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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비밀-22화 (22/62)

#022

말을 잘하는 편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 남자는 도무지 이겨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은 위기감마저 느껴진다.

“그런 게 아니고요. 셰프님이랑 저는 지금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완전히 달라요. 서로 다른 방향에 서서 산을 올려다보면, 완전히 다른 산처럼 보이잖아요? 완만한 곳을 앞에 두고 바라보면 쉬운 산이 될 거고요, 가파른 곳에서 바라보면 어려운 산이 될 거예요.”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관계를 너무 쉽게 보고 있다, 이거야?”

수아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수아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인상을 구겼다.

“되게 자존심 상하네. 넌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으로 보여?”

“일주일 만에 저한테 홀라당 넘어왔는데, 어려워 보이지는 않아요.”

그가 허,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또다시 어이없다는 듯이, 하지만 흥미롭다는 듯이.

“그래서 똘똘이 도수아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제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주실 거예요?”

겉으로는 성격이 좋아 보이지만, 그는 완벽주의자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었다. 뭐든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면 절대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다.

“일단 말해 봐.”

역시 빈말이라도 다 들어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유예 기간을 뒀으면 좋겠어요.”

그가 못 알아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눈썹을 모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껏 유수와 같은 말로 홀리던 남자가 멍한 눈빛까지 보인다.

“유예, 기간?”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단어라는 듯 생경함 가득한 목소리다. 수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꾸했다.

“우린 서로를 너무 몰라요.”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슬쩍 풀리는 것 같아서 잡혀 있던 손을 슬쩍 빼 보았다.

“스읍!”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눈을 부릅뜨며 손을 다시 채간다.

“서로 알 만큼 알지 않나?”

“다시 말하지만, 셰프님은 제 나이도 모르셨는데요?”

그는 졌다는 듯이 손을 한 번 들어 보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유예 기간에는 대체 뭘 하는 건데?”

“서로를 알아가는 거죠?”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번져 가는 것을 수아는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어떤 체위를 좋아하는지, 어디에 키스하면 자지러지는지도?”

그가 너무 진지한 투로 물어서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그건, 좀. 아까 발정 난 짐승 같다고 하시면서 인상 쓰신 분 어디 갔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는 능청을 떨어 대는 모습조차 근사했다. 하지만 이대로 그에게 휩쓸리고 싶지는 않다.

“투어 끝나고 결정했으면 좋겠어요.”

“뭘?”

“우리가 계속 만나도 될지, 말지요.”

그가 악관절에 힘이 풀린 듯 입을 슬쩍 벌렸다. 멍해진 시선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는 갑자기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투어 때까지 내가 너한테 어떻게, 얼마나 잘하는지 지켜보시겠다?”

“뭐 꼭 그런 의미는 아니고요.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잖아요. 한국도 아니고요. 여행지나, 출장지에서 분위기에 휩쓸려 잠깐 일탈의 감정이 들 수도 있는 거잖아요? 또 유독 그러기 쉬운 도시이기도 하고요. 잘하는지 지켜보겠다는 게 아니라…….”

“아니라?”

수아는 어깻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힘주어 말했다.

“셰프님도 나중에는 내가 별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나에 대해 모르니까, 풍기는 분위기에 휩쓸려 이렇게 된 걸 수도 있다고요. 이러다 나중에 셰프님이 저 싫다고 하시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끔하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상처는 엄청나게 클 것 같아요. 전 남자 친구가 그러고 갔을 때요.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깊이 사귄 것도 아니고, 사귀면서는 고작 두세 번 만났을 뿐인데, 인간적인 배신감에 치를 떨었거든요. 그런데 셰프님하고 잘 안 되면…… 많이 힘들 것 같아요.”

그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웃는다. 그의 미소가 점점 진해진다.

“힘들어질 것 같은 이유는?”

알면서 물어.

“글쎄요.”

수아는 답을 피해 버렸다. 유예 기간을 갖자고 하는 마당에, 내가 당신에게 깊게 빠질 것 같다는 고백을 직접 할 수는 없다.

“아주 사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쥐락펴락하는구나?”

“그건 아니…….”

“좋아, 좋다고.”

“그럼…… 제가 하자는 대로 하시겠다는 뜻이죠?”

마지못해 수긍할 줄 알았는데,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하나 더요.”

“뭔데?”

“투어하는 동안은 보는 눈이 많으니까 조심했으면 해요. 다들 셰프님 동경하는 마음으로 투어 신청한 거 같은데…….”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본인 외모에 대한 자각은 있으시죠? 잘생긴 거 아시잖아요. 능력도 있고. 싱글이고. 투어객 스무 명 중에 열세 명이 독신 여성이에요. 물론 그 사람들이 다 셰프님하고 어떻게 해 보려는 목적으로 왔다고는 볼 수 없지만요. 셰프님께 호감이 있는 건 분명해요. 그러니까 저랑 거기서 막 그러면…….”

“그러면, 내가 그 여행객 비위라도 맞추려고 그 사람들이랑 시시덕거려야 한다는 말이야?”

“삐뚤어지지 마시고요.”

한승은 저를 다그치는 여자의 오동통한 입술을 지그시 응시했다. 예쁜 입술로 옳은 말만 골라 해서 기특하기도 하고, 짜증도 난다.

별로 말썽을 부려 본 적 없는 한승은 어릴 때 혼나 본 적도 거의 없을뿐더러,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런데 그녀는 오늘 여러 번 한승을 황당하게 만들고 있다.

“비밀 연애도 아니고, 비밀 유예 기간……. 그런 사이가 되는 건가?”

“뭐, 그렇게 되는 거죠.”

“그걸 굳이 그렇게 기간을 두고 그럴 필요가 있어? 시간 아깝게. 고민해 보라고 했잖아. 시간도 줬고.”

“짧았어요. 제가 셰프님을 겪어 본 시간도 짧고요.”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드는 데 특출 난 재주가 있는 여자다.

“나도 그럼 조건이 있어.”

“말씀하세요.”

그녀는 마치 협상 테이블에 앉은 사람처럼 서늘하게 굴었다. 이미 관계의 주도권은 그녀가 움켜쥐고 있다.

“나한테 그렇게 차갑게 굴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불퉁스럽게 경고하자, 그녀의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팔팔 데워 줘?”

그녀의 눈동자가 레스토랑 안을 살피려 빠르게 돌아간다.

“여기서요?”

“못 할 것도 없지.”

그녀가 미간을 팍 구기며 낮게 읊조린다.

“알았어요. 차갑게 안 해요. 그리고 이런 데서, 길에서 키스 금지.”

“그럼 둘이 있을 때, 키스는 해도 된다는 뜻이고.”

그녀는 아차 싶은 얼굴이었지만, 굳이 또 정정하지는 않는다. 귀여워 죽겠네, 도수아.

세현이 범속한 소문 속에 그녀를 끼워 놓더니, 정작 상처를 받은 사람은 그녀였다. 사랑은 아니었지만, 사람에 배신당한 상처는 있다며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거짓 감정으로 사람을 속이고, 배신하는 일은 절대 못할 사람이다.

“셰프님 조건은 뭔데요?”

그녀가 다소 방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눈동자에는 확신과 의심이 뒤섞여 혼란하다.

“나는 네 마음을 온전히 얻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거야.”

그녀가 숨을 헉 들이켰다. 차갑게만 보이던 여자가 섬세하게 보이는 반응에 한승은 마음이 들뜨고 만다.

“굳이 날짜를 채우지 않더라도, 주고 싶으면 언제든 줘도 돼. 네 온전한 마음.”

그녀는 테이블 어귀를 응시하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한승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좋아요.”

한승은 한숨을 폭 내쉬며 웃었다.

“너 참, 어렵다.”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누구한테? 남자한테?”

“뭐, 두루두루.”

그저 장난으로 내뱉는 말일 텐데, 한승은 가슴이 뒤집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룰을 하나 정해야겠어.”

“무슨 룰이요?”

“유예 기간 동안 나 외의 다른 남자한테 여지를 주는 건 금지.”

“그런 당연한 말은 하지 마시고요.”

“당연한 거 아닌데? 혼자 온 남자 여행객이랑 말 섞지 마.”

그녀는 아, 소리를 내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저 일하는 건데요.”

“그래, 알아. 여행객 눈치 보인다고 그 사람들 앞에서 조심하자며?”

유치한 대거리인 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그녀가 저 예쁜 눈으로 다른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생긋 웃어 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 꼭지가 도는 기분이었다.

“그거랑 그거랑은…….”

“같아. 조심하려면 전부 조심해야지.”

“조심하는 거랑 말도 못 섞게 하면서 일을 방해하는 거랑은 달라요. 저는 셰프님 이번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심하자고 한 거거든요? 집착 금지요!”

“사람 안달 나게 해 놓고, 그런 조항을 넣는 건 비겁한 거야. 그리고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누구한테 달려 있는지 알아?”

“당연히 셰프님이죠.”

“아니.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 살 냄새라면서 순진한 얼굴로 자극하는 사람, 키스 한 번에 주저앉을 듯이 매달리는 사람.”

마주한 그녀의 눈빛이 영롱하게 빛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진실을 바로 보기를 바라며 덧붙였다.

“사람한테 받은 상처 내가 전부 보상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는 너한테 달렸어.”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셰프님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저에 대해 잘 모르시면서.”

“너 무슨 북파 공작원이라도 돼?”

“그건 아니지만…….”

“만약 그렇더라도 나는 상관없어. 너 자체로 중요하지. 배경이나, 조건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난.”

“저는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인상이 차가워 보였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무엇에 기인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서 굉장히 보수적인 편에 속했다. 그녀로서는 갑작스럽게 연애 감정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는 것이 두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잖아. 유예 기간 동안. 유예 기간의 끝은 네가 정해. 끝내고 싶으면 언제든 끝내도 좋아.”

그녀가 정신 사납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연애와 초성이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른 유예 기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대신 긍정적인 방향으로 끝내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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