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한승은 사과를 해 오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제과점 형편이 좋지 않아서, 셰프님께 도움을 요청하겠다고 했습니다. 유학 생활하면서 이사벨에게 신세를 진 적이 있어서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간절하고, 절박하게 부탁할 때부터 이상했던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마음에 안 든다. 당황하지도 않고 깍듯하게 사과는 저 태도가 거슬린다. 기민한 그녀는 한승이 할 말이 없어지도록 온당한 사과를 해 왔다.
“하아.”
한승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차라리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어떻게 된 일이냐며 묻고, 자신을 연민 어린 시선으로 올려다봤더라면, 이렇게 속이 뒤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완전한 타인의 입장에서 건네 온 사과에 일말의 감정이라곤 없었다.
실망스럽다. 무엇이, 왜 실망스러운가?
한승이 갑갑한 기분을 가누지 못하고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그런 사정이 있는 거라면, 이사벨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사벨을 오래 알고 지냈지만, 제과점 운영이 어려워졌다는 핑계까지 대며 저에게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할 사람은 아니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그녀는 한승이 아닌 이사벨의 처지를 두둔하고 있었다. 한승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패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떨까요?”
도로 호텔로 돌아가려고 발걸음을 옮기려는 한승을 그녀가 설득했다. 그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그녀에게 넘쳐흐르는 박애 정신에 입각해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그럼.”
한승은 허공을 응시한 채로 읊조렸다.
“도수아 씨는.”
그녀의 어깨가 살짝 올라붙는 게 느껴졌다. 나직하게 긁는 한승의 목소리에 그녀가 바짝 긴장하는 듯했다.
“내 사정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에 대해 아는 거 있어요?”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삐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얼굴로 한승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셰프님 사정은 모르지만, 이사벨을 알아서 이 자리를 마련했고, 이상했던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그래서 죄송하다고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녀는 사과의 이유를 들고 있었지만, 어쩐지 뉘앙스는 한승에게 애처럼 징징거리지 말라고 타이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
한승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며, 한 발짝 발걸음을 뗐다.
“후회.”
감히 그녀가 내뱉은 주제넘는 단어에 한승이 우뚝 멈춰 섰다.
“후회 안 하시겠어요? 이대로 가시면?”
무슨 사연인지도 모른다면서, 그녀는 정확하게 맥락을 짚어 가며 한승을 몰아붙였다.
정말 대단한 여자다. 어떻게 해서든 한승의 신경에 거슬리게 태어난 사람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녀와 자신의 유전자 구조가 서로를 거스르는 조합으로 생겨 먹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차한승 셰프님.”
등 뒤에서 이 모든 사달의 주범인 이사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보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이사벨은 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서 또다시 저를 만나고자 한 것일까.
“애먼 수아 잡지 말고, 나랑 이야기해요.”
한승은 고개만 비스듬히 돌려서 뾰족한 시선으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이야기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합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말고도 내가 결정해요. 알아듣겠어요?”
선선한 미소를 머금으며 건넨 말에 이사벨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정말 까뜨린느랑 똑같네.”
그녀가 입에 올린 이름은 한승을 멈칫하게 했다. 그 찰나의 감정 변화를 놓치지 않고 이사벨이 한승에게 다가섰다.
“들어가죠.”
한승은 하얀 입김이 불거지도록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이사벨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시선이 뒷덜미를 잡아챘지만, 돌아볼 기분이 아니었다.
또 기다리고 있으려나? 그때처럼 양 볼과 코를 빨갛게 물들인 채로 추위에 떨며 저를 걱정하고, 기다릴까?
한승은 묘한 기대감이 젖으려는 기분을 얼른 털어 냈다.
안내된 좌석에 앉자, 이사벨이 식당 안을 둘러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예전에 한국 사진에서 이런 비슷한 걸 본 적 있어요.”
그녀는 예전부터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며 웃었다. 다른 상황, 다른 관계로 얽혔다면 좋은 친구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한승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시간 낭비 할 생각 없습니다. 하실 말씀 하시죠.”
“우선, 미안해요.”
이사벨은 한승에게 따뜻한 시선을 내비쳤다.
“밖에 있는 수아에게도 그렇고, 여기 있는 차한승 씨에게도 그렇고.”
아직도 밖에 있으려나? 돌아가는 길일까?
한승은 생각의 흐름이 걷잡을 수 없이 그녀를 향하는 것을 이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수아를 속였는데……. 아까 보니까, 수아가 어느 정도 알아버린 분위기더라고요.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요.”
한승은 예의상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정말 많이 닮았네, 까뜨린느랑.”
이사벨은 혼잣말인 것처럼 읊조렸지만, 한승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았다.
“차용훈 씨는 잘 지내요?”
친부의 이름 석 자가 이사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적의나 악의를 품은 어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잘 지내십니다.”
“까뜨린느는 한동안 잘 못 지냈어요. 차용훈 씨와 헤어진 이후에도, 그리고 그와 닮은 아들이 가브리엘에서 차한승으로 바뀐 이후에도.”
불편한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왔다. 이사벨은 먼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는 펜팔이라는 게 있었어요. 국제 우편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건데, 까뜨린느는 펜팔을 통해 차용훈 씨를 만났어요. 그 사람이 그렇게 부자인 줄도 몰랐고, 파리에 온다는 말에 설마 했죠.”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야기. 한승은 마치 소설 줄거리를 듣는 기분이다.
“우리 제과점에 왔을 때, 단번에 알아봤어요. 훤칠한 용모가 차용훈 씨를 꼭 빼닮아서. 그리고 까뜨린느의 눈동자랑 머리카락 색까지. 차한승 씨가 우리 제과점에 온 건, 내가 차한승 씨에게 까뜨린느 이야기를 해 줘야 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한승은 끼어들지 않고 이사벨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까뜨린느는 차용훈 씨를 많이 사랑했어요. 차용훈 씨도 이사벨을 많이 사랑했고. 차용훈 씨가 파리 1 대학으로 경제학 석사 과정을 공부하러 온다고 했을 때, 솔직히 놀랐어요. 까뜨린느를 보려고 여러 번 파리를 다녀가기는 했지만, 유학까지 올 줄은 몰랐거든요.”
두 사람은 아버지가 구한 집에서 함께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까뜨린느가 임신을 했어요. 그런데 그때 차용훈 씨 형이 사고로 죽었고. 장례식만 참석하고 돌아온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나 봐요. 형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어떻게 되었는지 알겠죠? 두 사람은 서서히 멀어졌어요.”
큰아버지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뒤, 거시경제학자가 되려던 아버지가 유학 도중에 그룹에 투입되었다는 이야기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룹의 부회장직에 올라 있지만, 아버지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언제나 가족이었다. 책임감이 강했고, 제 사람을 지키는 데는 수단을 가리지 않을 분이었다.
“제 아버지가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자하고 헤어졌다는 말씀입니까?”
이사벨은 고개를 내저었다.
“인생은 타이밍에 지배당하죠. 임신 사실을 알리지 못했어요. 나중에는 일부러 알리지 않았고.”
왜 그래야만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까뜨린느는 프랑스에서 살고 싶어 했어요. 차용훈 씨는 그런 까뜨린느의 의견을 존중해서 파리에서 살아가려고 했었고. 차용훈 씨 형이 죽은 이후로 사정이 달라졌죠. 한국에서 차용훈 씨 집안은 까뜨린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고, 까뜨린느는 그곳에 가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래서 까뜨린느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 뒤에 홀로 가브리엘을 낳았고.”
그러면 혼자 잘 키우지 그랬느냐고 묻고 싶어졌다. 친모가 아닌 다른 이에게 물을 말은 아니어서 한승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궁금한가? 왜 버려졌는지 들어야 하나?
처음 한국에 갔을 때 낯설기는 했지만, 한승은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따뜻한 가정, 유복한 삶, 모자라기는커녕 차고 넘치는 환경이었다. 학교에 가면 외향적 차별과 따돌림이 존재했지만, 그것 외에는 불만 없는 삶이었다.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었고, 원하는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꿈을 저버려야 했던 이유인지,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그룹과 관련한 일을 강요하지 않았다.
“까뜨린느가 좀 아팠어요.”
내내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던 이사벨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졌다. 친모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모가 아팠다는 말에 한승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디가, 얼마나 아팠습니까?”
질문을 내뱉는 목소리가 탁했다. 사람들에게 선한 벽을 세우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천성이 선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약 악한 본성을 가졌더라면, 가진 것을 이용해 그악한 위치에 올랐을 것이다.
천성은 친모를 향한 그리움과 연민을 자아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홀로 아들을 낳아서 키운 것도 모자라,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어린 아들과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여자.
친모를 향해서 단단하게 굳어 있던 심장에 미세하게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유방암……. 홀로 투병하면서 가브리엘을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자존심이 센 까뜨린느는 집안에 손을 벌리는 법도 몰랐어요. 그러다 결단을 내린 거죠. 영특한 가브리엘이 풍족한 환경에서 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사벨의 눈가가 붉었다. 그녀는 눈물이 맺힌 눈을 길게 늘이며, 깊게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를리 공항에서 헤어지던 날, 나도 같이 있었어요.”
한승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기억이 나질 않네요.”
“어렸으니까.”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승에게 이사벨은 괜찮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번 만나 보지 않겠어요?”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이사벨은 더는 강요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순순히 물러났다. 제과점에 얼른 가 봐야 한다며 이사벨은 용건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
한승은 이사벨이 떠난 후에도 한참을 홀로 앉아 있었다.
식당을 나서는데, 목소리보다 먼저 그녀가 풍기는 향기가 느껴졌다. 한승은 천천히 돌아보았다.
시선이 닿은 곳에 그녀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