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21화 (21/62)

#021

“대체 이건 무슨 냄새야?”

그는 수아의 손을 슬쩍 돌려서 손바닥 안쪽에 입술을 묻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움푹 팬 안쪽에 닿은 입술의 촉감이 지나치게 부드럽다.

“무슨 냄새요?”

수아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을 코에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라고 대답하려던 순간 그가 했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너한테선 사람을 미치게 하는 냄새가 나, 알아?」

평생을 얌전하게 살아왔을 것 같은 사람이 얼굴 달아오르는 말을 잘만 해 댄다. 수아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긴 저 얼굴로 얌전히 살아왔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지금도 곁에 있던 시은을 감쪽같이 따돌리고 저와 이러고 있는데,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감히 단언할 수 있을까.

“무슨 냄새냐고.”

그는 대답을 바란다는 듯이 재우쳐 물었다.

“아무 냄새도 안 나요. 그냥 제 살 냄새겠죠, 뭐.”

말이 끝나자마자, 실수했구나 싶었다. 그의 눈동자에 어린 감정의 빛깔이 더욱 짙어진다. 붉다. 그의 깊은 눈매가 붉게 달아오르는 게 보인다.

“헷갈려.”

수아는 뭐가 헷갈리는지 묻는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내가 널 잡아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가 눈꼬리를 내리고, 입꼬리는 올리며 매혹적으로 웃는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있을 때, 그가 웃는 모습을 자주 보기는 했다. 그런데 이토록 유혹적으로 웃는 모습은 또 처음 본다.

마치 사자에게 반한 가젤이라도 된 기분이다. 잡아먹힐 줄도 모르고, 멀리서 다가오는 사자의 위풍당당함에 반해 넋을 놓은 가련한 가젤.

그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짙고 긴 속눈썹이 춤추듯 음영을 그려 낸다. 수아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갖고 놀지 말라고 무섭게 굴 때는 언제고.”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묻는다.

“뭐? 살 냄새?”

“살 냄새를 살 냄새라고 하지 뭐라고 해요? 아……. 소녀에게서 나는 고유의 향기옵니다, 라고 포장이라도 할 걸 그랬나?”

심장이 버겁게 뛰는 나머지, 수아는 괜히 쓸데없는 말을 더 보태고 있었다. 이제 사자 굴에 들어온 불쌍한 가젤이 제 주제도 모르고 사자를 설득해 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래 봤자 가젤은 사자의 식욕을 자극할 뿐이었다.

“내가 너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네 생각을 얼마나 했을 것 같아?”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저만큼 했겠죠.”

수아는 자신도 고민이 깊었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럼, 너도 나랑 하는 생각했어?”

이 남자는 훌륭한 셰프임이 분명하다. 말 한마디로 사람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재주가 가상하다.

“뭐, 뭘 해요?”

말도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배성헌이 자신의 집안 뒷일을 아버지한테 봐 달라는 미친 소리를 했을 때도 이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었다.

“글쎄. 나는 뭘 하는 생각을 했을까?”

목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수아는 맥주잔을 들고 한 모금 깊게 빨아들였다. 그의 시선이 수아의 입술을 타고 목덜미로 향했다. 맥주잔을 내려놓는데, 눈앞이 핑 돈다. 원래 술을 잘하지 못해서 밖에서 마시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그의 앞에서는 항상 예외적인 상황들이 발생한다. 그가 저를 갖고 노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면서도, 그와 함께 있으면 뭐든 괜찮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꼭 동전의 앞뒷면 같은 남자다.

“얼마나 했는데요?”

질문을 내뱉자마자, 수아는 입술로 치아를 덮으며 꾹 다물었다. 겨우 맥주 한 모금 들이켰을 뿐인데, 알코올이 흡수되자마자 헛소리가 튀어나온다. 이래서 술이 웬수라는 말이 있나 보다.

그는 수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웃기 시작했다. 재미있다는 듯이,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내가 발정 난 수컷처럼 느껴질 만큼. 많이.”

그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이 거침없이 대꾸했다. 수아는 저도 모르게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사실 온몸을 긁고 싶다. 그가 내뱉은 말이 공중에서 분해되어 살갗을 타고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너무 솔직하시네요.”

“많이 순화해서 말한 거야.”

“되게 놀아 본 사람처럼 보이는 거 아세요?”

저 외모에, 저 능력에……. 여자가 줄줄이 따랐을 것이다. 며칠에 한 번 여자를 갈아치웠다고 해도 수긍이 간다.

그에게는 지금 이 상황이 일반적인 범주에 속할까?

“그럴 리가.”

그는 자신이 속된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듯이 인상을 팍 구겼다.

“그래서 저는 겁이 좀 나요.”

수아가 방어적인 말을 꺼내 들자, 그가 진지한 눈빛으로 경청하겠다는 듯이 자세를 바로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수아의 왼쪽 손은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어떤 종류의 겁? 겁은 별로 없어 보이는데?”

그는 수아의 기질을 언급하며 설득력을 싣기 위해 애썼다.

“겁이 좀 없는 편은 맞는데요. 이건 아닌 것 같아서요.”

그는 크나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수아를 바라보았다.

“뭐가, 아닌 것 같은데?”

열기가 달아난 건조한 목소리였다.

“지금 만난 지 겨우 일주일 넘었는데…… 그동안 서로 끌린 건 인정.”

수아는 목이 말라서 맥주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역시나 어지러워진다. 하지만 그에게 말을 건넬 용기는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 다 갑작스러워요.”

그는 더 해 보라는 듯이 눈을 치떴다.

“아까 배에서 이야기하고 나서요. 갑자기 셰프님 태도가 180도 바뀌고, 갑자기 막 창고에서.”

“그래서.”

그가 숨 막힐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싫었어?”

그와의 키스가 싫었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때와 장소를 잊고 그에게 더 매달리고 싶은 충동마저 간절해지는 키스였다.

“그건 아닌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셰프님, 제 나이도 모르셨잖아요. 서로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아니면.”

수아는 잠시 망설였다. 이 말을 덧붙이면 그가 또 발끈할 것 같았다.

“아니면, 뭐.”

“그렇게 알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잠시 만났다가 헤어질 가벼울 사이로 치부해 버리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속속들이 알아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갑자기 초조해진다. 그에게 잡힌 손에 슬쩍 땀이 배어나기까지 한다.

“너.”

그가 길게 시선을 끌어와 다시 수아를 바라보며 스산한 목소리로 묻는다.

“연애는 몇 번이나 해 봤어?”

단순히 과거를 묻는 투가 아니었다. 마치 방정식의 참과 거짓을 알아보기 위해 변수의 값을 묻는 듯했다. 수아의 질문에 녹아든 심리를 알아보려는 질문 같았다.

“한 번이요.”

솔직한 대꾸가 흘러나왔다.

“그놈이 아주 개차반이었구나?”

하마터면 정답이라고 동그라미를 쳐 줄 뻔했다.

“뭐, 오래 만나지는 않았어요.”

이제야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아는 어설프게 얼버무렸다.

“들었어.”

“누구한테요?”

“세현이한테.”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어디까지, 들으셨어요?”

“네가 여자 있는 남자 후려서, 갖고 놀다가 차 버렸다고. 그 남자는 한국 가서 원래 있던 여자 친구랑 결혼했다고. 너 때문에 그 남자는 신세 망칠 뻔했다고.”

하마터면 입 밖으로 쌍욕을 내뱉을 뻔했다.

“욕은 속으로 하지 말고, 말로 뱉으라니까.”

“됐어요. 욕할 가치도 없어요.”

수아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면, 그놈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 놈 한국에 여자 있는 거 알았어?”

“아니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은 수아는 한탄하듯 덧붙였다.

“사귀자고 하고 딱 두 번 만났어요. 저한테 뭘 부탁했는데, 제가 싫다고 하니까 그날로 나가떨어졌고요. 어학연수 할 때, 워낙 티 나게 쫓아다녀서 여기저기 소문이 나는 건 막을 수가 없었어요.”

그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겁나? 나도 그럴까 봐? 한국에 여자라도 숨겨 놓고, 너한테 이러는 걸까 봐? 나도 너한테 뭐 바라는 게 있어서, 그거 안 들어주면 나가떨어질까 봐?”

“아니라고 완전히 부정은 못 하겠어요. 사람 사이에 신뢰라는 걸 쌓아야 하는데, 셰프님이랑 저는 그럴 시간이 없었잖아요. 그냥 서로 노려보기만 했지. 그런데 갑자기 노려보던 남자가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서 생글거리니까 적응이 안 되네요.”

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즐겁게 웃어서 당황스러울 정도다.

“왜 웃어요, 갑자기?”

“너 이제 보니까, 말 되게 잘한다.”

새삼 감탄스럽다는 듯이, 그가 수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감돈다.

“솔직해서 좋고.”

좋다는 말에 식었던 뺨이 다시금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예쁘고.”

심장이 배 속으로 스르륵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똑 부러지고, 일도 잘하고……. 부족해?”

뭐가 부족하냐고 묻는 건지 몰라서 수아는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내가 너한테 빠지게 된 이유. 더 말해 줘?”

그는 수아의 대답이 어떻건 상관없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차갑게 굴면서 마음은 따뜻해. 자기한테만 틱틱거리는 남자가 걱정돼서 추운 날씨에 밖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릴 만큼.”

“그건 셰프님이니까, 기다린 거예요.”

아무한테나 그러는 사람으로 비칠까 걱정돼서 꺼낸 말이었다.

“그건 고백으로 받아들이고.”

황당해서 말을 보태려는데, 역시나 그가 더 빨랐다.

“분위기 파악을 기가 막히게 잘해. 특히 내가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알아.”

“그야, 셰프님이 저만 유독 계속 갈구셔서, 눈치를 봐서 그런 거죠.”

“두 번째 고백. 내가 그렇게 신경 쓰인 거지?”

그는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도출해 낼 것 같았다. 수아는 이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고, 정신을 바짝 차리자고 다짐하며 눈을 부릅떴다.

“같은 고민을 했고, 너는 기꺼이 한다고 대답했어.”

“저도 셰프님이 싫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세 번째 고백.”

그는 근사하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너랑 이렇게 된 이유를 밤새도록 말할 수 있어. 너는 나한테 벌써 세 번을 고백했고. 이래도 뭔가가 의심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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