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
어제 분명 수아는 그에게 여행객들 앞에서 행동거지를 조심하자고 엄포를 놓았었다. 그런데 정작 그런 말을 내뱉은 장본인이 모두의 앞에서 고백을 해 버린 꼴이 되어 버렸다.
물론 그게 진지한 사랑 고백 같은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좋아한다고 한들, 사람들이 모인 앞에서 이런 심심한 고백을 하겠는가?
하지만 손에 잡히는 형체가 없는 말의 의도는 왜곡되기 쉬운 법이고, 고까운 마음을 먹고 듣자면 오해하기도 어렵지 않다.
여행객들의 따가운 눈총이 등에 박혔다. 눈총에도 실체가 있었다면 지금쯤 수아는 사망 직전일 것이다.
“차한승 셰프님이 워낙 후배들에게 잘해 주셔서요. 저처럼 존경하는 마음에 따르는 후배들이 많아요.”
이미 늦은 것 같지만,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이른 때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역성들라고 눈치 줄 때는 언제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시은을 대신해서, 수아는 스스로를 두둔하는 말을 내뱉었다.
“아, 그래요? 여자 후배들한테만 인기 있는 건 아니고요?”
웃고 있는 영석의 얼굴이 사악하게 느껴질 정도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빙글거리며 묻는 얼굴에 행주를 문대 버릴까 하는 충동이 또 일었지만, 꾹 참았다.
“그럴 리가요.”
수아는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라는 듯이 차갑게 대꾸했다.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의 곁에서 야단법석을 피우던 여행객들이 수아의 말을 들은 게 문제였지만, 그들은 어차피 이번 투어가 끝나면 다시는 안 볼 사람들이다.
하지만 등 뒤에서 다가오는 남자는 다르다. 연애가 아닌 유예 기간을 갖자고 어젯밤 수아가 길고 긴 설전 끝에 간신히 설득한 남자였다.
“정리 다 됐어?”
그가 수아를 보며 물었다. 순간 시은의 귀가 쫑긋 서는 게 느껴졌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는 시은의 얼굴에 의문이 잔뜩 어린다.
순간 아차 싶었다. 그는 이제껏 수아에게 꼬박꼬박 말을 높이며 불편하게 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말을 놓으며 친근하게 굴고 있으니, 시은의 얼굴에 의문이 어리는 것도 당연했다.
“네, 거의 다 됐어요.”
그의 곁을 싸고돌던 여행객들조차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그래, 수고해. 이따 점심 먹을 때 보자. 시은이도 그때 봐.”
그는 수아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가 놓고는 돌아섰다. 프로젝트를 돕는 후배들을 향한 애정 어린 인사처럼 보였지만, 그의 손이 닿았던 수아의 어깨에는 삽시간에 열기가 고여 후끈후끈했다.
“선배님이 이제 말 편하게 하시네. 다행이다. 이제 너한테도 편하게 하기로 하셨나 보네.”
시은이 다소 안심하는 얼굴로 읊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껏 그가 수아를 별다르게 대한다고 여겼는데, 이제 그게 아닌 것 같아 안도하는 뉘앙스였다.
“그러게요. 저랑은 접점이 없었는데, 갑자기 프로젝트에 나타나서 불편하셨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야 워낙 선배님 소문을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선배님은 저에 관해 모르시니까요.”
수아는 일부러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여행객들의 귀에도 들릴 만큼 큰 소리로 대꾸했다. 다행스럽게도 묘하게 집중되었던 분위기가 흩어지는 게 느껴졌다.
“차한승 셰프는 좋겠어요. 이렇게 끔찍이 따르는 후배들이 있어서.”
영석은 여전히 의혹이 남아 있다는 듯이 굴었다. 이 남자, 뭐 이렇게 집요한 구석이 있을까? 마치 썩은 고기의 냄새를 맡고 다니는 하이에나처럼 음습한 분위기를 풍긴다.
“실례지만, 혹시 하시는 일이 기자신가요?”
수아는 본능적으로 방어적인 목소리를 내며 물었다.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왔던 기자들과 몇 번 마주쳤던 적이 있었다. 그들에게서 났던 특유의 직업적 냄새가 영석에게서 풍겨 왔다.
“도수아 씨, 눈치 빠르단 소리 많이 듣죠?”
“어느 쪽이세요?”
“글쎄요. 되게 모호한 질문인데.”
영석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라는 듯이 미간을 모았다가 별스러울 것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보수냐, 진보냐를 묻는다면. 진보에 가깝고. 정의냐, 돈이냐를 물으면 정의에 가깝고.”
“정치부 쪽이신가 봐요.”
수아는 저도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를 냈다.
“정확히 말하면 국회에 출입하는 경제팀 소속 기자죠.”
내내 장난기가 가득하던 영석의 눈빛에 사뭇 진지한 기색이 어렸다. 어쩐지 그를 처음 대할 때부터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어딘지 모를 불편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수아는 앞으로 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대꾸했다.
“힘든 일 하시네요. 휴가를 길게 오신 건가 봐요?”
“휴가이기도 하고.”
영석은 마치 일의 연장선이라는 듯이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혹시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 알고 저러는 건가?
아버지 도진택 의원은 재소자 자녀의 인권을 위한 법안뿐 아니라, 민생 현안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최저임금 인상과 더불어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으로 인한 생계형 자영업자들과의 마찰 관련 기사에 항상 등장하는 이름이 도진택 의원이었다.
“꼭 일하러 오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여기 뭐 취재할 게 있나요? 파리 관광 산업 관련 취재라도 오셨어요?”
방어적인 본능은 때론 공격적인 성향을 띄기도 한다. 수아는 괜히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그의 취재 목적이 궁금한 척 물었다.
“그건 아니고요.”
영석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선을 그었다.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마르며 초조함이 밀려들기 시작한다. 좀 이따가 엄마한테 전화해서 집엔 별일 없는지, 자신이 조심해야 할 일이 벌어진 건 아닌지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에게 누가 되는 일이 생기는 것은 방지해야 했다. 같은 산을 두고 다르게 볼 수 있는 것처럼, 같은 사건을 두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여론이 불리하게 형성되기도 한다.
만약 서민을 위한 일을 한다는 도진택 의원의 딸이 귀족형 투어 상품의 어시트턴트로 나섰다는 허위 기사라도 난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국회의원임에도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딸이 엄마 병원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거라는 말을 누가 믿어 주겠는가?
아버지의 인생은 아버지의 인생이고, 딸의 인생은 딸의 것이다.
수아는 이제껏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삶에 누가 되는 행동을 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요행을 바란 것도 아니고, 그저 선배를 따라 커리어를 쌓고, 돈도 벌 수 있는 일에 뛰어든 평범한 유학생일 뿐이다.
방어 본능이 무섭게 일어나 수아의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도수아 씨, 우리 쪽 일에 관심 많은가 봐요?”
“어디든 제가 모르는 분야에는 관심이 많아요. 보통 요리하는 사람들이 호기심이 많거든요. 재료를 향한 무한한 호기심과 상상력이 좋은 요리를 탄생시키는 법이니까요.”
수아는 당황하지 않고 그의 질문을 되받았다.
“아, 수아 씨도 요리하는 거죠? 가이드에 보니까 르 꼬르동 블루 출신이라고 적혀 있던데요.”
“네.”
여행객 중에 기자가 있을 거라고는, 그것도 국회 출입 기자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긴장감에 등줄기를 타고 땀이 길게 흘러내렸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멋지네요. 언젠가 서울에서 만날 일도 있겠네요, 도수아 셰프님.”
그럴 일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고, 수아는 속으로 읊조렸다.
“기자님 모실 만큼 좋은 셰프가 됐으면 좋겠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나중에 제 기사 좋게 써 주실 거죠?”
시은이 의외라는 듯이 놀란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보았다. 수아는 평소 수다스럽지도 않을뿐더러, 이런 실없는 말을 하며 웃음 지을 만한 성격도 아니었다.
“어우, 그럼요. 훌륭한 셰프님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가 유쾌한 웃음소리를 내며 수아를 바라보았다.
“자, 이동하겠습니다.”
투어 가이드의 외침에 여행객들이 썰물처럼 쿠킹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오후에는 따로 개인일정을 소화할 거라는 영석도 심심한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를 떴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수아는 가늘게 한숨을 내뱉었다.
“우리도 가자. 오늘 정 지부장님이 점심 대접한다고 했나 봐.”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은과 함께 쿠킹 스튜디오를 나섰다.
아침에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었는데, 금방이라도 비를 쏟을 것처럼 회색 먹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다. 어쩐지 기분이 가라앉는다.
감정이 날씨에 구애받기 시작하면 일상이 피곤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평소라면 먹색 구름을 보고 차분한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쨍한 하늘보다, 흐린 날씨가 좋았다. 햇볕에 반사되는 총천연색이 채도를 잃고 차분하게 가라앉는 모습은 마음마저 평온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흐린 날씨가 기분을 더욱 우중충하고, 예민하게 만들었다.
“어, 이제 나오시네. 가시죠. 오늘은 제가 큰맘 먹고 대접합니다.”
정 지부장이 검은색 밴 문을 열고 수아와 시은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겼다.
“차한승 셰프는 먼저 이동했고요. 저희만 가면 됩니다.”
“어디로 가는 건데요?”
시은이 궁금증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 보면 압니다. 오늘 오후에 특별한 일 없으시죠?”
수아와 시은은 나란히 앉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늘 많이 드세요. 저희 아내가 열심히 준비했어요.”
정 지부장이 두 사람을 이끈 곳은 16구에 있는 그의 집이었다. 빌라 3층과 4층에 자리한 그의 집은 꽤 넓고 쾌적했다.
분홍색 페르시안 카펫이 깔린 고동색 마룻바닥을 따라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나직하고, 상냥한 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그렇지, 고양이는 샤(chat). 잘한다, 우리 지효.”
커다란 창문 앞에 놓인 상앗빛 가죽 소파 위에 그가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머리를 양쪽으로 삐뚤빼뚤하게 묶은 아이가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아서 크레파스로 그림책을 칠하며 재잘거렸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쿠킹 스튜디오에서 느꼈던 긴장감이 싹 가시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이를 향해 미소 짓고 있던 그의 시선이 이끌리듯 천천히 수아를 향했다. 그의 눈가가 슬쩍 풀어지며, 미소가 진해진다.