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3
한승도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서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 그녀와 다른 점이 있다면, 한승은 차가워 보이기는커녕 만인 앞에 친절하다.
그런데 이제껏 살면서 이토록 간절한 감정은 처음이다. 이 사람을 놓치면 생명의 위협이라도 닥칠 것 같은 절박함, 제 인생에 있어 눈앞에 앉은 여자가 절대적일 거라는 확신.
짧은 시간 안에 심장을 들끓게 했을 뿐만 아니라, 머릿속을 잠식해 버려서 무력감이 들게 한 사람은 도수아가 처음이다.
“연애 대신 유예를 시작했지만, 복잡한 이야기는 끝났으니까. 이제 좀 편하게 말해도 되나?”
“계속 편하게 말씀하고 계신데요?”
세상만사를 깨우친 듯 깊은 눈빛을 가진 그녀가 가끔 저렇게 무구한 말을 던질 때면 심장이 바짝 조여드는 것처럼 아찔하다.
“다시 말 높일까요, 도수아 씨?”
놀리듯 물은 말에, 그녀는 치가 떨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되게 끔찍하다는 반응이네요. 내가 말 높일 때 그렇게 별로였습니까?”
“저한테 못되게 군 기억밖에 없거든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았다.
“그럴 리가. 내가 머플러도 풀어 주고, 택시로 집 앞까지 데려다줬잖아.”
“그러면서 셰프님은 사람 불편하게 만드셨잖아요.”
뾰로통한 얼굴이 어여뻐서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대신 너도 둘이 있을 때는 날 셰프님이라고 안 불렀으면 좋겠는데?”
“그럼 어떻게 부를까요?”
그녀는 1교시 수업 시간에 진도를 알아보는 모범생 같은 투로 물었다.
“자기야?”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표정이다.
“그럼 여보?”
“미쳤어요?”
미친 것 같다. 순간 도수아랑 결혼해서 같은 침대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상상하고 말았다. 잠에 취한 얼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아랫배가 묵직하게 뭉쳐 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단숨에 빠져 버렸는지 모르겠다.
“있잖아. 나도 물어볼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혹시 내가 마신 물이나 음료수, 아니면 음식에 환각제 같은 걸 탄 건 아니지?”
그녀는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며 미간을 구겼다.
“나도 이해가 안 돼서. 어쩌다가 너한테 이렇게 홀렸나 싶네.”
그녀가 목을 흠 다듬고는 대꾸했다.
“그러니까 셰프님 지금 이상하다고요. 우린 분명히 유예 기간이 필요한 거예요.”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제대로 된 휴가를 보냈던 기억이 없다. 명절 당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레스토랑을 오픈해야 했기에 쉴 새 없이 일에 매달렸다.
이번 투어는 한승에게 일이면서, 여행이고, 휴식이었다. 오랜만에 여유 속에 던져져, 눈에 띄는 여자를 만났으니 눈이 뒤집힌 건가.
“그러니까 정신 좀 차리세요.”
그렇다고 보기에 눈앞에 여자는 깜찍해도 너무 깜찍하다.
“오늘 투어 시간 전이랑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요.”
“앞으로 도수아한테만 다른 사람일 거야.”
한승은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야. 나는 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야. 하지만 너는 내 상냥하지 않은 모습도 보게 될 거야. 주로 키스할 때나, 그보다 더한 걸 할 때? 네 냄새만 맡으면, 내가 정신이 나가 버리거든.”
“그런 말로 여자를 얼마나 꼬셔 보셨어요?”
“감동받으라고 한 말에 너무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전혀요.”
그녀는 입술이 얇게 맞물리도록 다물고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못 믿겠지만, 처음이야.”
잠시 당황한 듯한 그녀가 한숨을 훅 내쉬며 혼잣말처럼 읊조린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고개를 돌린 채로 흘린 말에 한승이 미간을 구기며 그녀의 말을 따라 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제대로 된 연애해 보신 적 있으세요?”
대답이 궁색해진 한승은 잠자코 있었다.
“그러니까 물불 못 가리고 덤비시는 거겠죠.”
“너는 그래서 제대로 된 연애 해 봤어?”
그녀도 대답이 궁색하기는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인다.
“제대로 된 연애였으면, 그렇게 차이지 않았겠죠.”
“자랑이다.”
그녀가 욕지거리를 내뱉을 것 같은 표정으로 한승을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불필요한 말 하지 말고. 응? 유예 기간은 되도록 줄이고. 응?”
한승은 여전히 고민에 휩싸여 있는 여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오늘 순순히 넘어왔다면, 한승도 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똘똘한 그녀는 요리조리 한승의 제안을 피하고, 말을 퐁당퐁당 받아치며 매력적으로 굴었다.
그녀의 그런 언행이 더욱 유혹적이어서, 한승을 미치게 만든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는 눈치다. 기민한 듯하면서 둔하고, 다 아는 것처럼 굴면서 무구하다.
얼마나 걸릴까, 마음을 여는 데.
얼마나 미칠까, 너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좋을까, 너를 품으면.
한승은 아득한 상상으로 인해 열기가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오래도록 눈에 담았다. 한승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그녀도 연홍색 꽃을 피워 댔다.
* * *
“수아 씨, 좋은 아침.”
벌써 정오가 가까운 시각인데, 서글서글한 미소를 머금은 영석이 다가와 수아에게 인사를 건넨다.
“인사하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네요.”
잠봉 비르 클래스가 끝나고, 집기류를 정리하는 수아의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페이퍼백 남은 건 도로 챙겨야 하고, 레시피 카드는 이따 나눠 줘야 하니까 빼놓고…….
“우리 오후에는 같이 안 움직이죠?”
“아마도요.”
수아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영석에게 시선을 옮겼다. 영석은 머리통만 한 카메라를 옆으로 매고 있었다.
“사실 저는 오후에 투어 팀이랑 따로 움직이거든요.”
“아, 네.”
별 의미 없는 대꾸를 내놓자, 영석의 얼굴에 분명한 의도가 담긴 미소가 떠오른다.
“이 머리통만 한 카메라 쓰러 가려고요.”
굳이 묻지 않은 말을 왜 하나 싶었는데, 영석이 하는 말은 어제저녁 디너 크루즈에서 나눴던 대화의 연장선이었다.
“파리는 처음이세요?”
마주 선 영석이 수아의 곁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아서, 수아는 보조 테이블 위에 놓인 물품을 정리하며 평범한 질문을 던졌다.
“네, 그래서 말인데…….”
영석의 뒷말이 잘 들려오지 않을 만큼 커다란 웃음소리가 쿠킹 스튜디오 안을 울렸다. 수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웃음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여행객들이 그를 둘러싸고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셰프니임. 그냥 오후에도 투어 같이 해 주시면 안 돼요?”
“죄송합니다. 제가 준비한 일정이 오전뿐이라서요.”
“아, 너무 아쉬워요.”
“그냥 여행사에 말해서 우리 투어하지 말고, 셰프님이랑 같이 점심 먹고, 애프터눈 티 같은 거 하면 안 되나?”
“죄송합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오후에는 따로 일정이 있네요.”
그는 정말 아쉽다는 듯이 친절하게 웃어 주었다. 나보고는 다른 남자 보면서 웃지 말라며.
“그럼, 셰프님. 저녁때는 어떠세요? 저희랑 같이 와인 한잔하시겠어요?”
긴 웨이브 머리에 잘록한 허리와 굴곡진 몸매를 드러내는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그의 옆에 바짝 붙어서며 물었다.
그는 단번에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미안하다고 대답하는 듯했다.
저렇게 웃어 줄 필요는 없잖아. 나한테는 여행객 보고 웃지 말라고 해 놓고선.
수아의 손끝에 신경질적인 기운이 묻어났다.
“어휴, 난리도 아니네. 셰프님 저러다 기운 다 빠지시겠다.”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낸 건 시은이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그녀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한승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차한승 셰프 차갑게 생겼는데, 성격은 서글서글한가 봐요. 사람이 의외성에 더 끌리는 법인데, 자기 매력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이네요.”
그를 칭찬하는 것 같으면서도, 영석의 말에는 은근한 가시가 있었다.
“워낙 성격이 좋은 분이세요. 그래서 평판도 좋으시고요.”
역성을 들고 나선 이는 시은이었다.
“아, 시은 씨는 차한승 셰프하고 잘 아는 사인가 봐요?”
“차한승 셰프 직속 후배거든요. 같이 공부할 때도 동기랑 후배들 잘 챙기는 거로 유명했어요. 교수님들이나, 윗기수 선배들하고도 사이좋았고요.”
“기시은 씨.”
영석이 목소리를 낮추며 시은의 이름을 불렀다. 분위기가 묘해서 수아는 모른 척 테이블 위를 정리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차한승 셰프를 엄청 존경하나 보네요?”
누가 들어도 저건 좋아하느냐고 묻는 말이었다. 눈치 빠른 시은이 질문의 의도를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제 또래 프렌치 셰프치고 안 그런 사람 없을걸요. 그래서 셰프님 다들 좋아해요. 저도 그렇고요.”
시은은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괜한 이야기가 돌아서 그에게 피해가 갈 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치? 수아야.”
화살이 애먼 수아에게로 향했다.
“그렇죠.”
시은은 건성인 수아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어서 그의 역성을 들라고 재촉하는 눈빛이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시은의 표정을 보니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책임감이 강하면서, 은근히 소심한 구석이 있는 시은이었다. 게다가 셰프라면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완벽주의자적 기질도 있어서, 자신이 행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흠이 나는 것을 싫어했다.
지금 시은은 투어객이 차한승 셰프와 관련하여 뭔가 엮으려는 것을 염려하는 눈치였다. 다소 예민한 반응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애먼 소문이 나는 것보다야 시은이 택한 방법이 낫다.
수아는 시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차한승 셰프님, 존경스럽죠. 저도 셰프님 좋아해요.”
일순간 실내가 조용해졌다. 수아가 내뱉은 말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무리들이 왜 갑자기 이 타이밍에 말을 멈춘 건지 모르겠다.
멀리서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귀에는 지금 수아가 그를 향한 고백을 한 것처럼 들릴 것이다.
등에 꽂히는 시선이 따갑다. 누가 뒷덜미를 잡아끄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로 끌려가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인다.
수아는 수습을 바라는 눈빛으로 시은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시은의 말에 역성을 들어 준 것처럼, 시은도 그러기를 바랐으나 소심한 구석이 있는 시은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아, 수아 씨도 차한승 셰프 좋아하는구나?”
손에 든 행주로 영석의 입을 콱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