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
“아, 언니. 24시간 하는 약국 좀 들렀다가 가야 할 것 같아요. 집에 알레르기약이 있는지 없는지 기억이 안 나서요.”
“그래? 그럼 같이 갔다 가자.”
시은은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웃었다.
“아니에요. 혼자 따로 들러야 하는 곳도 있고요.”
수아 역시 주특기를 발휘하며 웃었다.
수아는 서늘한 눈빛과 목소리로 선을 긋는 것을 잘했다. 사실 수아는 대부분 사람에게 서늘하게 대했다. 아버지의 직업에 기인한 이유도 있었지만, 차가운 성격의 정점을 찍어 준 이는 배성헌이었다.
오늘 같은 날 하필 그 이름이 왜 떠오르는 걸까?
배성헌은 질이 나쁜 놈이었고, 수아의 배경을 이용하려 전략적으로 접근한 양아치였다. 그래 놓고 수가 통하질 않자,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떨어졌다. 한동안 두 사람의 만남과 이별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수아가 뜬소문에 발끈했다면 피어오른 연기가 진짜일지도 모른다고 동요하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수아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수아가 입을 다물고 모른 체하자, 일부는 뻔뻔하다고 뒤에서 욕했고, 일부는 성헌의 성격을 알기에 뜬소문이 돌았다고 생각했고, 일부는 아무런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땔감이 사라지고 불이 꺼지면, 연기는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후 파리를 떠난 성헌의 소식을 딱 한 번 들은 적 있다. 수아를 만나기 오래전부터 연인 관계였던 여자와 결혼을 했다고.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 배성헌이 왜 생각나는 건데.
잊고 살았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와 마음이 불편해진다. 상처를 받은 기억도 없고, 사랑한 적도 없는 남자인데…….
까탈스럽게 굴었던 차한승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슬며시 겹친다.
만약 배성헌과 비슷한 짓거리를 그가 한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왼쪽 가슴이 비틀어진다. 그와의 만남이 치졸한 방식으로 끝이 난다면 큰 상처가 될 것을 수아는 직감했다.
상처에 대한 가정은, 그만큼 그에게 깊이 빠지게 될 거라는 가정과 동일한 의미였다.
수아는 입 안쪽 살을 괜히 한 번 짓씹으며 잰걸음을 옮겼다. 디너 크루즈 전용 선착장을 빠져나와 역 앞에서 시은과 작별 인사를 한 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이제 나왔어?
신호가 채 한 번도 가기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휴대폰 지켜보고 있었어요? 어떻게 이렇게 빨리 전화를 받아요?”
― 어, 노려보고 있었어.
솔직히 대꾸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의 초조함에 수아의 심장은 기분 좋게 뛰어 댔다.
“어딘데요?”
― 이쪽.
수아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렸다.
― 거기 말고. 길 반대편.
길 건너로 시선을 돌리자 그가 휴대전화를 슬쩍 흔들어 보인다.
“거기서 그러고 있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 왜 누가 보면, 뭐?
“3주 동안 나는 셰프님 밑에서 일해야 해요. 좋은 소리 듣겠어요?”
― 들을 수도 있지. 왜 이렇게 겁을 먹지?
그의 물음에 어쩐지 큰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수아는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어찌 되었건 그가 자신과 배성헌에 얽힌 이야기는 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건너 와. 이쪽으로 가게. 그쪽엔 냄새나는 물밖에 없잖아?
로맨틱한 파리의 상징 중 하나인 세느강을 그는 냄새나는 물이라 표현하고 있었다. 수아는 잠시 멈칫했다.
내가 저런 멋대가리 없는 남자랑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2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아가 보도블록 위로 올라서자, 그가 수아의 어깨를 단숨에 당겨 안더니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저기, 지금. 여기서.”
당황스러워서 의미 없이 토막 난 단어만 줄줄이 흘러나온다.
“가만히 있어 봐. 죽을 뻔했으니까.”
“왜요?”
설마 그가 진짜로 죽을 뻔했겠느냐만, 그가 어떤 말로 심장을 떨리게 할지 궁금해서 입안이 바싹 말랐다.
“알면서 물어.”
맥 빠질 정도로 단순한 대답이었지만, 나쁘지는 않다. 목덜미에서 가까스로 입술을 때어 낸 그는 수아의 손을 가만히 잡고는 물었다.
“좀 걸어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는 눈썹을 모아 올리며 묻는 모양새와 말투까지 수아를 흉내 내고 있었다. 수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아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디 가요?”
모퉁이 하나를 돌았을 때, 수아가 물었다.
“글쎄.”
“만나자는 사람이 장소도 생각 안 해 봤어요?”
수아는 그가 자신을 나무랐던 방식 그대로 되갚아 주었다.
“도수아 생각만 하느라, 딴 걸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네.”
되로 주고, 말로 받기. 붉게 달아오른 뺨 위로 부딪치는 강바람이 시원하다. 분명 디너 크루즈에 오를 때만 해도 기온이 많이 떨어졌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었다. 그런데 그가 전해 준 열기 탓에 달아오른 나머지 추위가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차갑게 굴면 팔팔 끓여 버리겠다는 그의 말이 또 생각나서 웃음이 픽 흘러나왔다.
“왜 웃어? 같이 웃지?”
“저기.”
“뭐?”
그가 수아를 깊이 들여다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저기 가자고요. 그리고 갑자기 너무 다정하게 구니까, 제가 적응이 안 되거든요.”
“그럼, 못되게 굴어 줘?”
그가 우뚝 멈춰 서며 물었다.
“아니, 그건 또 아니……!”
커다란 손이 어깨를 훅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그의 입속으로 작은 입술이 먹혀들어 갔다. 야릇하게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그는 노골적으로 입을 맞췄다.
열기가 훅 치솟았다. 아무리 그래도 길바닥에서 신음을 흘릴 수는 없어서, 수아는 고개를 끌어 내리며 입술을 떼어 냈다.
“놀랐잖아요.”
“못되게 굴어 달라며.”
그가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슥 닦아 내고는 수아의 입술을 엄지로 살살 어루만졌다. 입술을 어루만지는 손에서 올라온 그의 체취가 비강을 자극했다.
수아는 홀린 듯 읊조렸다.
“이게 뭐 못되게 구는 거야.”
얼굴 앞에 갑자기 그늘이 진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붉게 달아오른 수아의 눈가를 깊이 들여다본다.
“아,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눈을 마주한 채로 그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야릇하게 웃는다. 그의 시선만으로 속옷이 젖어 드는 것 같았다.
“길에서 이러지 말고요.”
“그럼, 어디 호텔이라도 들어가? 파리에 널린 게 호텔이기는 한데, 그건 너무 빠른 거 아냐?”
그가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로 그럴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저 놀리시는 거죠, 지금?”
간신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그가 다시금 멈춰 섰다. 그는 까만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가에서 하얀 입김이 아슬아슬하게 번져 나갔다. 고개를 천천히 내린 그가 수아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수아의 앞으로 척 걸음을 옮겨서 마주 보았다.
“왜, 왜요?”
압도적인 그의 외양에 제압당한 듯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가 대답 대신 수아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허?”
놀란 나머지, 수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켰다. 단단한 존재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놀리는 것 같아?”
수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내저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수아는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그의 곁에서 가만히 걷기만 했다.
“한국은 언제 돌아가?”
“한 3개월쯤 후에 가게 될 것 같아요.”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모습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통해 보였다. 그는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아무 말도 없었다.
부정할 수 없었던 끌림에 도취되어 손을 잡은 상황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잘 몰랐다.
새벽 2시까지 영업한다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수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너무 성급했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잠깐의 불장난쯤으로 여기고, 별생각 없이 입을 다문 것일까?
성급하게 진행되는 일에는 부작용이 따르기 마련이다. 수아는 가라앉는 기분을 어찌하지 못하고 메뉴판을 살피는 데 집중하려 노력했다.
“어니언 스프랑 맥주 어때? 콩피(confit: 가금류 기름으로 익힌 감자튀김) 하나 추가할까?”
수아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메뉴판을 접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간단한 주문을 마친 그가 웨이터를 향해 있던 시선을 수아에게 옮기며 물었다.
“너 근데 몇 살이야?”
수아는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은 키스를 나눈 남자가 자신의 나이도 모르고 있었다.
“스물여섯이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적네. 생각보다 더 어리고.”
“뭐요?”
수아의 목소리가 튀어 올랐다.
“농담이야. 왜 그렇게 인상을 팍 쓰고 있는 건데?”
수아는 차가운 인상을 가진 만큼 포커페이스에 능한 편이었다. 사실 가만히만 있으면 아무도 수아의 기분을 읽지 못했다.
그가 수아의 미간을 검지로 꾹꾹 누르며 덧붙였다.
“여길 왜 그렇게 모으고 있어?”
“혹시요.”
“그래, 나는 네가 ‘혹시요.’라고 말할 때가 제일 무서워. 그러고 나서 항상 폭탄 같은 질문이 터져 나오더라.”
수아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었다 놓고는 물었다.
“저 가지고 노시는 거면, 여기서 그만두셨으면 좋겠어요.”
그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가 팔짱을 끼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앉았다. 또다시 찌를 듯한 시선이 수아를 향했다.
“도수아.”
“네.”
허투루 한 말이 아니라는 듯 수아는 slakpw곧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앞으로 다른 남자 앞에서 웃지 마.”
“네?”
“아까 그 관광객 놈이랑 시시덕거렸던 거. 그런 거.”
수아가 한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는 자기 할 말을 해 댔다.
“아니, 셰프님. 제가 한 말에 대답을 해 주셔야죠.”
그는 하,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말이 말 같아야 대꾸를 해 주지.”
마침 맥주가 서빙되었고, 그는 고개를 한 번 절레절레 내젓고는 단숨에 kjmdm맥주 반병을 비워 냈다.
“그럼, 아니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어 있지? 너 지난 며칠 동안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알아?”
“제가요?”
그는 한숨을 훅 몰아쉬더니 테이블 위에 올라 있는 수아의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손등에 그의 말랑말랑한 입술이 닿았다. 그는 손등에 입술을 붙인 채로 읊조렸다.
“너나 나한테 그러지 마. 알았어?”
“제가 뭘”
“너도 나 갖고 놀지 말라고.”
직접 들으니 꽤 충격적인 말이었다. 수아가 사과의 말이라도 꺼내야 하나 망설이는데, 그가 더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