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거부할 수 없는 끌림. 만유인력을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는 것처럼, 달의 모양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처럼.
등 뒤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선내에 있는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떤가.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것처럼 모든 게 완벽해지는 순간이 있다. 강물 위를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과 옛 시대의 유물과 어우러지는 오렌지빛 조명, 반짝거리는 에펠탑과 전 세계 사람들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좇아 모여드는 도시의 밤.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만들기에, 당사자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감정적 비밀을 투명하게 드러내기에 알맞았다.
수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저도 그래요.”
난간에 느긋하게 기대 서 있던 그가 단번에 몸을 일으켜 세우며 수아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강바람에 뒤섞인 그의 체취가 속을 울렁이게 할 만큼 자극적이다. 일순간 현기증이 일어서, 수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허벅지 옆쪽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던 손이 그에게 붙들렸다. 그는 수아가 눈을 감은 의도를 다르게 해석한 듯했지만, 상관없었다.
그와 손이 맞닿은 순간, 오해라고 설명하고 물러서고 싶기는커녕 심장이 급격히 팽창하며 가슴을 빠듯하게 채웠다.
그의 손에 이끌려 뱃머리에 있는 창고 안으로 몸을 숨겼다. 창고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모든 빛이 차단된 공간 안에서 오직 느낄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손의 열기와 벅차오른 숨소리뿐이었다.
허리에 그의 단단한 팔이 휘감겼다. 그의 손길에 옷이 쓸리는 소리가 외설적이다. 수아는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에 손바닥을 얹었다. 얇은 셔츠 아래로 단단한 근육이 둥둥 울리는 게 느껴진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숨결이 가까워졌다. 콧잔등 위로 그가 내뱉은 달큼한 열기가 흘러내린다.
먼저 코끝이 맞닿았다. 서로의 숨결을 조심스럽게 나눠 마셨다. 취한 듯 머릿속에 혼몽하다.
그가 천천히 다가와 수아의 아랫입술을 빨아 물었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을 뿐인데, 발가벗은 몸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전율이 흘렀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 열기에 수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팔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수아를 휘감아 안았다. 단단한 품 안에 수아의 몸이 완벽하게 구속되었다.
숨이 너무 가빠서 괴로워지려는 찰나, 입안으로 물렁물렁하고 단단하면서 뜨겁게 젖은 혀가 밀려 들어왔다.
“음.”
억눌린 신음이 목에서 울렸다. 입안을 가득 채운 혀가 목구멍에 닿을 것만 같아서 숨이 턱 막혔다. 입천장 안쪽의 예민한 점막을 그가 무자비하게 핥았다. 동시에 내뱉는 숨결이 빠져나갈 새도 주지 않고 거세게 흡입했다.
몸 안에 있는 모든 게 입을 통해 그에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전신이 흐물흐물 녹아서 그에게 스며드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줄도 모르고,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수아의 등허리를 받쳐 안은 채 벽으로 밀어붙였다.
단단한 벽에 수아의 몸이 닿지 않도록 감싸 안은 팔이 분주히 움직였다. 두꺼운 혓바닥에 수아의 혀가 휘감겼다. 오돌토돌한 돌기에 얼얼할 정도로 비벼졌다. 입안을 적시고 있던 타액을 그가 전부 빨아 마셨다.
머릿속이 아득해지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숨결마저도, 몸을 적시는 타액 마저도 그가 전부 앗아 간다. 이제 막 무언가 시작되었을 뿐인데, 이러다 그에게 목숨마저 빼앗길 것 같은 무서운 기분이 든다.
“하아.”
수아는 가까스로 고개를 비틀어 입술을 떼어 냈다. 뜨겁게 갇혀 있던 숨결이 단번에 터져 나왔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귓불을 힘껏 빨아들이고는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흐으. 셰, 프흐님.”
토막 난 숨결 사이로 목소리가 간신히 끼어들었다. 절박한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아찔한 통증이 목덜미를 스치고 단숨에 전율이 흐른다.
등허리를 쉴 새 없이 문지르던 그의 손이 겨드랑이를 더듬어 가슴 밑동까지 닿았다. 수아는 손을 내려 그의 커다란 손을 저지했다. 힘으로는 막을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멈춰야만 했다.
“우리, 이제. 나가 봐야 해요.”
그가 살갗을 베어 문 채 잇새로 읊조렸다.
“잠시만 더.”
“흐으.”
목덜미에 상흔이 남을 것 같았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끝이 엉덩이 곡선이 시작되는 지점까지 닿았다. 뜨끔한 전율을 감당할 수 없어서 잔뜩 힘을 준 다리 사이에서 미끈하게 흘러내리는 감각이 생경했다.
“이제, 그만.”
수아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헝클어진 매무새를 정리하고 나가려면 이쯤에서 그만둬야 했다. 그에게 더 매달리고 싶은 것은 수아도 마찬가지였지만, 생판 모르는 관광객이 모여 있는 배 안 창고에서 몸을 섞는 짐승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신 차려요!”
수아는 그를 나무라듯 단단한 어깨를 찰싹 내리쳤다. 힘껏 내리쳤는데, 제 손만 아프다. 그는 미동도 없이 수아를 품에 안은 채로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너한테선 사람을 미치게 하는 냄새가 나, 알아?”
탁하게 쉰 음성이 내뱉은 말에 수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대외적으로 보이는 모습만을 두고 봤을 때, 그가 입에 올렸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외설적인 말이었다.
“몰라요. 내가 내 냄새를 어떻게 알아.”
수아는 분위기를 식히려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앞으로 나한테 차갑게 굴지 마.”
숨결이 뒤섞인 토막 난 음성에 쓸쓸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안쓰러운 생각까지 들어서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는 찰나,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팔팔 끓어 넘치게 만들고 싶어지니까.”
커다란 손이 수아의 목덜미를 움켜잡았고, 입술은 단숨에 그의 입안으로 쭉 빨려 들어갔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머릿속이 흐릿하고 가물가물해졌다.
그가 순식간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손을 떼는 바람에 수아는 하마터면 몸을 휘청거릴 뻔했다.
“나 먼저 나갈 테니까, 옷 정리하고 나와.”
어둠 속에서 그는 머리를 슥슥 쓸어 넘기고는 창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수아는 널브러진 나무 궤짝 위에 잠시 기대앉았다.
가슴속이 뭉클뭉클 뭉친 기분이다. 올바른 사고가 어려울 정도로 머릿속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수아는 그와 맞닿아 있던 입술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열기에 녹고, 물기에 젖었던 입술이 퉁퉁 불어 있었다.
“하아.”
한숨을 길게 내쉬며 수아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슬랙스 밖으로 빠져나온 블라우스를 정리해서 넣고, 풀어진 윗단추를 꼼꼼히 채웠다. 창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덜컥 겁이 났다. 누군가 두 사람의 수상한 행적을 알아차린 것은 아닌지.
수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창고 문을 열어젖혔다.
“어? 수아야! 창고에 있는 거 정리 안 해도 된대. 왜 거기 들어가 있어?”
수아를 발견한 시은이 염려 섞인 목소리로 물으며 다가왔다.
“아. 그래요?”
어색하게 창고 안을 돌아보자, 대도 여행사라 쓰인 커다란 상자 여러 개가 눈에 들어온다. 디너 크루즈에서 제공되는 와인과 디저트를 변경하는 바람에 배에 실린 지원 물품이 담긴 상자들이었다.
“어디 갔는지 한참 찾았어. 혼자 고생했지?”
“아뇨. 고생은 무슨. 그냥 뭐가 있나 살펴보기만 했어요.”
굉장히 야한 꿈을 꾸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꿈속 상황을 되짚으며 홀로 얼굴을 붉히는 것처럼, 수아는 이 배 안에서 혼자만 다른 세상에 있는 듯했다.
“저건 선사 측이랑 여행사랑 알아서 정리할 거래. 그런 것까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정 지부장님이 그러더라고. 그냥 선배님 어시스트만 하면 돼, 우리는.”
“아, 네.”
“야, 말없이 사라지고 그러지 마. 선배가 화장실 다녀오시고 나서, 너 사라졌다고 되게 화내셨어.”
“차한승 셰프님이요?”
꿈꾸는 듯했던 기분이 싹 달아났다. 뻔뻔하기가 정도를 모른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부둥켜안고선 온갖 야한 말을 쏟아붓던 남자가 들어가서 뭐라고 해?
“뭐라고 화내셨어요?”
진심으로 궁금해진다. 그가 들어가서 어떤 거짓을 고했을지가.
“어시스트해야 할 사람이 붙어 있지 않고 멋대로 움직인다고. 나도 좀 혼났어. 너 그러지 마.”
시은은 자신이 혼난 것에 굉장히 속이 상한 눈치였다.
“죄송해요. 선배.”
사과할 일은 사과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사과를 하게 만든 남자가 얄미워서 정수리에서 김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차갑게 굴면 팔팔 끓어 넘치게 해 주겠다더니, 여러모로 사람 열 오르게 하는 데 재주가 가상한 남자다.
“어? 근데 수아야. 너 목에 상처 났다? 창고 안에서 긁혔나?”
시은이 수아의 목덜미를 가리키며 자세히 들여다보려 했다.
“아, 제가 먼지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창고에서 좀 긁었는데, 부어올랐나 보네요.”
“아이고. 약 사 먹어야겠다. 심한데?”
차한승, 대체 얼마나 물고 빨아 놓은 거야.
수아는 어금니를 가만히 사리물었다.
“얼른 내리자, 우리도. 여행객들은 선배랑 인사하고, 가이드 따라서 호텔로 갈 거래. 우리는 이대로 집에 가면 된대.”
“언니.”
“응?”
“아까 차 셰프님 화낼 때요. 얼굴이 어땠어요?”
“얼굴이?”
시은은 그때를 떠올리려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냥 평소랑 비슷하셨어. 조금 붉었나? 화나서? 뭐 선배가 화를 냈다고는 하는데, 사실 선배가 화내 봤자잖아. 그냥 따끔하게 한소리 하는 정도고, 금세 풀어 주시고.”
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셨어?
자신은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아서 다리 사이가 뜨끔할 정도인데, 그는 그새 평정을 되찾았나 보다.
“집으로 갈 거지?”
“그래야겠죠.”
선선히 대꾸하는데, 슬랙스 뒷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가볍게 진동했다. 수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시은이 따돌리고, 전화해.]
창고에서의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듯이 심장이 두근거리며 반응했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밤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