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
역시나 그녀의 코끝은 새빨갰고, 양 볼도 붉게 물든 채였다.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물으려다가 그냥 돌아섰다.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해진다.
또 ‘셰프님.’ 하고 불러 세우겠지.
다섯 걸음쯤 움직였을 때, 등 뒤에서 조용히 따르는 기척이 느껴졌다.
왜 또 오늘은.
한승은 우뚝 멈춰 서서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 세 발짝쯤 떨어진 곳에서 그녀가 한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화가 난다.
이상하게, 괴롭히고 싶다.
이상하게, 저 여자는 자꾸만 저를 뒤흔들어 놓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선 제 곁을 맴도는 그녀를 이제는 견딜 수가 없다.
“이봐요, 도수아 씨.”
한승은 그녀의 이름을 한껏 고깝게 불렀다. 그녀의 이름 사이사이로 가쁜 숨이 새어 들어갔다.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숨이 차오를 만큼 가슴이 빠듯하게 조였다.
“네, 셰프님.”
그녀가 동요 없는 잔잔한 얼굴로 대꾸했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위로를 건넬 의도도 없다는 듯이, 그저 묵묵한 시선으로 한승을 마주했다.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그녀의 의중 때문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농담 같은 말을 툭툭 던질 때도 그녀는 자신을 숨겼다. 그녀의 진심이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힘들었다.
하긴 이제껏 타인의 진심을 가늠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적이 있던가?
타인에게 몰입하여 가슴속에 올올히 박히는 미세한 감정을 정의 내리려 골몰했던 적이 있던가?
한승은 한걸음에 그녀에게 다가섰다.
“왜 따라오는 겁니까?”
유치한 질문인 줄 알지만, 쉽사리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에게 물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몰아쉬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도 아슬아슬한 혼란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왜 자신이 타인의 복잡한 인생에 끼어들게 되었는지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를 어떻게 모른 척하고 멀어져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지도.
멀어진다? 갑자기 거리감이 불쑥 드러나 두 사람 사이에 깊은 골을 파 놓은 기분이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승은 입만 한 번 벙긋거렸다. 왜 따라오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은 지금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그녀 역시 감정의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곤혹스러운 눈치였다.
그녀는 어떤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을까?
“본인이 무슨 생각으로 따라오는지도 모르면서, 남자 뒤 밟는 거. 위험하다는 생각 안 듭니까?”
“셰프님을 위험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허공을 향해 있던 그녀의 시선이 한승을 향했다. 그녀의 눈빛은 한승을 꿰뚫어 볼 것처럼 곧았다.
“인생 되게 안일하게 사시네요.”
한승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다른 후배들에게는 상냥하고 친절하게 구는데, 자신에게만 혹독하게 대하는 남자를 위험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단다.
“인생을 안일하게 사는 편은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이 편협하게 판단당했다고 여겼는지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한승은 한 발짝 더 그녀에게 다가섰다.
“도수아 씨, 그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나한테 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지른 순간, 그녀가 한승에게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저한테 유독 감정적이신 거 아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격앙된 한승의 음성과는 다르게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한테만 못되게 구시는 거, 아시냐고요.”
한승은 차가운 불꽃이 이는 듯한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속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처럼 깊이.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숨결이 뒤섞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한승이 어금니를 사리문 채로 읊조렸다.
“네가 날 혼란스럽게 하니까.”
그녀의 눈동자에 감정 한 가닥이 드리운다.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존재감은 아니어서, 한승을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네가 날 헷갈리게 하니까.”
그녀의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놀란 눈치다.
한승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도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타인에게 털어놓은 적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없었다. 계산되지 않은 친밀한 관계를 맺어 본 적도 없다.
가슴속에서 들끓는 설익은 불덩이가 머릿속을 지배하려 들었다.
그녀는 모른다고 했다. 한승은 혼란스럽고, 헷갈린다고 했다.
감정은 때론 투명하게 드러나 선명한 정의를 내릴 수 있지만, 이렇게 가끔은 심장을 뒤흔들어 놓고도 비밀스럽게 숨어서 숨통을 조여 올 때가 있다.
생명이라도 위협하겠다는 듯이 숨을 가쁘게 만들고, 심장을 버겁게 뛰도록 한다.
“다른 후배들한테는 편하게 대하시면서, 저한테는 꼬박꼬박 말 높이시죠? 못되게 굴었다가, 또 제가 하는 부탁은 다 들어주시죠. 그래서 저도 모르겠어요. 셰프님이 왜 그러는지도 모르겠고, 저는 왜 셰프님한테 이러고 있는 건지.”
“고민해 봐.”
한승은 그녀에게 숙제를 안겨 주듯 읊조렸다. 그녀는 한쪽 눈썹만 비스듬히 올리며 한승을 응시했다.
“나도 고민해 볼 테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돌아섰다. 갑자기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한다.
그녀는 지금부터 열심히 한승과의 관계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며칠 동안 내처 그녀의 생각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제는 혼자서 끙끙거리는 게 아니라, 그녀의 머릿속도 저로 가득찰 것을 생각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한승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등 뒤에서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비강을 훑고 들어와 가슴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향기도 더는 느껴지지 않는다.
아쉬움에 손끝이 저려 와서, 한승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 *
첫 번째 투어인 디너 크루즈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여행객은 전부 스무 명. 대부분이 여자였고, 남자는 딱 세 명뿐이었다. 두 명은 아내와 함께 온 부부동반 고객이었고, 나머지 한 명은 홀로 여행에 참여한 사람이었다.
수아는 메뉴 카드를 나눠 주며 여행객 한 사람, 한 사람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식사가 정말 훌륭했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고, 메뉴 카드에 적힌 불어의 독음을 묻기도 했다.
차한승 셰프는 주변에 모인 여행객들과 사진을 찍어 주고 있었다. 시은은 정 지부장과 다음 일정 어시스트를 논의하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고로 수아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고민해 봐. 나도 고민해 볼 테니까.」
나지막이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귓가를 맴돌았다.
“저기.”
앞에 선 남자가 수아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네?”
“저는 안 주세요?”
그는 메뉴 카드를 들고 있는 수아의 손과 수아의 눈을 번갈아 보며 웃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수아는 얼른 고개를 숙여 사과하며, 메뉴 카드를 건넸다.
“고영석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명단에서 이름 확인했습니다.”
수아는 전형적인 미소를 머금으며 인사했다.
“그쪽은? 기시은 씨, 아니면 도수아 씨?”
그는 여행사에서 나눠 준 가이드북을 살피며 물었다.
“도수아입니다.”
“반가워요. 앞으로 3주 동안 보겠네요?”
그는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었지만, 사진은 전부 휴대폰으로 찍는 듯했다.
“왜 카메라는 사용 안 하세요?”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이었다.
“이런 데서 머리통만 한 카메라 들고 설치는 거 볼썽사납잖아요.”
그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잘도 건넸다.
“그럼 머리통만 한 카메라를 쓰는 곳은 어디…….”
“도수아 씨.”
며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가 여행객들과 사진을 찍다 말고, 수아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3차 오리엔테이션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며칠 동안 그는 수아를 본체만체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알은체를 해 오니 적잖이 당황스럽다. 왼쪽 가슴이 꽉 조여 오는 듯한 착각도 인다.
“잠깐 나 좀 봅시다.”
그는 일적으로 논의해야 할 일이 생긴 것처럼 수아를 불러냈다. 그가 선내를 나서는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수아는 마주 선 영석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승의 뒤를 따랐다.
오늘 그의 공식적인 역할은 모두 마무리된 상태였다. 서비스 개념으로 사진을 찍어 준 것뿐이지 그에게 더는 자리를 지킬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자리를 뜨는 것은 좀 곤란해 보였다.
“무슨 일이세요?”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디너 크루즈 선의 외부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었다. 통제 구역에는 한승과 수아,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도수아 씨.”
“네.”
그는 수아의 이름을 의미심장하게 부르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침묵하는 짧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겨웠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된다면, 도수아 씨는 어떻게 합니까?”
그의 의도가 단번에 심장을 꿰뚫고 들어왔다.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가늘게 숨을 내뱉은 수아가 청량한 목소리를 냈다.
“때와 상황에 따라 다릅니다.”
그는 딱딱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가 난간에 허리를 기대며 팔짱을 꼈다.
그의 등 뒤로 정시마다 반짝거리는 에펠탑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에펠탑이 이 정도 거리에서 보인다는 건 선착장이 근처에 있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곧 배가 정박할 것이다.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애매한 질문과 모호한 답변만이 오고 갔다. 이야기를 꺼낸 이상 끝을 맺어야 했다. 안에서 대도 여행사 측 가이드의 인솔하에 여행객들이 움직일 시간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비스듬히 서서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고개를 까딱까딱 움직였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이 배가 된다.
“그럼, 지금은?”
또다시 모호한 질문, 결론을 내야만 한다.
“저는 합니다.”
그가 왼쪽 눈썹을 한 번 들썩이더니,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는다. 그러고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수아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또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우린 같은 고민을 한 것 같아서.”
그의 눈꺼풀이 느릿하게 움직인다. 기다란 속눈썹이 가슴을 간질이는 것처럼 소름이 돋는다.
“도수아, 너도 나한테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