가 다 떨어져서 주말 내내 굶었던 적이 있었다. 평일에는 실습하고 남은 음식을 싸 와서 끼니를 때우고, 그마저도 없는 주말에는 내리 굶어야 했다. 돈을 보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눈물을 보이는 엄마에게 힘든 내색도 하지 못했다.
그때 수아의 어려움을 눈치채고 연락을 해 온 사람이 이사벨이었다. 할 수 있는 한 돕고 싶었다.
“제가 이야기해 볼게요. 연락할게요, 이사벨.”
이사벨은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사벨은 수아를 향해 무한한 신뢰의 시선을 보내왔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부담스러웠다. 일 자체는 기꺼이 해야 할 종류의 것이었지만, 상대해야 할 사람이 차한승이라는 사실에 속이 갑갑해졌다.
이사벨과 헤어진 수아는 곧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오리엔테이션이 없어서 그를 마주할 기회가 없는 날이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그를 빨리 상대하는 게 불편한 속을 달래는 길이였다.
신호가 세 번쯤 울렸을 때, 휴대전화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무슨 일입니까?
용건 없이 전화했으면 잡아먹겠다는 기세다.
이 남자는 왜 나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일까?
“안녕하세요, 셰프님! 머플러 돌려 드리려고 연락드렸어요. 시은 선배하고 정 지부장님 있는 곳에서 돌려드리는 건, 실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 그냥 내일 마지막 오리엔테이션 때 줘요.
그는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제가 어제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선배님 덕분에 따뜻하게 집에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못 해 먹겠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남에게 살랑거리는 짓은 원래 잘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자신을 한껏 고깝게 생각하는 상대에게 알랑방귀를 뀌려니 입에서 구린내라도 나는 듯 역겨운 기분마저 든다.
― 거짓말을 좀 그럴듯하게 할 수 없습니까?
“네? 무슨…….”
예민한 사람이 그새 알아차렸나 보다.
― 감기 기운 있다는 사람이 거기 서서 무턱대고 날 기다립니까?
“그건 셰프님이 걱정돼서요.”
순간 진심이 툭 하고 불거져 나왔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연기를 걷어 낸 것은 휴대전화 건너편에 있는 남자였다.
― 하아.
그는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저녁 같이 못 했으니까. 오늘 했으면 하는데요.”
수아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갔다. 마지막에 내뱉은 ‘하는데요.’는 들릴락 말락 한 정도였다.
― 도수아 씨.
“네.”
딱딱한 그의 음성에는 신경질이 묻어났다.
그냥 오해라도 하시든지. 후배가 선배를 좋아하거나, 동경하는 마음에 붙잡고 늘어지는 거라고. 진부한 상상력이라도 발휘한 다음, 못 이기는 척 나와서 마음에 없는 후배 달래 주고 들어가세요, 네?
이사벨의 딱한 사정은 충분히 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지금 이 순간에는 무리한 부탁을 한 이사벨이 아주 조금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한없이 굽혀야 하는 상황은 심히 굴욕적이었다.
― 나한테 저녁 맡겨 놨습니까?
짜증 섞인 질문에 수아는 당황하고 말았다. 언제나 만나자고 한 것은 수아였지만, 신용카드를 내민 것은 그였다. 자신이 결제하려고 할 때마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수아를 저지하며 카드를 내밀곤 했다.
“오늘은 제가 사려고 합니다.”
이쯤 되니 이상한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한다. 오늘 차한승이 불려 나오는 꼴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투지가 뜬금없이 불타오른다.
― 내가 뭘 먹을 줄 알고 자신 있게 사겠다고 말하는 겁니까?
“저녁 먹자고 한 사람이 식당도 안 알아봤냐고 말씀하셨던 거 기억합니다. 식당은 제가 알아봐 놓았습니다.”
― 아니지. 대접받는 사람이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게 예의지. 안 그렇습니까?
그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늘하게 대꾸했다. 수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한숨을 집어삼켰다.
“셰프님께서 원하시는 곳을 알려 주시면,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 문자로 보낼 테니까, 그쪽으로 7시 반까지 오도록 해요.
수아는 입을 오 모양으로 만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끝까지 버티며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는 비교적 쉽게 약속에 응했다.
“감사합니다, 셰프님. 이따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수아는 시간을 헤아리며 걸음을 옮겼다. 집에 가서 그의 머플러를 다시 들고 나와야 했다. 7시 반까지 그가 메시지로 보내 줄 식당에 도착하려면 이동 시간을 확보해 놔야 했다.
손에 쥔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마레 지구에 새로 생긴 한국식 포장마차가 있습니다. 거기서 보죠.]
한국식 포장마차?
보통 포차는 밥을 먹으러 가는 곳이 아닌, 술을 마시러 가는 장소다. 이 남자가 나랑 술을 마시려는 의도인가? 안타깝게도 오늘 그와 포차에서 먼저 마주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이사벨이었다.
일이 잘 풀리려나, 아니면 화를 내려나?
어떤 쪽이든 그를 속이고 만남을 주선한 것은 분명 잘못한 짓이다. 그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까지 건넬 수 있을 만큼 이사벨은 수아의 유학 생활에 큰 도움을 준 인물이다. 수아는 이사벨에게 약속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메시지를 전송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데, 오후 5시를 알리는 근처 성당 종소리가 들려온다. 수아는 잇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오늘을 무사히 지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내일도, 모레도.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도.
프랑스 음식을 다루는 셰프임에도 한승은 한식을 더 즐겼다. 한국을 떠나온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한국 음식 생각이 간절했다.
오랫동안 파리에 머물고 있는 그녀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승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사정을 조심스레 헤아리고 있었다. 자꾸만 가슴이 갑갑해지는 기분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포장마차 앞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입구에 서서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어쩐지 그 미소가 비장해 보이기까지 해서 한승은 실소할 뻔했다.
“누구 죽이러 왔습니까?”
한승이 비딱하게 물어보자, 그녀가 당황했는지 입을 슬쩍 벌렸다가 이내 다물어 버린다. 자극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도 아닌데, 그녀를 향해서는 이상하게 뾰족한 말만 찔러 댔다.
“아니요. 살리러 왔습니다.”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대답 또한 가관이다.
“들어갑시다.”
“저기, 셰프님.”
그녀가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한승의 앞을 가로막았다.
“뭐 하는 겁니까?”
설마 이 타이밍에 엉뚱한 애정 고백을 해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오늘은 저와 식사하시는 게 아닙니다. 제가 부탁을 좀 받았거든요. 셰프님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한승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 버렸다.
“혹시 이사벨 파리노드입니까?”
더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그녀는 빈틈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선을 그어 버리는 완벽한 저 얼굴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주제넘은 짓을 했다는 생각, 안 듭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로 끝낼 문제가 아닌데……. 이사벨 파리노드가 어디까지 말했습니까? 내가 잃어버렸던 자기 조카라는 말도 하던가요? 그래서 연민이라도 생기셨습니까?”
한껏 비꼬는 말이 포화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한승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미동조차 없었다.
이미 예상해서 이런 반응인 걸까?
아니면 충격에 굳어 버린 걸까?
“왜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합니까?”
그녀가 가느다란 숨을 토해 내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셰프님. 셰프님과 그렇게 관련 있는 사람인 줄 모르고 진행한 일입니다.”
진심으로 몰랐던 눈치다.
결국, 치부를 들춘 사람은 그녀가 아닌 한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